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대첩의 역사적 의의 - 권태현 2011/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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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8,505회 작성일 12-04-30 16:44본문
고창전역은 고려의 신라구원전의 일환(一環)이 아니라 견훤의 경주(慶州) 기습(奇襲) 2년 후에 있은 사건으로 백제의 北進에 대한 고려 태조의 親征戰으로 수세(守勢)에 급급하던 고려가 고창군(古昌軍)의 영합(迎合)을 얻어 견훤을 대패(大敗)시킴으로써 정세를 역전(逆轉), 후삼국통일의 전기를 이룬 대승리였다. 이 과정(927~930)을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와 동사강목(東史綱目)을 통하여 살펴보자. < 內 >는 필자(筆者) 주석(註釋)입니다.
태조 天授10년 丁亥(927) <신라 경애왕 4년. 후백제 견훤 36년>
○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尙州 聞慶間)을 쳐서 이를 불사르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高鬱府:永川)를 습격하고 서울<경주> 교외에 가까이 이르니신라왕이 연식(連式)을 보내어 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청하였다. 왕이 시중 공훤(公萱)ㆍ대상(大相) 손행(孫幸)ㆍ정조(正朝) 연주(聯珠) 등에게 이르기를, “신라가 우리와 화호(和好)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이제 급한 일을 당하였으니 구원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고, 공훤 등을 보내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게 했는데, 미처 이르기 전에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갑자기 신라의 도성으로 들어갔다. 이때 신라왕은 비빈(妃嬪)ㆍ종척(宗戚)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나와 술자리를 베풀고 즐기다가 갑자기 적병이 왔다는 말을 듣고 창졸간에 어찌할 줄 몰랐다. 왕과 부인(夫人)은 성 남쪽의 별궁으로 달아나고 시종과 신하ㆍ궁녀와 영관(伶官 악관(樂官))들은 모두 적의 손에 잡혔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크게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하였다. 좌우 사람들을 시켜 왕을 찾아내어 군중 안에 두고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제로 능욕했으며, 그 부하를 놓아 빈첩(嬪妾)들을 난행(亂行)하게 하였다. 왕의 표제(表弟=姨從弟) 김부(金傅)를 세워 왕으로 삼고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신(宰臣)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자녀와 각종 공인(工人)ㆍ무기와 보물을 모조리 가지고 돌아갔다. <고려>왕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친히 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천명을 거느리고 견훤을 공산(公山:대구팔공산) 동수(桐藪)에서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견훤의 군사가 매우 급하게 왕을 포위하여 대장 신숭겸(申崇謙)ㆍ김낙(金樂)이 힘껏 싸우다가 죽고, 모든 부대가 패배하니 왕은 겨우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견훤이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군(大木郡=경북 칠곡군(漆谷郡) 약목면(若木面))을 빼앗고 들에 쌓아두었던 곡식을 불태워 없애 버렸다. 왕은 두 사람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김낙의 아우 철(鐵)과 숭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명복을 빌었다. 숭겸은 광해주(光海州) 사람인데 용맹하고 장대하여 항상 태조의 정벌을 따라 공이 있었다. 후에 장절(壯節)이라 시호하고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天授 12年 己丑(西紀 929年) <新羅 敬順王 3年. 後百濟 甄萱 38年>
○ 12월에 견훤이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을 포위하므로 <우리 始祖(幸)께서 여러 사람에게 모의(謀議)하기를 “甄萱은 의리(義理)상 한 하늘 아래에 같이 살 수 없는 원수(不共戴天)이니 어찌 王公(고려 태조)에게 돌아가 통분(痛忿)을 설치(雪恥)하지 않으리오.”하고 항전(抗戰)을 결의(決議)하니>왕이 가서 이를 구원하려고 예안진(禮安鎭)에 머무르면서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대상 공선(公萱)과 홍유(洪儒)가 아뢰기를, “만약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샛길로 가야하고, 죽령(竹嶺)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유금필(庾黔弼)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군사는 흉한 것이요, 전쟁은 위태로운 일이라 하였습니다. 죽을 결심을 하고 살려는 생각이 없어야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적군 앞에 나아가 싸워보지도 않고 먼저 패배할까를 염려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만약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군의 3천여 대중을 그냥 적에게 주는 것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왕이 그 말에 따랐다. 금필이 이에 저수봉(猪首峯)에서 힘껏 싸워서 크게 이겼다. 왕이 <三太師의 迎接을 받아> 그 고을에 들어가서 금필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일은 경의 힘이다." 하였다.
天授 13年 庚寅(西紀 930年) <新羅 敬順王 4年. 後百濟 甄萱 39年>
○ 봄 정월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고창군(古昌郡)의 병산(甁山)에 진을 치고 견훤은 석산(石山)에 진을 치니, 서로의 거리가 5백 보쯤 되었다. 드디어 서로 싸우자, 견훤은 패하여 달아나고,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잡았으며, 죽은 자가 8천여 명이었다. 고창군에서 <삼태사가>아뢰기를, “견훤이 장수를 보내어 순주(順州-豊山)를 쳐서 함락시키고 인호(人戶)를 약탈하고 갔습니다." 하니, 왕이 곧 순주로 가서 그 성을 수축하고 장군 원봉(元奉)을 죄주었으며, 다시 순주를 하지현(下枝縣)으로 강등시켰다. 고창의 성주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正二品))으로, 권행(權行)과 장길(張吉)을 대상(大相=正四品)으로 삼고, 그 고을을 안동부(安東府)로 올려서 식읍으로 삼았다. <특히 우리 시조에게는 “幸은 기미(幾微=기회)에 밝아 權道를 達成했다.”하고 權으로 賜姓하였다.> 이에 영안(永安=永川)ㆍ하곡(河曲=河陽)ㆍ직명(直明 안동지역)ㆍ송생(松生=靑松) 등 30여 군ㆍ현이 차례로 와서 항복하였다.
○ 2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고창 싸움에서 이겼다고 알리니,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답례하고, 글을 보내어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때 신라의 동쪽 주(州)ㆍ군(郡) 부락(部落)이 다 와서 항복하니 명주(溟州)에서 흥례부(興禮府 안동)까지 모두 110여 성이었다.
○ 일어진(昵於鎭 영일군(迎日郡) 신광면(神光面))에 행차하여 성을 쌓고 이름을 신광진(神光鎭)이라 고치고 백성을 옮겨서 이곳에 채웠다. 남미질부(南彌秩夫)와 북미질부(北彌秩夫=영일군 의창면(義昌面)) 두 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역사는 가정(假定)이 없지마는 만약에 三太師가 여제간(麗濟間)에 中立을 지켰거나 百濟에 협력하였다면 古昌의 승패(勝敗)와 삼한(三韓)의 主人이 어떻게 되었을까?
권태사의 나도(羅都) 유린(蹂躪)에 대한 의분(義奮)과 삼태사(三太師)의 현명한 선택이 견훤에 대패(大敗)를 안겨주고 高麗에 대승(大勝)을 거두게 하여 공산(公山)참패 후 수세(守勢)에 급급하던 고려가 일거(一擧)에 역전(逆轉)하여 통일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게 하였다.
이후 세분은 특기한 공훈(功勳)이 없었지마는 統一후 940년(태조 23년) 30名을 한정(限定)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策錄)되고 뒤이어 삼중대광(三重大匡=正一品) 태사(太師=임금의 고문으로 인신(人臣)의 최고 관직)에 증직되었으며 983년(成宗 2년)에는 안동 부민(府民)이 견훤으로부터 어육(魚肉)을 면하게 한 공덕(功德)을 기려 부사(府司)에 사당을 세우고 향사(享祀)를 시작한 것이 1,000年을 이어오고 있다.>
태조 天授10년 丁亥(927) <신라 경애왕 4년. 후백제 견훤 36년>
○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尙州 聞慶間)을 쳐서 이를 불사르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高鬱府:永川)를 습격하고 서울<경주> 교외에 가까이 이르니신라왕이 연식(連式)을 보내어 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청하였다. 왕이 시중 공훤(公萱)ㆍ대상(大相) 손행(孫幸)ㆍ정조(正朝) 연주(聯珠) 등에게 이르기를, “신라가 우리와 화호(和好)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이제 급한 일을 당하였으니 구원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고, 공훤 등을 보내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게 했는데, 미처 이르기 전에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갑자기 신라의 도성으로 들어갔다. 이때 신라왕은 비빈(妃嬪)ㆍ종척(宗戚)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나와 술자리를 베풀고 즐기다가 갑자기 적병이 왔다는 말을 듣고 창졸간에 어찌할 줄 몰랐다. 왕과 부인(夫人)은 성 남쪽의 별궁으로 달아나고 시종과 신하ㆍ궁녀와 영관(伶官 악관(樂官))들은 모두 적의 손에 잡혔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크게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하였다. 좌우 사람들을 시켜 왕을 찾아내어 군중 안에 두고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제로 능욕했으며, 그 부하를 놓아 빈첩(嬪妾)들을 난행(亂行)하게 하였다. 왕의 표제(表弟=姨從弟) 김부(金傅)를 세워 왕으로 삼고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신(宰臣)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자녀와 각종 공인(工人)ㆍ무기와 보물을 모조리 가지고 돌아갔다. <고려>왕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친히 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천명을 거느리고 견훤을 공산(公山:대구팔공산) 동수(桐藪)에서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견훤의 군사가 매우 급하게 왕을 포위하여 대장 신숭겸(申崇謙)ㆍ김낙(金樂)이 힘껏 싸우다가 죽고, 모든 부대가 패배하니 왕은 겨우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견훤이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군(大木郡=경북 칠곡군(漆谷郡) 약목면(若木面))을 빼앗고 들에 쌓아두었던 곡식을 불태워 없애 버렸다. 왕은 두 사람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김낙의 아우 철(鐵)과 숭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명복을 빌었다. 숭겸은 광해주(光海州) 사람인데 용맹하고 장대하여 항상 태조의 정벌을 따라 공이 있었다. 후에 장절(壯節)이라 시호하고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天授 12年 己丑(西紀 929年) <新羅 敬順王 3年. 後百濟 甄萱 38年>
○ 12월에 견훤이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을 포위하므로 <우리 始祖(幸)께서 여러 사람에게 모의(謀議)하기를 “甄萱은 의리(義理)상 한 하늘 아래에 같이 살 수 없는 원수(不共戴天)이니 어찌 王公(고려 태조)에게 돌아가 통분(痛忿)을 설치(雪恥)하지 않으리오.”하고 항전(抗戰)을 결의(決議)하니>왕이 가서 이를 구원하려고 예안진(禮安鎭)에 머무르면서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대상 공선(公萱)과 홍유(洪儒)가 아뢰기를, “만약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샛길로 가야하고, 죽령(竹嶺)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유금필(庾黔弼)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군사는 흉한 것이요, 전쟁은 위태로운 일이라 하였습니다. 죽을 결심을 하고 살려는 생각이 없어야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적군 앞에 나아가 싸워보지도 않고 먼저 패배할까를 염려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만약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군의 3천여 대중을 그냥 적에게 주는 것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왕이 그 말에 따랐다. 금필이 이에 저수봉(猪首峯)에서 힘껏 싸워서 크게 이겼다. 왕이 <三太師의 迎接을 받아> 그 고을에 들어가서 금필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일은 경의 힘이다." 하였다.
天授 13年 庚寅(西紀 930年) <新羅 敬順王 4年. 後百濟 甄萱 39年>
○ 봄 정월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고창군(古昌郡)의 병산(甁山)에 진을 치고 견훤은 석산(石山)에 진을 치니, 서로의 거리가 5백 보쯤 되었다. 드디어 서로 싸우자, 견훤은 패하여 달아나고,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잡았으며, 죽은 자가 8천여 명이었다. 고창군에서 <삼태사가>아뢰기를, “견훤이 장수를 보내어 순주(順州-豊山)를 쳐서 함락시키고 인호(人戶)를 약탈하고 갔습니다." 하니, 왕이 곧 순주로 가서 그 성을 수축하고 장군 원봉(元奉)을 죄주었으며, 다시 순주를 하지현(下枝縣)으로 강등시켰다. 고창의 성주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正二品))으로, 권행(權行)과 장길(張吉)을 대상(大相=正四品)으로 삼고, 그 고을을 안동부(安東府)로 올려서 식읍으로 삼았다. <특히 우리 시조에게는 “幸은 기미(幾微=기회)에 밝아 權道를 達成했다.”하고 權으로 賜姓하였다.> 이에 영안(永安=永川)ㆍ하곡(河曲=河陽)ㆍ직명(直明 안동지역)ㆍ송생(松生=靑松) 등 30여 군ㆍ현이 차례로 와서 항복하였다.
○ 2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고창 싸움에서 이겼다고 알리니,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답례하고, 글을 보내어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때 신라의 동쪽 주(州)ㆍ군(郡) 부락(部落)이 다 와서 항복하니 명주(溟州)에서 흥례부(興禮府 안동)까지 모두 110여 성이었다.
○ 일어진(昵於鎭 영일군(迎日郡) 신광면(神光面))에 행차하여 성을 쌓고 이름을 신광진(神光鎭)이라 고치고 백성을 옮겨서 이곳에 채웠다. 남미질부(南彌秩夫)와 북미질부(北彌秩夫=영일군 의창면(義昌面)) 두 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역사는 가정(假定)이 없지마는 만약에 三太師가 여제간(麗濟間)에 中立을 지켰거나 百濟에 협력하였다면 古昌의 승패(勝敗)와 삼한(三韓)의 主人이 어떻게 되었을까?
권태사의 나도(羅都) 유린(蹂躪)에 대한 의분(義奮)과 삼태사(三太師)의 현명한 선택이 견훤에 대패(大敗)를 안겨주고 高麗에 대승(大勝)을 거두게 하여 공산(公山)참패 후 수세(守勢)에 급급하던 고려가 일거(一擧)에 역전(逆轉)하여 통일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게 하였다.
이후 세분은 특기한 공훈(功勳)이 없었지마는 統一후 940년(태조 23년) 30名을 한정(限定)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策錄)되고 뒤이어 삼중대광(三重大匡=正一品) 태사(太師=임금의 고문으로 인신(人臣)의 최고 관직)에 증직되었으며 983년(成宗 2년)에는 안동 부민(府民)이 견훤으로부터 어육(魚肉)을 면하게 한 공덕(功德)을 기려 부사(府司)에 사당을 세우고 향사(享祀)를 시작한 것이 1,000年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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