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순례 15] 魯峰書院 節義 竹林公 諱 山海 (종보 제364호 200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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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597회 작성일 12-04-30 13:53본문
[유적지 순례 15] 魯峰書院 節義 竹林公 諱 山海 |
節義 竹林公 諱 山海 죽림공 휘 山海(산해, 19世 佐尹公派)는 永嘉君(영가군) 奕(혁)의 5세손이며 문정공 증좌의정 希正(희정)의 증손이며 대사성에 제수 되었으나 받지 않고 염송산에 은거한 송고공 軺(초)의 손자로서 태종3년 예천군 용궁읍 대죽리에서 출생하였다. |
선생은 일찍이 종조부 좌의정 文景公(문경공) 軫(진)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403년 景惠公(경혜공) 權專(16世부정공파)의 장녀를 室人(실인)으로 맞이 하였는데 1431년 權專의 제3녀가 세자빈으로 책봉되니 이분이 顯德王后이다 이로부터 선생은 과거응시를 폐하고 녹사와 주부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안했다. 그러다가 단종2년 종무시 僉正(첨정)으로 제수하니 나아갔다. 을해년 단종이 양위되고 삼학사관의 수장으로 이배되었으나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불출 하였다. |
죽림공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숭의사 |
1456년 단종을 복위하려던 성삼문등의 거사가 누설되어 화란이 일자 선생은 의관을 정제하고 누각에 올라 선왕께 4배한후 투신자살하니 54세였다. 조정에서는 선생을 나포하려 사자를 보냈으나 이미 숨진뒤이며 부인이 서적을 불살라 증거가 없으므로 죄과가 관작 삭탈로 끝나고 가족은 변경으로 이사하여 금고를 당하였다. 명종 11년 (1556년)에 선생의 죄가 사해지고 2년후 손과 증손이 사마시에 급제하고 감히 생의 사적을 추기하게 되었다. |
선생의 신도비각 |
1791년 정려가 내려 입각한 정충각 |
선생은 생전에 선악의 시비를 가림에 있어 흔들림이 없고 고금의 명인 절개를 논하기 즐겨하며 남과 터놓고 지내는일이 드물었는데 오직 충장공 自愼(자신)과 성삼문, 박팽년등과 交好(교호)하였다. 선생은 정조 9년 雲谷書院(운곡서원)에 태사공옆에 배향되었고 정조 13년(1789년) 후손 宗洛(종락)이 소를 올려 신해년 영월, 장릉에 배향해 주도록 하였다. 정조 15년 1791년 조정의 신하와 영남의 선비들 2천여명이 소를 올려 사육신과 같이 숭보해 줄것을 청하니 상은 윤허하고 정표를 내리니 旌忠閣(정충각)이라 하였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고종21년(1884년)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忠愍(충민)의 시호가 내렸다. 魯峰書院(노봉서원)은 정조19년(1794년) 향교 사림, 후손의 발의로 세워 竹林共(죽림공)을 봉안하였으나 철종5년에 소실되고 고종5년 훼철되었다. |
죽림공의 묘소와 신풍리 입구 표석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 염송산 아래) |
고종 38년 부조지전이 내려 별묘를 세우고 1921년 사림의 발의로 예천 호명 내신리340번지에 魯峰書院(노봉서원)을 세워 제향하게 되었으며 2001년 선생의 12대손 갈산공 휘 宗洛(종낙)을 배향하게 되었다. 선생의 사기는 莊陵誌列傳(장릉지열전)과 행장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행장은 박기녕이 짓고 비문은 이광정이 지었으며 신도비문은 이한응이 지었다. 판윤 이헌경이 죽림열사전을 짓고 정충각 상량문은 판서 목만중이 짓고 기문은 양관 대제학 홍양호가 지었다. 노봉서원과 정충각은 경북 예천군 호명면 내실리에 있고 마을 입구에 노봉서원 표석과 내력이 써있다. 묘소는 지보면 신풍리 염송산하 유좌이며 산소위로 17세 송고공 휘 軺(초)의 묘소가 그아래로 18세 선생의 선친 寬(관)의 묘소가 그 아래로 선생의 배위 증정부인 영가권씨 묘가 있다. <감수 : 예천 권영하 현봉 권경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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