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공(杏亭公) 식(軾)과 운암공(雲庵公) 자락당(自樂堂) 종보470호(1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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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121회 작성일 14-07-28 15:49본문
공은 부정공 9世孫이며 현조 면(勉)은 봉순대부 좌우위 상장군(上將軍)이며 선고 상의(尙宜)는 세종조 문과급제하고 청산현감을 지냈다.
1. 기천정사 : 점곡면 동변리
세종 5년 출생하여 독학으로 성리서(性理書)를 비롯하여 심경(心經), 근사록을 통독하여 인근 향리에서 현달(顯達)이 유망함을 인정하였다. 문종 원년 도칠부 부승동정(副承同正)에 제수되었고 단종 원년 증광시에 급제하여 창원교수에 제수되었는데 백록동규(白鹿洞規)를 본받아 교법과 학칙을 엄히 세우니 후일 영남 사류들이 공의 교법을 흠모하였다. 그런데 단종이 선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귀가하였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찾아가 배알하고 승하한 후로는 북향장호(北向長號)하고 주육(酒肉)을 멀리하고 세상물누와 인연을 끊었다. 안동 인군(隣郡)인 점곡촌은 은둔하고 반시(盤施)하기 좋은 곳이라 거처를 정하고 당하에 은행 3주를 심어 거처를 행정(杏亭)이라 자호하였다. 날마다 수재들과 더불어 행수(杏樹)아래서 소요음아(逍遙吟哦)하면서도 조정에서 누차 불렀으나 사절하였다. 계씨(季氏) 생원공이 흥주(興州)에 부임했는데 공이 서신을 보내 말 하기를 출처행장(出處行藏)이 때에 따라 다른 것임을 그대는 아는가 했더니 생원공이 즉각 돌아왔으며 그후 우애가 더욱 두터웠다. 자손을 교훈함에는 충효와 근검으로 일관했고 성경(誠敬) 두글자를 협실에 게서하고 종신토록 욕구도 갖지 않으니 사람들이 추앙했으며 지나는 명사(名士)들이 모두 문안했다. 동림 유치호(柳致皓)집에 이르되 도연명(陶淵明)과 같은 정절(靖節)이요 백이와 같은 청백(淸白)이라 하였다. 공은 성종 16년 고종하니 향년 63세였다. 묘소는 점곡면 대지동에 있고 묘갈명은 가선대부 병조참판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이 지었다.
2. 기천정사 내당
아들이 3형제이니 장남은 진사인 흠조(欽祖)이고 차남은 경조(敬祖)로 사맹(司猛)이며 삼남은 숭조(崇祖)로 별제(別提)이다. 별제(別提)만이 사촌에 거류하여 후손이 번성하니 점곡과 인근 옥산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4백여 년이 지나 철종 11년 사림의 공의로 기천리사(沂川里社)가 창건되어 공을 제향했으나 병신년 일병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1934년 종중 공의로 다시 중건하였으니 기천정사(沂川精舍)이다. 기천리사 기문과 상량문은 전 이조판서 긍암 이돈우(李敦禹)가 찬하고 기천정사 상량문은 15세손 종대(鍾岱)가 찬하였다. 1968년 점곡 입구 동변리에 유허비가 건립되고 비명은 참봉 이만좌(李晩佐)가 찬하였다.
3. 유허비각 : 점곡면 동변리
기천리사(沂川里社) 기문(記文)에 “나는 영월로 가 장릉을 참배하고 자규루에 올라 시를 읊프니 ‘학의 그늘은 천년토록 옛성에서 슬피울고 두견새 소리는 삼월달 공산에 눈물 짓네 빈 마루 저무는 날에 쓸쓸히 앉아 있으니 백마는 남으로 가고 어느 해에 돌아올고’ 장릉에는 정단에 32인이 배식되고 별단에 236인이 배식되었으니 모두가 죽어야 할 자리에 죽은 사람이며 생육신에서 매월당(梅月堂)과 추강(秋江)이 있으니 나는 이제야 알겠노라 군신사이는 대의(大義)와 관련되니 의(義)가 있는 곳에 목숨을 바침은 무슨 의이며 정절을 지킴은 또 어떤 의인가 성인의 의리에 정심(精深)하고 권도(權道)에 명달(明達)함은 예나 다를 바 없다.
단행(壇杏)이 향기를 발하는 곳과 월루(越樓)를 배알하고 돌아와 앉은 자리에 사우를 세우니 은미한 지행(志行)과 사적이 내일에 빗날 것이다.” 하였다.
5. 행정공 묘소 : 점곡면 대지동
숭조(崇祖)는 세종 27년에 출생하여 중종 11년에 졸하니 묘소는 옥산면 정자리에 있다. 숭조는 수형(守衡), 우형(友衡), 사형(士衡)을 두었고 수형(守衡)의 증손 호인(好仁)은 효행으로 현감이 되었다. 사형(士衡)은 직장이고 묘소는 점곡면 운암3리 지동에 있다. 사형의 아들 무성(武成)은 중종 13년에 출생하여 수직으로 호군(護軍)이 되고 광해군 9년에 졸하니 수 100세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지상선(地上仙)이라 하였다. 묘소는 점곡면 운암리 지동 선고 위에 있다.
운암공(雲庵公) 희순(希舜)
6. 23세 운암공 희순 묘소 : 점곡면 운암3리 지동
행정공(杏亭公)의 현손 희순(希舜)은 세거지인 사촌(沙村)에서 태어나 목소리가 우렁차 가인이 놀랐다. 장성하여 효우가 돈독하고 재기(才氣)가 영발(英拔)하니 학문에 뜻을 두어 경학(經學)은 물론 천문, 지리, 병학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약관에 세 번이나 향시에 입격하였으며 성격이 용약(勇略)하여 주변에서 무(武)의 길로 가기를 권하니 선고의 뜻을 받아 문(文)과 무(武)를 아울러 닦게 되었다.
공의 호는 운암(雲庵)이고 선조 16년 무과에 급제하여 창방(唱榜)하던 날 왕이 칭찬하기를 이 사람이야 말로 진정 문무(文武)를 겸비한 재조가 아닌가 하면서 선전관(宣傳官)에 배하고 그 후 훈련원정(訓練院正) 내금의, 별시위 등 직첩이 이어졌다. 선조 25년 임난(壬亂)이 일어나자 열읍 수령들이 기성도주(棄城逃走)하자 의성 수성장(守城將)에 임하니 부임 순일(旬日)만에 군비와 진용(陣容)이 정비되었고 적이 입경(入境)하자 분전하여 23인을 참했다. 12월에 안동판관에 제수되고 익년 장기현감에 이배되니 연해(沿海)요진으로 적의 소굴이었고 난중에 흉년까지 들어 백성들이 기아에 신음하므로 공은 녹봉을 털어 규휼하니 읍민이 모두 은덕에 감복하였다.
선조 28년 적선 수십척이 연일만(延日灣)에 야습해 옴으로 공은 정예병 300을 인솔하고 무찌르니 크게 전공을 세웠다. 공은 분전 중 유탄에 맞았으나 참아가며 독전함이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병창이 심해져 사직하고 귀가하니 읍민이 길을 막고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은덕을 영원히 기념케 되니 비문에 이르되 “장한 기운은 큰 바다의 흉한 도적을 물리쳤고 검박한 은덕은 한 고을의 백성을 살렸네 가지마소서 주린 백성은 어찌 뒷날 사모하지 않으리오”라 했다.
조정에서 도총부 도사(都事) 경력(經歷)을 제수했으나 병환으로 부임치 못했다. 향년 51세에 고종하니 묘소는 운암 3리 지동 조부묘 위에 있다. 1남을 두었으니 자락당 수경(守經)이다.
24世 자락당(自樂堂) 수경(守經)
7. 운암공,자락당 묘비
운암공 희순(希舜)의 아들로 사촌리에서 출생하니 천자(天姿)가 맑고 기우(氣宇)가 준정하였다. 임난이 일어나 선고 운암공이 군진에 나가자 9세의 유년으로 오언시 1절을 지어 “어찌하면 능히 만인을 대적함을 배워 쓰러버리고 태평세월을 이루어 볼고”라 하니 여헌(旅軒)이 칭찬하기를 나라의 큰 그릇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한강 정술(鄭述) 문하에서 수학하고 문학사장(文學詞章)이 배류(輩流)에서 뛰어났고 19세에 향시에 입격하였다. 37세에 제릉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불취하고 오직 사자육경(四子六經)으로 본분을 삼았다. 거처에 일당을 지어 자락당(自樂堂)이라 하였고 스스로 호로 삼았고 시로서 그 뜻을 보이니 명사(名士)들이 모였다. 점곡면 송내동에 천운대(天雲臺)를 짓고 향내의 저명한 선비들을 초청하여 여러 자제에게 훈회하기를 사람의 마음이 물루에 잦지 않으면 허명담탕(虛明淡蕩)하여 본원(本源)이 발로(發露)되는 법이라 했다. 기여집(起余集) 5권과 담총집(談叢集) 4권을 저술하였으니 전자는 성현의 요결(要訣)을 모았고 후자는 인간행실의 성찰(省察)과 훈어, 그리고 제현과 왕복한 변증지문(辨訂之文)이다. 인조 5년 정묘호란에 창의하고 일사보국을 다짐하니 향인이 추천하여 대장이 되었다. 공은 경상좌도의병도유사로 활약하였고 병량(兵糧)을 수습함이 무릇 2천여석에 달하였고 왜적이 물러간 후에 정경세선생이 공의 충공을 조정에 계달하였다. 9년 후 병자(丙子)의 난에도 공은 창의하여 문경 조령까지 진군했다가 조정에서 강화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파진(破陣) 귀가하였다.
8. 24세 자락당 수경 묘소 : 점곡면 사촌 1리
공은 자락당에서 소요하면서 성정(性情)을 도야하고 수령이 강학을 크게 일으켜 경내가 풍동(風動)할 때 공은 도훈장(都訓長)이 되어 교도(敎道)가 다방(多方)하여 타읍 인사들도 많이 와 배웠다. 수령 엄공이 찬탄하여 “경설(經說)의 오묘함과 작인(作人)의 출중함은 조정에 있어도 사유(師儒)의 직을 감당할 것이라 했다. 촌중(村中) 수삼동지와 영귀서당(詠歸書堂)을 짓고 백록동규와 염전(鹽田)향약(鄕約)을 써서 후학을 기르는 방도로 삼았다.
효종 10년 76세로 고종하니 원근인사가 비통해 하였고 송시열의 주청으로 가선대부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로 추증되었다. 숙종 16년 자헌대부(自獻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에 가증되었으며 순조조에 영남 유생들이 시호(諡號)를 상소하였다. 묘소는 점곡면 사촌1리 좌측산 중턱에 있다. 하동(霞洞) 이가순(李家淳)이 행장을 짓고 긍암(肯庵) 이돈우(李敦禹)가 묘갈명을 찬하고 예조판서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조성교(趙性敎)가 시장을 지었다. 문집 5권이 있으며 서문은 진사 정철우(鄭喆愚)가 짓고 발문은 방후손 권상익(權相翊)이 썼다.
9. 사형(士衡)의 묘소 : 점곡면 운암3리 지동
10. 무성(武成)의 묘소 : 점곡면 운암3리 지동
행정공(杏亭公) 식(軾)의 후손 권두삼(權斗三)은 무신년(1908년) 창의(倡義)하였고 권휘연(權徽淵)은 병신년(1896년) 창의(倡義)하여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으며 권대직(權大稷)은 병신년 창의(倡義)하여 1995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감수 : 권승호 기사편집 :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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