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감공(縣監公) 촌(忖), 방담공(方潭公) 강(杠) 종보제 469호(20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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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515회 작성일 14-06-25 14:07본문
16世 현감공(縣監公) 촌(忖)
찬성공 백종의 차자로서 진보현감을 지냈다. 안동 향사당기에 의하면 향중장노와 협의하여 각자 출자하여 이 당(堂)을 창건하고 향약(鄕約)을 설립하였다고 하였다. 영가지 향사당기문에 사적이 있다. 아들은 자홍(自弘)과 돈령부 봉사를 지낸 자검(自儉)을 두었다.
1. 현감공 촌 단소 :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 산93번지
제학공(提學公) 자홍(自弘)
세종 9년 친시 문과급제하여 세종 13년 예문관 봉교를 거쳐 세종 15년 강원도 도사(都事), 세종 19년 사헌부 지평(持平), 세종 23년 전라 경상도 채금별감(採金別監), 지함양군사, 세종 24년 지영천군사(知永川郡事)를 지내고 세종 29년 사헌부 집의 문종 2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집현전 부제학에 이르렀다.
2. 자홍 묘 :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 산93번지
단종 1년 우부승지인 공이 임금에 아뢰다 급졸했다고 하고 일설에 의하면 세조 3년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두 아들과 함께 극형을 받았다고도 한다. 묘소는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 청사동에 있으며 10여대가 지나 묘비를 세우고 권상규가 비문을 지었다. 숙종조에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고 장릉(莊陵)의 충신각(忠臣閣)에 배식되었다.
3. 자홍 재실 :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 산93번지
후사는 장자 저(箸), 차자 서(署) 3자 오본공(五峰共) 책(策)과 1녀가 있다.
장자 저(箸)는 세조 2년 사육신과 함께 연좌되어 형사(刑死)되었다. 세조 2년 실록에 ‘사육신 등이 권자신, 권저와 연결하여 몰래 궁금(宮琴)에 연통하고 안팎에서 호응하여 어린 임금을 옹립하는 계략을 꾸며 지업이 하늘을 덮었다’고 하였다. 또 ‘어미와 딸 형제 아들은 변방 노비로 영속시키고, 숙부형제의 자식은 지방에 안치하며 15세 미만인자는 외방에 내보냈다가 나이가 들면 관노로 영속시켰다’고 하였다.
공은 정조 15년 장릉배식단의 별단에 올랐다.
차자 서(署)도 사육신과 함께 연좌되어 형사(刑死)되었다가 정조 15년 장릉배식단의 별단에 올랐다.
3자 오본공(五峰共) 책(策)은 당숙 자신(自慎)과 두 형이 능지처사(陵遲處死)된 후 나이가 어려 영해(寧海)로 유배되었다.
방담공(方潭公) 강(杠)
공의 휘는 강(杠)이며, 호는 방담(方潭)이다. 7대조가 찬성공 휘 백종(伯宗)이며 6대조가 촌(忖), 5대조가 돈령부봉사(敦寧府奉事)를 지낸 자검(自儉)이고 선고는 훈도를 지낸 우신(遇臣)이다.
4. 방담공 강 정효각 : 안동시 풍산읍 만운리 326번지
명종 22年에 출생하여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고, 선조 22년 22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생원이 되었지만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굳은 신념으로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평생을 효행과 친척 및 이웃에 대한 덕행을 실천하였으며, 마을에 풍속을 교화하는 향약을 제정 실천하였다. 선생의 높은 학문과 덕행이 알려지자 제자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하여 많은 제자를 길렀다. 덕망(德望)과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교지를 받았으나 부임하시지 않았다. 졸후 현종 7년에 왕명으로 충효유일지사(忠孝遺逸之士)를 찾아 표창할 때 선정되어 통선랑사헌부지평(通善郞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가 내려 안동시 풍산읍 만운리 방담마을에 세웠다.
5. 방담공 정려 : 안동시 풍산읍 상리리
선생은 평생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으나 문집에 남긴 서간을 보면 청음 금상헌(淸陰 金尙憲), 학호 금봉조(鶴湖 金奉祖), 석곡 조박(石谷 趙璞) 등 중앙과 지방의 문인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선생을 배향한 운계이사(雲溪里社)가 있었으나 고종 때 훼철되었다. 대산 이상정(李象靖)이 상향축문을 지었으며 고산 이유장(李惟狀)이 행장을 지었다.
선생의 문집은 사후 200여년 흐른 뒤 많은 자료가 산일되고, 각 가문에 소장되었던 자료를 모아 간행하였다.
6..칠정각 : 안동시 풍산읍 상리리
방담 선생의 학문
위기지학(爲己之學)
옛 선비의 학문은 위기지학이다. 방담선생도 평생동안 자신의 수양을 위한 학문을 하였다. ‘선생은 젊은 시절 총명하고 독실한 뜻을 가지고 어려서 책상자를 짊어지고 서애 유성용(西厓 柳成龍) 문하에서 수업을 하였고, 일찍부터 유일재 김언기(惟一齋 金彦璣)에게도 자신을 위한 학문을 배웠다. 선생은 배운 내용을 반드시 실천하려고 노력하였고 실제로 모친을 봉양하고 효도하며 형제들과의 우애를 실천하였다.‘선생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지극한 효성으로 모친을 모시고 살았으며 남은 힘으로 독서하여 경사를 통달하였다. 연구하고 궁리하여 뜻이 통달하였고, 문장을 잘 짓게 되어 뜻을 세우니 도가 이루어져 널리 밖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학문이 사변으로 가는 첫째이고 또한 정성을 드린다는 것의 시작이다.
7. 방담공 강 묘소 : 안동시 풍산읍 안교리 산 1번지
선생이 덕망과 학행으로 효력부위세자익위사우세마(效力副尉世子翊衛司右洗馬)로 천거되어 교지를 받았을 때 부사 송상인(宋象仁)이 친히 집으로 방문하여 ‘공께서는 현인이라고 서울에서 알고 있는데 대관의 벼슬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이제 왕명으로 먼 곳의 선비에게 벼슬이 제수되었습니다. 사양하지 마십시오.’ 했지만 소동파의 시를 인용하여 완곡하게 사양하였다.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학문
선생은 물과 바위 사이를 오가며 생각에 잠기고 늘 호연지기를 기르는 학문에 힘썼다. 학문은 어마어마하여 실로 깊이를 알 수 없다. 유학의 경전은 물론 제자백가와 역사서에 이르기까지 읽지 않은 책이 없다. 고금의 인물을 들어 옛 역사를 회고하며 지은 감고병서(感古幷序)(방담선생문집1권)에는 ‘아아 천지는 지나가는 과객을 맞이하는 여관과 같고 광음은 하루살이 벌레 같은 짧은 생사를 재촉하네’라고 하면서 ‘선악을 전하는 방책은 길이 흔적과 체취를 남겨 흘러가지 못하게 한다’라고 했다. 만운과 방담의 산야를 거닐면서 부(賦)와 사(辭)와 (詩) 20여편을 짓고 경향각지의 선비들과 문장을 주고받으면서 강론하며 제자를 길렀다.
8. 방담공 강 묘소
맹자를 읽으면서 의문점을 수집하여 직접 주석을 달기도 하였다. 맹자취정록(孟子就正錄) 서문에 보면 ‘젊었을 때 우연히 의심나는 곳을 발견하면 자주 기록을 해서 이름을 취정록이라 하였다.’(방담선생문집2권)
선생은 방담의 물과 돌을 사랑하여 작은 초가집을 지어놓고 날마다 고요한 곳 그 가운데 서 동지들과 더불어 즐기면서 경서의 요지를 강론하고 역도를 그렸으며 맹자에서 취정록을 짓고 제례제편을 지었다.(방담선생문집4권 강당기)
선생이 작성한 취정록은 맹자 7권의 본문과 집주와 소주를 정독하면서 선생의 관점과 다르거나 의문점을 모아 81개 항목을 선정하여 작성한 내용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은 학문에 있어서 주희(朱熹)나 정이 정호 장재(程頤 程顥 張載)를 비판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선생은 이와 같이 주희(朱熹)가 모은 집주(集註)(程子의 해설)을 비판하였다. 그 밖에 문집에는 81개 항목으로 이와 같은 내용들이 자세히 실려 있다.
주역(周易)을 해설한 하도
주역(周易)을 공부하면서 경도(經度)와 위도(緯度)의 묘(妙)와 日月과 천체운행(天體運行)에 대한 학설은 깊고 커서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방담선생문집1권 서문) 문집 3권의 내용 중 주천(周天)을 설명한 내용을 보면‘주천(周天)은 365도 4분의 1이다. 천행(天行)의 1일은 1주천(周天)이 된다. 또 1도를 지나가는 것은 주천도수(周天度數)를 지나가는 것으로 365日 4분의 1日이 다 지나가면 周天의 數도 다 지나가는 것이다.
주역을 괘를 설명한 내용으로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 천체운행과 관련지어 자세한 설명을 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제례제편을 설명하기 위하여 주역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하였고, 윤달에 대한 법을 설명하였다.
방담 선생의 교유(交遊)
선생은 산림에 계셨지만 문을 닫고 세상과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도학과 절개가 높기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김윤안(金允安) 남복규(南復圭) 김윤사(金允思), 금득의(金得礒) 등 여러 인물과 교유하면서 시를 주고받았다.
청음 선생은 공께서 산림에 은거하는 현사임을 알고 자주 찾아와 담소를 나누었고 조정에 현사(賢士)로 추천하기도 했지만 공은 응하지 않았다. 청음 선생과는 여러 편의 시를 주고받았으며 한번은 청음 선생이 초가를 방문하였는데, 낚시를 드리우고 누가 오는지도 모른 체 생각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문집4권 이유장(李惟樟)이 쓴 행장에는‘재상인 김상헌공(金尙憲公)이 찾아오니, 선생은 강가 방천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누가 오는지도 모르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김상헌이 시를 지어 주면서 말했다.
문하를 거쳐간 제자
선생은 만운과 방담에 은거하시면서 많은 제자를 길렀지만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 전체의 규모는 알 수 없다. 문집에도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지 않고 문하생들에 대한 별도의 기록도 없다. 다만 문집에 실린 내용 중 제자들과 주고받은 말씀, 제자들이 쓴 제문, 제자들이 쓴 만사를 보고 짐작할 수 있다.
충성(忠誠)과 효도(孝道), 덕행(德行)
충(忠) 선생은 백성으로서의 본문을 지키며 누군가 임금에게 충성하는 길은 벼슬길에 나간 사람만 할 수 있고, 선비나 서민은 할 수 없다고 했다.
‘관직에 나가지 않아도 집집마다 부과 되는 세금을 기한 내에 납부하여 성심으로 나라가 필요한 데 쓸 수 있도록 도우는 것이 또한 충성이다
세금을 반드시 정직하게 납부함은 물론 기한 전에 납부하는 것이 바로 국가에 충성하는 일이라고 생각 하였다. 특히 조세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 하였다. 임금이 세상을 뜨면 반드시 삼년상을 치렀다. ‘선조 임금이 승하하자 삼년상을 마치도록 거친 음식을 먹고 집 밖에서 거주하였다.(蔡濟恭이 쓴 墓誌銘)
10. 방담공 묘 이안기
효(孝) 부친인 훈도공이 일찍 돌아가시자 공께서는 어머니를 효도로 섬겼다. 살아계실 때는 몸소 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돌아가심에 예를 다한 다음 죽을 먹었다. 조모 송씨가 병환이 나서 수박을 먹고 싶다 했는데 아버지인 훈도공이 구 할 수 없어 못 드리니 그로부터 평생 수박을 드시지 않으셨는데, 공도 또한 아버지가 드시지 않은 수박을 평생 들지 않았다.
덕행(德行) 선생은 만운리에 살 때 마을 제사를 마치고 술잔을 돌리다가 선생께 묻는 사람이 있었다. ‘그대가 지혜롭고 인으로 처신한다고 들었습니다. 인을 행한지 얼마나 되었으며 혹자들은 인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그에 대하여 ‘선생은 천하에 어리석기가 나 같은 자는 없는데 그대는 나를 보고 인을 말하라고 하니 이른바 구리쟁반을 두드려 해 모양을 만드려는 어리석음과 같다. 잘못된 일이다. 이 마을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성질이 순하여 농사에 힘스고 곡식을 귀하게 여기고 게으르지 않으며 사치스럽지 않아 나의 어리석음으로서는 감히 그들에게 인을 말할 수 없다.’
또 모두 모여 여씨 향약을 줄여 엄한 조항을 세웠다. 그 내용은 나이 많고 덕 있는 사람 하나를 뽑아 공사원으로 삼아 동약(洞約)의 책임자가 되게 했다. 봄가을에 여러 사람이 모여 술을 마시며 약법이나 계를 했다.
선생이 가난하게 살아 선생의 장인(鄭彦心)이 집을 지어주려고 했으니 선생은 장인의 자녀가 많은데 자신이 재산을 받으면 의가 아니라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그 후 정언심(鄭彦心)이 만운리에 텃밭과 집을 마련해주니 선생은 부득이 살다가 정공이 사후 그 모든 재산을 본손(本孫)에게 돌려주고 방담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12世 後孫 權在奎,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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