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 권영은 선생 유해를 모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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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오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4,080회 작성일 21-11-18 11:18본문
권영은 선생 유해를 모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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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은 선생(權寧殷, 동정공파34世)의 유골이 무연고로 폐기 될 지경이니 이를 인도적 차원에서 대종회나 파종회의 동의하에 관련 사회 단체가 북녘에 가족이 있는 분들은 별도로 인도적 차원에서 사찰에 모시고 있으니 이 분들(권오헌 회장)의 노력에 부응하여 권문과 동정공파들은 협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절차는 예천읍에 가서 연고자(친인척)나타났다고 하고 [공문서]를 보내게한다.
공문서 내용은 가족관계증명서 포함(현재는 권헌익- 서울대교수 권영은 선생의 부친의 이복 막내동생 故권0학 1928년생 아들, 권0익 1960년생 즉 4촌동생이 가장 가까움) 제출
도져히 안되면 안동권씨종친회(권오철 기자, 사업국장)나 동정공파에서 건의하여 ‘공문서’작성 보낸다.
<내용> 권영은 선생의 유골은 연고자가 거부 함으로써 권씨종친회(동정공파)의 요청에 의해 ‘민가협’ 관련 권오헌 선생 주도하의 ‘장기수 유골 모시는 사찰’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관련자료실: https://cafe.naver.com/pakchungseo (카페개설자 권오철)
3년전 스토리
통일운동가
고강 권영은 선생 별세,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
지난 1월16일오전 9시, 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사연을 안고 예천에 계시던통일운동가 고강 권영은(孤崗 權寧殷,1922-2019,동정공파 35세)선생이 한 많은 98세의생을 마감하였다.
16일 예천권병원 영안실에서 군청 직원의 무연고 처리 서류와 함께 3시에 입관하고, 빈소도 없이, 다음날 12시에문경화장장에서 한줌의 재가되고, 경북 구미소재 쓸쓸한 보관소에 방치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일정 기간 후에는 폐기되다고 하니 더욱 서늘한 느낌이다.
선생은 1922년9월4일 안동 북후면 명문가에서 출생하여. 포항에서 성장하고 서울 배재고등학교, 일본 중앙대학 경제학과 졸업하고 조선법학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부인심옥봉여사는 숙명여학교 출신이고 부친은 권태직 선생은 경기고 출신으로 삼성가에 도움을 준 은행가이다. 이집안에 장관,청장급,방송사사장,세계최고 대학 교수등이 즐비 한데, 이런 참담한 지경이니 현대사의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분의 삼남일녀와 부인은 북한에 있다. 물론월북과 남하, 20여년간의 옥살이 등이 모든 친족의 출세에 지장을 주어서 그리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제는참으로 이와 같은 일은 막아야한다. 80년 출소후에는 민족사 연구와 양생비법을 연마하셨다. 장수의 비결이 그것이 아닌가 한다.
안동시 북후면에 선산이 버젓이 있고 그 형제들이 3남6녀이며 모두 일제시대 출생인데도 명문대 출신이고 그 후손도 다 그렇다. 비록 그 형제들은 다 돌아가셨디고는 하지만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1962년, 그 막내 여동생 결혼식 방명록을 보니 이병철, 정주영등 고관대작이 즐비하니 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회와 국가는 앞으로 이런 사례가 부지기수로 나올 것이기 때문에 갈등을 조절하고 화해를 주선해줘야하는 장치를 마련해야한다. 이에 적당한 조직은 종친회이니 이의 활성화와 제도화가 시급하다 하겠다. 종친회는 민족적 자산이며 공동체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선생은 민족사의비극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오로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남은 생을 보냈다.
어려운 일상생활 속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스스로 자립하며, 자신의역량을 키우기 위해 매일 공부하는 지성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언젠가 들려주신 말씀은 “대한민국을 올바르게 이끌어 가야할 지도자와 지식인은 첫째, 민족의입장에서 보다 자주적인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지도자는 유한하고 민족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둘째, 대한민국은 우리 문화와 우리 고유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한다. 그리고 이를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세계화다. 셋째, 불의(不義)를 보고 용감하게싸우는 지도자와 지식인이 없다. 대부분 소시민적인 편안한 삶에 빠져 있다. 진정으로 자신의 모든 걸 버리고 일반 서민들에게 봉사하며 희생하려는 대통령과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넷째, 지식인들이 모두 안다고 큰소리치지만 실제 내용의 알맹이를알지 못하고 있다. 현실문제에 있어서 ‘잘한 것은 잘 한다, 못한것은 못 한다’고 말해야 한다. 학벌이 필요없다. 진리를사랑하는 사람만이 애국자다. 다섯째, 지역 차별과 남북간의갈등은 늘 있기 마련이다. 지도자는 이를 잘 조정하고 타협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민족끼리 그리고 형제간에 다투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도록 모두 노력해야 한다.지도자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기의 사소한 이기심을 버리고 올바른 정신을 갖고국민에게 헌신해야 한다.”
당시 88세 미수(米壽)의 연세에도 목소리는 젊은이 못지않게 크며 눈빛은 형형했던 기억이 새롭다.
또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난 선생이 어릴 때 주변사람들이 너무 가난하고 못 살아서 그들의 참상을 보면서 “나는 잘 살아도내가 잘 사는 것인가? 내가 행복한가? 사람은 모든 사람이잘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다.”라고 스스로 자문자답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해방 전후 시기와 1950년대 시대상의 남북한의 실상을 잘 알고 있는선생의 경험담은 너무 생생하였고 다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 말하지 못한 것은 글로 남기셨다니 유품에서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며, 선생의 명복을 빈다. (글 안동권씨종보사 기자 권오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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