능동천년약사陵洞千年略史 2 (1800년 - 1945년)
헌종 4년(1838년) 이재 권돈인(權敦仁-시중공파 32세)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능동재사에 화수회(花樹會)를 열고 위토를 더하도록 하였으며 헌종 5년 예천군수 권용만(權用萬)이 위토를 더하였다.
고종 27년(1890년) 재사 동쪽 전사청(典祀廳)의 하례방을 보수하였는데 권연호(權淵浩)의 재사중수기에는 병신(1896년) 4월 8일 밤 숙직자가 실화하여 불길이 치솟고 70여간이 모두 소진되어 현액(懸額)과 신필(信筆)이 모두 타 버리고 오직 장판각(藏板閣)만이 모면하였다.
1897년 4월부터 중건이 시작되어 3년만인 광무 3년(1899년) 완공되었다 하며 추원루에 8개 주련을 붙였는데 충장공 권율도원수 10대손인 경농 권중현(權重顯)이 지었다.
이후 전사청을 중신(重新)하고 유사가 재숙할 성경재(誠敬齋)를 지었으며 이해 가을 중건할 것을 모의하여 여러 회의기구에 배당해 자금을 모아 이듬해 본채 21간을 세우니 당(堂) 4간 서재 4간 당 북쪽에 사경재(思敬齋) 2간, 남쪽에 주사(주방) 5간 동익에 제기보관소 서익에 곡식저장소를 지었다.
1899년 2월 안동에서 의연금으로 추원루를 복원하니 위층은 당헌(堂軒), 아래층은 곳간을 세우니 총 28간이라 하였다. 귀산 권제녕(權濟寧)이 지은 재사중수기실에는 병신년 4월 불이 누각에서 번져 실당으로 만연하여 70여간이 회신되고 임사청(任事廳)과 전사청만 남았으니 계유년(1753년) 재앙보다 더 혹독하였다.
광무 5년(1901년) 능동 동구 가까이 신신도비(新神道碑)를 수갈했는데 고유문은 권연호(權淵浩)가 지었다. 신도비 재건소지에 1661년 4주갑(周甲)이 되니 비신 전후가 갈라지고 글자가 마멸되어 새로 세워야겠다고 1890년 의논 하였는데 병신년(1896년) 화재가 나 네 번의 한서(寒暑)가 지나 9월에 준공하였다고 한다. 신도비 상량문은 33세 권상한(權相翰)이 지었으며 신도비 터는 풍산 유씨 제전이므로 다른 위토와 상환하였다 한다.
광무 7년(1903년) 안동권씨경중대종중보소(安東權氏京中大宗中譜所)를 설치하고 서울과 안동으로 나누어 족보수단을 받아 대종중은 최초로 항렬자(行列字)를 제정 공포하였는데 3월 3일 대종중 명의로 전국에 통문을 보냈으며 31세부터 60세까지 세차배정항렬록을 발송하여 현재 사용하고 있다.
추밀공파 32세 죽농 권중석(權重奭)은 한성판윤, 의정부참찬, 군무총장을 지내고 육군무관학교 교장을 지냈는데 퇴임하면서 1907년 정미보를 발행하였으며 경농 권중현(權重顯)은 참찬과 대신을 지냈는데 융희 3년(1909년) 태사공실기(太師公實記)를 발간하였다. 권중석이 주관하여 발간한 이 실기는 안동 태사묘(太師廟)와 능동재사(陵洞齋舍) 운곡서원(雲谷書院)을 집대성한 권문의 큰 보감이다.
1969년 봉우 권태훈(權泰勳)은 능동실기를 국역하여 「초역능동실기(抄譯陵洞實記)」를 발간하였다.
1972년 재일(在日) 후손들이 모국을 방문하여 구신도비 비각을 중건하고 둘레 담장을 쌓았다.
이해 11월 능동 종약소(宗約所)를 안동권씨대종회(安東權氏大宗會)로 개칭하고 규약을 개정하였으며 대종회에 관리위원회를 두었다.
1976년 대종회관리위원회를 종무위원회로 개칭하였다.
1980년 능동재사의 진입로를 확포장하고 주차장을 마련하였으며 1981년 평창공 배부인 묘를 평창군 묘에 합폄함으로써 태사공묘소 춘추향사에 제전을 넓혔다. 1984년 1월 10일 능동재사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183호로 지정되고 구신도비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87년 추밀공파 36세 중앙화수회장 권달안(權達顔)의 주선으로 신신도비각을 중수하였으며 1990년 12월 능동(陵洞) 봉암(鳳巖) 양소 재사중수위원회를 구성하여 1998년 2월 능동재사가 100년 동안 낡아 중수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