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몽당(淸夢堂) 제(霽)와 이판공(吏判公) 주(霔)의 자손들(종보472호2014.10.1)
작성일 14-10-01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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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곳재사 전경 : 경기도 시흥시 하중동 능내
24세(世) 청몽당(淸夢堂) 제(霽)
2. 청몽당(淸夢堂) 제(霽) 묘소 : 시흥시 하중동 능내
공은 명종 8년에 출생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좌위(忠佐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호는 이이(而已)이며 문장명세(文章鳴世)로 당세의 명류(名流)와 교유하였다. 수은(睡隱) 강항(姜沆)이 청몽당기(淸夢堂記)를 지었다. 묘소는 시흥시 직곶의 능내 선산 조고 현(鉉)묘 계하에 있다. 후사는 유원(有源), 만원(萬源) 그리고 1녀를 두었다.
3. 청몽당 금청각 : 전북 남원시 노암동
4. 청몽당 필적
집의공 유원(有源)은 선조 29년에 출생하여 현종 14년 졸하니 집의(執義)로 증직되었다. 묘소는 선고묘 계하에 있다.
5. 집의공 유원묘소
6. 유원이 주에게 준 노비문서와 경(炅) 호구단자
공은 주(柱), 우(楀)와 3녀를 두었다. 주(柱)는 광해군 9년 출생하여 숙종 3년 졸하니 승지(承旨)로 증직되었다. 묘소는 인천 검의곡에 있다. 집의공이 1634년 장자 주(柱)에게 준 노비문서는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주(柱)는 이조참찬으로 증직된 화릉군 상우(尙友)와 사마시하여 참봉이 된 상도(尙度) 그리고 상경(尙糸冏)을 두었다.
화릉군(花陵君) 상우(尙友)
7. 화릉군(花陵君) 상우(尙友) 묘소 : 시흥시 하중동 능내
공은 인조
아들은 진천현감 경(炅), 정랑 흡(火翕 ), 부윤 황(火晃)을 두었다.
경(炅)의 증손 중립(中立)은 진주목사 제응(濟應)의 차자로 영조 29년 출생하였다. 공은 학행으로 천제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진산군수를 지냈는데 순조 14년 임소에서 62세로 졸하였다. 훗날 문헌공 돈인(敦仁)이 귀히 되어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황(火晃)의 손 성응(聖應)은 영조 5년 출생하여 관직은 돈령부 도정(都正)이고 순조 3년 졸하였다. 묘소는 시흥시 도창동 승지공 묘하에 있다.
아들 중교(中敎)는 영조 25년 출생하여 순조 15년 졸하였다. 중교(中敎)의 손 용정(用正)은 순조 1년 출생하여 호가 소유(小游)이며 학행으로 출사한 후 산청군수를 거쳐 청풍부사를 지냈는데 다스린 고을에서는 선정을 기리는 거사비(去思碑)가 있으며 문장이 탁월하여 세상을 명동(鳴動)시켰다. 철종 12년 61세로 졸하니 유고로 소유집(小游集)7권을 남겼다. 묘소는 시흥시 도창동에 있다.
8. 시흥(상도)묘역 : 시흥시 하중동 재사 앞산
상도(尙度)
공은 효종 10년 출생하여 현종 10년 사마시하여 참봉이 되었다. 묘소는 시흥시 직곶의 능내 선산 아래에 있다.
24세(世) 찰방공(察訪公) 주(霔)
9. 찰방공(察訪公) 주(霔) 묘소 : 충북 제천시 한수면 황강리
10. 찰방공 필적
선조 7년 출생하여 광해군 4년 식년시 진사 급제하였다. 일찍이 사림(士林)의 의논을 장악하여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전인홍에게 무고를 당하자 항변하는 상소를 올려 변명하니 사림의 의논이 가상(嘉賞)하였다. 광해의 난정으로 남원으로 낙향하였다. 인조반정이후에 오수 찰방(察訪)에 추천되었으며 인조 4년 전주 객관에서 졸하니 수 53세였다. 인조 23년 사헌부 집의로 추증되고 현종 2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가증되었다. 묘소는 제천시 청풍 수하면 명오리 후록 수월암에 있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비문을 짓고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글을 썼으며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전자체를 썼다. 시남 유계(兪棨)가 묘지를 짓고 증손 우의정 상하(尙夏)가 추지를 지었다. 후사는 성원(聖源), 도원(道源)과 2녀가 있다.
25世 부사공(府使公) 성원(聖源)
선조 35년 출생하여 인조 8년 진사로 태학에 들어가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선생을 추종하여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문묘에 합사)할 것을 주장하여 사림의 추복(推服)을 받았다. 또 사악한 것을 배척하는 지정척사(持正斥邪)의 마음가짐으로 사림의 추종을 받으며 명현들과 교유하니 유계(兪棨), 송시열(宋時烈) 등과 교유하였다. 효종 10년 영천군수로 재직하여 태사공 묘역의 치묘입석(治墓立石)을 추진하고 태사공(太師公)의 행장을 찬하였다. 선산부사를 지냈으며 인조 19년 신사 4월 태시(泰時),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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