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순례 25] 僖靖公 相一과 近巖書院 (종보 제381호 20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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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370회 작성일 12-04-30 13:57본문
[유적지 순례 25] 僖靖公 相一과 近巖書院 |
僖靖公 諱 權相一 과 近巖書院 희정공(僖靖公) 휘 상일(相一)은 부정공(副正公)의 12대손 인재공(忍齋公) 대기(大器)의 6대손이며 송소공(松巢公) 우(宇)의 5대손이고 증 이조판서 심(深)의 아들이다. 인재공은 안동시 구로동 용계서원(龍溪書院)에 배향되고 왕자사부(王子師傅)인 송소공은 안동시 경광동 경광서원(鏡光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선생의 호는 청대(淸臺)이며 숙종5년(서기1679년)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영오(領悟)하였는데 판서공이 “범상한 아이들의 한해 수업의 5배를 더 한다”고 하였다. |
근암서원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148-1)문화재 377호 |
선생은 22세에 성현들 말 가운데 가장 절실한 것을 모아 책을 펴니 학지록(學知錄)이라 하였다. 숙종36년 33세로 증광시(增廣試) 문과병과(文科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그 후 예조정랑을 지내고 잠시 귀향하여 숙수지환(菽水之歡)으로 살림이 가난해도 어버이에 효를 다하였다. 영조3년 39세에 만경현령(萬頃縣令)에 배수되어 임소로 나갔는데 변산에 역적이 일어나니 선생은 말을 급히 달려 관찰사를 뵙고 수어할 계책으로 성을 지키고자 의논하였다. 역적 필현은 전주감영을 유린하고 호남일대 반란을 획책하려 하였는데 선생이 미리 기선을 제압함으로서 변란을 막을 수 있었으니 백성들이 모두 선생의 덕이 부모와 같다고 칭송하였다. 선생은 부임한 이래 지성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시민여상(視民如傷) 넉자를 걸어 놓고 밤이 깊도록 독서하니 감사 이광덕이 “독서하며 백성을 다스리니 장보(章甫,문장가) 들이 경탄치 않는 이가 없다”고 하였다. 53세에 영암군수로 제수되니 만경고을 백성들이 공을 잊지 못하여 동비(銅碑)를 세우고 치적이 높은 소리가 조정에까지 계문되었다. 56세에 사헌부 장령(掌令)에 제수되었는데 사직소와 함께 백성의 질고(疾苦)와 탐재(貪財)를 진술하니 임금은 묘당(廟堂)에 명하여 처리케 하고 선생을 울산부사(蔚山府使)로 배하였다. |
희정공 묘소(경북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근암서원 아래 우측) |
울산은 무향(武鄕)이라 문사(文士)가 드물어 월봉(月俸)을 털어 구강서원(鷗江書院)을 증축하고 유생들과 더불어 강론하니 문학에 능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한편 선생은 백성을 어루만지며 부역을 감해주니 칭송이 자자하였다. 희정공 신도비(경북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삼거리 길옆) 영조16년에 이르기까지 장령으로 제수된 것이 다섯 차례, 필선(弼善), 종부시정(宗簿시正)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치 아니 하였다. 69세에 사간(司諫), 집의(執儀)로 제수되었고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제수되었는데 사직상소를 올리니 형조참의에 제수되고 71세에 대사간(大司諫),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제수되었는데 임금이 친서로 「사간원 대사간 권상일(司諫院 大司諫 權相一)」이라 쓰고 낙점을 찍었다. 이때 세자(世子)가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는데 “사양치 말고 속히 올라와 직임을 살피라”고 하였다. 73세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에 특제(特除)되었다. 영조34년 80세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제수되고 기로사(耆老社)에 입사하였으며 이듬해 81세로 고종(考終)하였다. 부고를 듣자 임금이 전교하여 “지사(知事) 권모는 정명(靖明)한 식견에 순실(純實)한 학문으로 오늘날 정주(程子와 朱子)가 되었으니 백세토록 부조(不祧)케 함이 가하다.”하여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내리고 시호를 청하기도 전에 임금이 친히 희정(僖靖)이라 증시(贈諡)하였다. |
근암서원 문루 |
선생의 학문은 이퇴계(李滉)을 좇았으며 성리학(性理學)과 경학(經學)의 대가로 후진을 양성하며 초학지남(初學指南), 관서록(觀書錄),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가범(家範) 등 저서를 남기고 77세에 찬수당상(纂修堂上)으로 국사를 편수하는 명을 받았는데 왕은 녹권(錄券)을 내렸다. 근암서원 경현사 문경시 산북면에 근암서원이 있고 어서를 모신 어서각(御書閣)이 있다. 사림(士林)의 발의로 정조7년 죽림정사(竹林精舍)에 선생의 위판(位版)을 모셨다가 3년 후 근암서원(近嵒書院)으로 모셨다. 도학과 문으로 당대 유종(儒宗)으로 추앙되었으며 상형축문(常亨祝文)에 “성경(誠敬)으로 학문을 돈독하게 하고 박문약례(博文約禮)의 퇴계학문(退溪學問)을 얻으니 학문의 연원정맥(淵源正脈)은 백세토록 공경하는 법이다.”고 하였다. 행장(行狀)은 이상정(李象靖)이 짓고 시장(諡狀)은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지었으며 신도비문(神道碑文)은 정범조(丁範祖)가 지었다. 묘소는 산양면 과상동에 있으며 세 아들을 두었으니 통덕랑 욱(煜), 흡(潝), 습(熠)이다. 근암서원은 선조37년에 영빈서당을 설립하여 5년 후 근암서원으로 승격하고 홍언충(洪彦忠)선생을 배향하였는데 예조정랑을 지낸 홍선생은 당시 시가사걸(詩家四傑) 중 한 사람이다. 그 후 정난공신 문익공(文翼公) 이덕형(李德馨)선생, 편수관을 지낸 임난유공 김홍민(金弘敏)선생, 사간(司諫)을 지내고 학문이 넓고 문장이 달통한 홍여사(洪汝泀)선생, 퇴계학문을 사숙하고 이기(理氣)에 밝은 이구(李榘)선생, 문학의 종사(宗師)이며 실학(實學)을 시창(始唱)한 이만부(李萬敷)선생이 배향되었으며, 후에 청대(淸臺)선생을 배향하였다. 내삼문 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148-1번지에 1982년 사당․강당을 준공하고 근암서원은 후손과 유림들이 30여년 간 향사를 지내 오면서 18세기 영남학파를 대표한 유학자인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과 관련한(指定當時:9世孫 權七湧氏 所藏) 유물이 일부 남아 2006년 도유형문화재 377호“(843점)로 지정받았으며 총 사업비 30억원으로 사당, 전사청, 내삼문, 강당, 동서재 지원루 관리사 등 10동을 건설 2011년 5월 23일 준공식을 가졌다. <사진 기사 : 현봉 권경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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