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공(忍齋公) 대기(大器)와 우(宇) 굉(宏) 환(寏)[종보 제467호(2014년5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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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037회 작성일 14-04-24 16:08본문
증조는 19세 등암공 징(徵)이고 조부는 갑성(甲成)이며 선고는 엽(燁)이다. 호는 인재(忍齋)이며 중종 18년에 출생하여 품성이 강직(剛直)하고 집념이 강하였다. 가정에서는 효우(孝友)가 있고 향리에서는 일찍이 퇴계(退溪)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경학(經學)이 정심(精深) 천리(踐履)가 독실(篤實)하여 동문제현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01. 인재공 대기 서당 :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
명종 7년 식년시 생원에 급제하였다. 성균관에 유학하여 경서(經書)에 통달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도산(陶山)에 왕래하면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진력하였다. 40 이후는 과장에 나가지 않고 이계(伊溪)에서 서숙(書塾)을 짓고 후생을 훈육할 때 검신박약(劒身博約)하여 본성을 지키며 과정을 엄히 하니 원근에서 풍문을 듣고 책상자를 지고 오는 이가 수십년을 이어가니 이름 들어난 사람중 이계(伊溪)학도가 많았다. 종가 제사에 돕기를 진력하고 선대 묘소에 석물을 세우니 환심을 얻었고 환란을 규휼함에 재리(財利)에 내색이 없었다. 선조 20년 65세에 졸하니 사헌부 집의로 추증되었다.
02. 인재공 대기 묘소 : 안동시 와룡면 구로동(사곡)
훗날 용계서원(龍溪書院)에 배향되고 상향 축문은 도문대사(道聞大師)운운하였다. 묘소는 안동시 와룡면 이계리 구로동에 있다. 5남5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송소공 우(宇), 진봉공 굉(宏), 계원공 성(宀成,) 이우당 환(寏), 매원공 만(宀勉)이다.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 밭에 이계서당(伊溪書堂)이 있다.
송소공(松巢公) 우(宇)
선고는 인재공 대기(大器)이다. 명종 7년에 출생하여 영민(潁敏)함이 남달라붓을 들면 즉시 써내고 16세에 향리(鄕里)학당에서 예기(藝技)를 겨룰 때 울연(蔚然)이 유생(儒生)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8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19세에 퇴계(退溪) 문하에 들어가 매헌(梅軒) 등과 더불어 주역대전(周易大全)을 수사(手寫)하여 득문하는 대로 단서(端緖)와 적리(的理)를 토론 해독하였다. 선조 5년 향시에 본도동당(本道東堂)에서 장원(壯元)하고 선조 6년 식년시에 응했는데 시관이 대학(大學)의 그릇된 것과 보충할 것을 물으니 노사숙유(老士宿儒)들이 모두 어렵다 하는데 공이 홀로 붓을 들어 정주(程朱)의 뜻을 발명(發明)함이 상세하니 시관이 무릎을 치며 탄상하며 제1로 뽑으니 사류(士類)가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03. 송소공 우 묘소 : 안동시 서후면 대두송 한도실
이후 학문에 진력하고 어버이를 효양(孝養)하며 자제를 훈육한지 14년 경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집현전으로 옮겼다 선조 22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는데 왕이 경서(經書)의 어려운 것을 뽑아 묻게 할 때 공이 밝게 해석하여 써 올리니 임금이 가상(嘉賞)하여 당시(唐詩) 10절과 풍아(風雅) 3첩을 하사하였다. 공은 선조 23년 39세로 졸하니 원근의 사우들이 회장(會葬)하였는데 조월천(趙月川)은 글을 지어 ‘청숙한 기질을 받았고 경계의 절개를 품었다. 학문이 순정(醇正)하고 조리가 정연하다’하였다. 광해가 왕위에 오르자 예관을 보내어 사제케 하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 참찬관(參贊官)으로 추증하였다. 공은 자질이 도(道)에 가깝고 태극도(太極圖)를 구하여 정주(程朱)의 성리서를 갈파하였으며 초당을 짓고 논어 맹자를 연구하며 장횡거(張橫渠)가 오늘의 만종록(萬鍾錄)을 내일에 버리고 금일의 부귀(富貴)도 내일의 굶주림도 근심치 않으며 다만 의리가 있을 뿐이라 하고 일찍이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실천하였다.
04. 송소공 사당 :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
빈한하여 조석을 잇지 못해도 태연하고 외가에서 받은 노비를 동생에게 나누어 주고 제식물품을 정하여 준행토록 하고 자제를 훈계함에 충효(忠孝)를 먼저 가르치고 자독하여 연구토록 하였다. 사람을 사귐에 반드시 도의로써 하고 예서(禮書)에 의문이 있으면 더불어 토론하여 상세히 밝혔다. 월천(月川 趙穆)을 스승으로 섬기고 서애(西厓), 학봉(鶴峯), 송암(松巖) 제공이 모두 애경(愛敬)하였다.
옥봉 권위(權暐)가 행장을 짓고 송소집(松巢集)이 발간되었는데 여헌(旅軒)장현광이 발문에서 오당백세지사(吾黨百世之師)라 하였다. 사림의 발의로 경광서원(鏡光書院)에 배향되었는데 대산(大山) 이상정이 지은 상향축문에 학문순정(學文純正) 조리견확(操履堅確)이라 하였다. 광해는 2년 전교하여 ‘내가 잠저시의 사부중 권우 등에게 원래 맡는 직임 위에 당상(堂上)의 실직을 제수하고 각기 교서를 만들고 관원을 보내 제사케 하라’하였다.
05. 송소공 종택 :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
묘소는 안동시 서후면 대두송 한도실에 있고 학사(鶴沙) 김응조가 비문을 지었다. 후사는 5남 1녀를 두었는데 익민(益民), 익정(益丁), 익신(益臣), 익린(益隣), 익겸(益謙)이며 익린은 장현광의 문인으로 광해군 8년 증광시 생원으로 급제하였으나 태백산에 들어가 인조가 누차 출사를 권해도 응하지 않으니 왕이 이 노인의 뜻을 알겠다 하고 명나라를 추모한다는 뜻의 대명옹(大明翁)이라는 호를 내렸다. 유고로 금곡집(琴谷集)을 남겼다.
06. 송소공 대송재사 : 안동시 서후면 대두송 한도실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 샘골길 43-40에 중요민속자료 203호인 송소공 종택이 있으며 이 종택은 1824년 개기하여 ㅁ자형과 一자형 강당 및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이계재사도록(伊溪齋舍圖錄)에 몸채는 재사이고 강당은 이계서당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진봉공(震峰公) 굉(宏)
공은 임재공의 차자로 선조 8년에 출생하였다. 회곡 권춘란(權春蘭)의 문인으로 선조 36년 식년시 문과급제하였다.
07. 진봉공 굉 와룡암 : 안동시 임하면 임하 중마길
광해군의 난정으로 관계에 진출할 뜻이 없어 은거하며 학행을 닦고 있다가 인조 등극 후 5년 학행으로 추천되어 별제에 제수되었다. 인조 6년 전묘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인조 8년 세자익위사부솔(世子翊衛司副率)이 되고 인조 14년 병자호란으로 임금이 치욕을 당한 후로는 태백산으로 들어가 명조를 기리는 대명오(大明塢)를 쌓고 와룡초당(臥龍草堂)을 지어 두문불출하였다. 78세에 졸하니 유고로 진봉집(震峰集)을 남겼으며 서기1974년 와룡초당을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로 이전 복원하고 와룡암이라 하였다.
08. 진봉공 묘소 : 안동시 와룡면 구로동
묘소는 와룡면 구로동 선고묘 계하에 있다. 김시찬이 공의 행장을 지었는데 “태백산에 친우가 찾아오면 산중에 거하여 수양하는 것이 가히 즐겁다” 하였고 “김상서(金尙書)와 북행할 때 증시(贈詩)에 마음은 해바라기와 같이 태양을 향하고 굳은 정절은 율능경(律陵卿)에 들어간다.”하였다. 와룡암 이건기는 김원대가 지었으며 기문에 “와룡암은 태백산 진봉산하(震峰山下)에 있어 높은 정절을 지켰으니 선생의 박학독행(博學篤行)이 태학사의 평론에 나타났다. 후손이 중건의 뜻이 있었으나 오지인지라 고향 임하에 기지를 정하고 이건하였으니 어디간들 선생의 답행한 땅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후사는 익한(益翰), 익호(益湖), 익시(益時)와 2녀를 두었다.
이우당(二愚堂) 환(寏)
인재공의 4자로 선조 13년 출생하였다.
09. 이우당
공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총명하였는데 공부를 시작하여 눈에 스쳐 지나가면 기억하니 정사신(鄭士信)이 보고 “비범한 재지(才智)이니 후일을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다. 백씨에게서 수학하고 15,6세엔 예장(藝場)에 나가 노닐었는데 명성이 자자하였다. 약관에 정 한강(寒岡)에 종유(從遊)하고 성현(聖賢)의 사업을 기약하였다. 광해군 2년 31세에 생원이 되었는데 공의 5형제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장과 학식이 떨치니 사람들이 ‘권씨오현자(權氏五賢者)라 하였다. 인조 5년 호병(胡兵)이 한양 가까이 들이 닥치자 대가(大駕)가 강도로 나갔는데 안동부에서는 의병을 일으켜 공을 부장(副長)으로 추대해 조정의 특지를 받아 여러 고을의 의병과 함께 죽령에 진을 치고 요충지를 막았다.
10. 이우당 종택 : 안동시 임하면 임하 중마길45-1
인조 13년 55세에 천거를 받아 장릉참봉, 사옹원봉사, 직장을 지냈으며 인조 17년 60세에 문과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고 이듬해 예조좌랑, 유곡 찰방으로 갔다가 사임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인조 24년 67세에 강원도 도사(都事)에 제수되었고 효종 2년 성균관 직강(直講), 통례원 봉례(奉禮)를 하다가 별세하니 72세였다.
공의 묘소는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도방)에 있으며 임하땜이 건설된 이후로는 배를 타고 가야 성묘를 할 수 있다.
11. 이우당 사당
공은 청백리로서 조정에 거침없이 직간하고 당쟁의 와중에서 공평하고 명분이 뚜렸한 정책을 펴려고 노력하였으며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풍속을 순화(醇化)시키고 인정(仁政)을 펴 칭송을 받았다. 이수정(李守貞)이 「공의 행장을 쓰니 공은 바탕이 독후(篤厚)하고 재주가 절윤(節倫)하였으며 성품이 강직하였다. 형제간에 박문약례(博文約禮)의 공부가 있어 유도군자(有道君子)에 의뢰하여 평생토록 수기치심(修己治心)하였다. 식견이 정예(精銳)하고 조행(操行)이 방정(方正)하였으며 문장이 화려하고 넉넉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특히 시(詩)에 능하여 추앙을 받았다. 제자를 가르침에는 효제충신(孝悌忠信)에 바탕을 두고 안일한 뜻을 가진 자는 경계하고 꾸짖기를 “우리 가문이 문호(門戶)를 부지하는 까닭은 분수를 지키고 봉업을 부지런히 하기 때문이니 너희는 삼가 지켜야 할 것이다” 라 하였다. 백씨 송소공(松巢公)이 하세하자 공은 집안일을 다스리니 사람들은 그 우애의 돈독함을 찬탄하였다. 많은 이와 막역지교를 맺고 이르기를 “풍우에 상을 대하고 앉으니 청등(靑燈)에 밤은 깊어 즐거움이 다함이 없다” 라 하였으니 운치가 이와 같았다. 벼슬이 공의 덕업(德業)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사림에서 한탄하고 그 학문의 조예(造詣)와 같은 것은 후학으로서 얻은 것이 감히 알 수 없으니 바탕과 독실한 뜻으로서 부형과 사우의 사이에서 얻은 것이 심후(深厚)하기가 이와 같은 즉 연원(淵源)이 유래가 있고 문로가 단적하며 크게 떨쳤을 것이나 애석하게도 유문이 전하지 못하니 어찌 한탄하리오」
아들이 없어 진봉공(震峯公)의 아들 익시(益時)로 후사를 삼았다. 6세손 주(燽)가 유문을 수습하였으니 시문 수백편, 만사, 제문을 간지한 것을 후에 소(疏)와 편지 등을 모아 순조 16년 후손들이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이우당 종택은 안동시 임하면 임하 중마길 45-1에 경북 중요민속자료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인조 18년 아들 익시가 건립한 것이다. ㅁ자형 안채와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영조 49년 정침(正寢)을 보수하면서 지었는데 높은 기단 위에 팔작지붕을 올리고 건물 주위에 난간을 돌렸다. 사당은 원채의 남쪽에 있으며 별묘(別廟)와 가묘(家廟)가 배치되어 있다. 2009년 대문간채를 복원하고 담장을 개축하였다. 대문 앞에 방앗간채는 복원하지 못하였다.
(감수 : 권영열 기사 :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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