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헌공(正獻公)상유(尙游)와 정간공(靖簡公) 혁(爀)종보제475호2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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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156회 작성일 14-12-29 09:50본문
정헌공(正獻公)상유(尙游)
공은 화천군(花川君)의 7세손으로 찰방공 주(霔)의 증손이며 육우당 격(格)의 셋째아들이다. 호는 구계(癯溪) 또는 만포(晩圃)이다. 효종 7년 출생하여 수암(遂菴)선생을 스승으로 수학한 후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01 정헌공 상유 신도비각(충남금성면 두곡리 재사내)
숙종 20년 알성시(謁聖試) 문과 병과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으며 삼사(三司)의 여러 벼슬을 거쳐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공이 응교(應敎:정4품)로 있을 때 실학자 박세당이 사변록(思辨錄)을 지어 주자학을 비판하니 왕명으로 그 책을 불태울 때 공은 조리있게 논박하는 변설문(辨說文)을 작성하여 공의 학설이 떨치게 되었다.
공은 개성유수, 전주부윤,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지냈는데 세곳에서 선정을 베풀어 유애비(遺愛碑)가 섰고 수원부사로 있을 때 관원들의 비행을 적발하여 이도(吏道)를 크게 쇄신시켰다.
02 정헌공 묘소: 충남 금성면 두곡리
공은 청나라의 연경(燕京)에 다녀와 주자를 공문(孔門:공자의 문하생)의 십철(十哲)과 함께 문묘에 배향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은 숙종 32년 대사간이 되고 이,예,공조참의를 거쳐 전라도, 평안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호조판서(戶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우참찬이 되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 보임 시 숨은 인재를 많이 등용하였으나 경종 1년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노론이라 하여 삭탈 관직되었다.
경종 4년 졸하니 수 69세였다. 유고로 문집을 남기고 정헌공(正獻公)의 시호를 받았다. 묘소는 충남 금성면 두곡리 선영 아들 숙 묘소 아래에 있다. 신도비문은 영의정 이의현(李宜顯)이 짓고 문원공 민우수(閔遇洙)가 쓰고 전서는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썼다. 후사는 증 사복시정 숙(火肅), 이조판서를 지낸 정간공 혁(爀), 증 참의 위(煒), 첨지중추 영(煐), 별제 훤(煊), 찰방 휴(烋)와 3녀를 두었다.
정간공(靖簡公) 혁(爀)
03 정헌공신도비와 묘비
정헌공 상유(尙游)의 둘째 아들이다. 숙종 20년 출생하여 호는 운양(雲陽)이고 숙종 45년 사마시 진사시 장원하고 생원시 1등하여 세자익위사 세마(洗馬)로 발탁되었으며 영조 2년 33세에 알성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갔는데 정미환국으로 소론(少論)이 등장할 때 실록청(實錄廳) 낭관(郎官)으로 숙종실록의 보궐정오편(補闕正誤篇)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04 숙묘소
05 숙, 혁묘비
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이 일자 공은 여주에서 올라와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대신들이 한성을 버리고 피난가자고 주장하였는데 공은 적극 반대하여 난을 진압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난이 평정되자 공은 벼슬을 버리고 다시 청풍의 황강으로 가 학문에 열중하였는데 왕이 수차 불러도 응하지 않했다. 영조 5년 부수찬으로 나아가 상소를 올린 것이 당론에 치우쳤다 하여 삭탈되었는데 곧 홍문관 교리에 등용되어 영조 8년 당론을 논하다가 해남으로 유배되었다. 영조 10년 41세에 서용되어 영조 17년 48세로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영조 20년 경상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이조참의,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영조 24년 평안도 관찰사(觀察使)로 있으면서 암행어사의 탄핵을 받는 수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의 천거로 대사헌(大司憲)이 되니 공의 관직에 있어 파란만장함은 당파싸움에 기인된 것이었다. 영조 28년 부제학, 세자시강원우빈객으로,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다 영조 34년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06 정간공 혁 묘소 : 충남 금성면 두곡리(선고 계하)
영조 22년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청도의 정자동 일대에서 2세조 낭중공(郎中公)묘소를 수탐하였으나 발견치 못하였다. 공은 누차 관직에 있어 청렴결백한 일생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공이 유배되었던 해남에는 유애비(遺愛碑)가 섰으니 유배지에서도 공의 자애(慈愛)와 풍절(風節)을 짐작할 수 있겠다. 공은 영조 35년 졸하니 수 66세였으며 정간(靖簡)의 시호가 내렸다. 묘소는 금성군 두곡리 선영 선고 계하에 있다. 후사는 창녕현감 을 지낸 호성(浩性)과 4녀가 있다.
30세 단와공(端窩公) 비응(丕應)
07 비응 초상
공은 정헌공(正獻公)상유(尙游)의 증손이고 위(煒)의 손이며 약성(若性)의 제3자이다. 영조 30년 출생하여 정조 2년 사마시로 진사가 되고 순조 6년 53세로 별시문과급제하였다. 공은 학식과 문장에 뛰어나 청환직(淸宦職)으로 옥당(玉堂)에 선임되어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냈다. 순조 31년 졸하니 유고로 문집을 남겼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남방리에 있고 후사가 없어 백씨 대응의 3자 문과설서(文科設書) 중화(中和)를 계자로 입후하였다.
34세 농춘공(農春公) 응선(應善)
대사헌 응선 시평
정헌공(正獻公)상유(尙游)의 7세손이고 조부는 이조참의 택인(擇仁)이며 선고는 증 이조참판 금산군수 용직이다. 공은 헌종 1년 출생하여 사마시하여 성균관의 태학생으로 있다가 고종 1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고종 35년 졸하니 수 75세이고 묘소는 공주시 정안면 문천리 신전에 있다. 아들은 참봉 한(澣), 비서승 윤(淪), 주사 필(泌), 시종관 항(沆) 진사 연(淵)을 두었다.
22세(世) 상(鏛), 진위공 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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