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희생하여 시조묘를 지킨 석항(錫恒)공을 추념함 - 권태현 2011/07/12 > 회원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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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희생하여 시조묘를 지킨 석항(錫恒)공을 추념함 - 권태현 201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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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5,939회 작성일 12-04-30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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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0경 펑창공(平昌公=추밀공파 17世 휘:雍)이 시조묘를 찾아 봉축, 자기의 계장(繼葬), 상하 입비(立碑) 등의 기간에 안동에서는 성화보 인간(印刊=1476) 전후라 수단(收單)과 배포 때문에 경향간에 족인의 내왕이 많아 능동공역을 몰랐을 리 없는데 우리 문중은 오불관언(吾不關焉) 무관심하였고, 평창공의 아들 형제(裕, 綽)가 유언을 이루어 놓고 묘산(墓山)의 관리를 남매간인 유소(柳沼-유성룡의 高祖)에게 부탁하고 충주로 환향하여 4대후에 절손(絶孫)이 되고 1567(명종 22) 유성룡(禮文館員 때)등 유문 9人이 태사묘직(太師墓直)을 하는 봉정사 능동사(鳳停寺 陵洞寺) 승려를 보충하여 달라는 제청에도 권문은 관여치 않았다. 1580경(萬曆初) 유성룡 형제가 부친 중영(仲郢)을 평창공묘 아래에 입장하면서 부터 유씨가 묘산(墓山)의 주역으로 더욱 굳어져 갔다. 
  묘를 찾은 지 90여년 후인 1557년에 권소(權紹-檢校公派 20世)가 성묘 사토하고 한식에 시사(時祀)를 연례화한 후 현족(顯族)의 연이은 전헌(奠獻), 수축(修築=1563 개비(改碑=1588,1746) 건재(建齋=1653) 신도비건립(1661)을 하면서도 한번 넘어간 묘산의 소유는 되찾지 못하였다. 
  1714(숙종 40) 9월 유성연(柳聖淵)이 시조묘역(始祖墓域)의 환송(環松)을 벤 것을 권문에서 문제 삼아(유씨의 묘산 전유(專有)를 제동(制動) 목적) 안동부에 정문(呈文=訴狀)을 낸 것이 산송(山訟)의 발단이 되어 1776년 까지 안동 양문에서는 안동부와 대구감영에, 서울 권문에서는 한성부와 비변사(備邊司)에 여러번 소장을 내어 ‘태사묘의 주안(主案)과 용호(龍虎) 三里는 권씨 전유(專有)로 하라’는 판결이 났지만 실제는 유문이 이행을 않았다.
  1734(영조 10) 보판각(譜板閣)용으로 벤 재목을 유씨가 탈취함
  1736(영조 12) 재사(齋舍)밑에 식송(植松)한 것을 유씨가 뽑아버림.
  1742(영조 18) 섣달그믐에 유씨가 재승(齋僧=太師墓直)을 쫓아 냄
  1745(영조 21) 재사수리용 목재를 감영(監營) 관군의 지원하에 벌목(伐木)할 수 있었음. 
  1760(영조 36) 신도비 훼손(毁損)사건이 발생했는바 유씨의 노배(奴輩)의 자복(自服)을 받아 소장을 안동부에 3번, 대구감영에 2번 내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처리.
  1775(영조 51) 9월에 유남춘(柳南春)이 妻를 태사묘 백호등(白虎嶝)에 투장(偸葬), 權門에서 安東府에 告發, 
      부사(府使) 유성환(兪星煥)이 현장답사(現場踏査)후 태사묘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권문 패소판결(敗訴判決)
      權錫恒이 울분(鬱憤)을 못 이겨 굴묘유기(掘墓遺棄)하고 투옥신문에도 단독소행이라 주장하고 자산(慈山=平安北道)으로 유배 병사. 
  1776(영조 52) 유섬조(柳暹祚)등이 전년의 승소를 믿고 권씨의 벌목건을 이유로 묘산의 소유를 유씨의 전유로 하여 달라고 감영에 쟁송을 제기함에 권문에서는 9,000자에 달하는 정문(呈文)을 제출(28世 鶴林 權訪의 主管으로 推定)하여
  “태사의 묘소는 조가(朝廷)에서 획정하여 수호하는 만큼 소중함이 있는 것인즉<중략> 묘소의 주맥괴 안산 및 청룡 백호로서 보이는 곳은 전자의 결정(1714-숙종 40년 비변사의 판걸)한 바에 따라 권씨의 재궁에 전속시켜 뜻을 오로지 하여 수호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라는 판결문을 다시 받았다. 
  이후로는 유씨가 묘산의 공동소유를 승복하므로 써 60여 년간의 치열(熾熱)한 산송이 끝이 났는데 이는 二千里 거리에 늦게 전문(傳聞)된 권석항공의 죽음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240년 전의 사실이 기록으로 전하는 것이 극히 간략하여 공의 파계, 대수, 나이, 혼인여부, 자손의 유무를 알 수 없는바 추측컨대 혈기왕성한 미혼의 청년으로서 부사의 편파적 판결에 발만 동동 구르는 문중의 회의정경을 보고 울분을 못 이겨 “묘를 파서 던져버리겠다”고 호언하고 당장에 결행하였을 것이다. (안동 에서 서울 門中에 보낸 통문에 “천만 자손중에 어찌 굴파할 사람이 없으리오?” 라는 구절(句節)이 있음) 굴묘(掘墓) 유기는 살인에 준하는 당시의 법속이라 교사 동조자를 추궁하는 부사의 국문에 끝까지 단독소행이라 주장하여 한사람의 연루자 없이 혼자 죄를 말아지고 장독과 노독으로 인하여 귀양땅(慈山=평안북도)에 도착하자마자 가족의 물 한 모금 못 받아 마시고 천리고혼이 된 것이다. 이 장열하고 불상한 선령(先靈)이 후손의 제향도 못 받는다면 시조묘사 음복주라도 우리 권족의 이름으로 올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된다.
                              (2000刊 太師公實記 墓道編에서 拔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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