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공(副正公)휘 통의(通義)와 등암공(藤巖公) 징(徵) 종보제466호(2014.3.1) > 좌윤공,부정공파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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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공(副正公)휘 통의(通義)와 등암공(藤巖公) 징(徵) 종보제466호(20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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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416회 작성일 14-03-26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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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취정(就正)의 아들로 현손서 위위시주부(衛尉寺主簿) 안동 김희(金熙)의 보첩(순조 33년 출간)에서 신기도령(神騎都令) 행식록부정(行食祿副正)으로 고증되었다. 신기(神騎)반은 고려 숙종조 이후 고을의 마필(馬匹)을 가진 장정으로 편성한 군으로 도령중랑장은 수장이고 식록부정(食祿副正)은 문종조에 향직으로 녹봉(祿俸)에 관한 사무를 맡은 직이다.


1. 부정공 단소



2. 눌곡재사(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3. 부정공 기적비와 단비

파종회는 1999년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눌곡 인동령(仁同嶺)자락에 부정공 단소를 설하고 그 아래에 눌곡재사를 창건하였다. 기적비문(紀蹟碑文)은 이원영(李源榮)이 짓고 눌곡재(訥谷齋) 기문은 권오훈이 지었다.

후사는 균필(均弼) 호장과 균량(均亮) 별장이 있다. 균필(均弼)은 경보(景輔)를 두었는데 공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판이부사 상호군(判吏部事 上護軍)으로 추봉되었다. 경보(景輔)의 아들은 휴(休)이며 관직은 전의시주부(典儀寺主簿)로서 직수문전으로 추봉되었다.

균필(均弼)의 증손 정평(正平)은 판도정랑(版圖正郞)을 역임하였으며 손자 화산부원군 전(專)이 귀히 되어 가선대부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추증되었다.

정평(正平)의 아들은 덕생(德生)과 백종(伯宗)이다.

4. 부정공 세려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5. 뒤에서 본 세려

덕생(德生)의 자손이 번창하여 19세 징(徵-不祧之典), 22세 대기(大器-書院配享), 예(輗-吏曹判書), 우(宇-書院配享), 굉(宏-學行), 환(寏-學行), 익창(益昌-書院配享), 상일(相一,書院配享) 등 현인을 배출하였다.

백종(伯宗)은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으며 아들 전(專)은 화산부원군이며 전의 아들 자신(自愼)은 영월 장릉 충신각에 배향되었고 3서(婿)는 죽림공 권산해(權山海-不祧之典), 4녀는 단종의 모후인 문종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이다. 또 차자 촌의 장자 자홍(自弘-충신각에 배향), 손 책(策-書院配享, 장릉에 추봉), 22세 강(杠-孝行旌閭), 경(璟-書院配享) 등 현인을 배출하였다.

균량(均亮)은 세형(世衡)을 두었는데 관직은 병조정랑이며 세형(世衡)은 추봉 판도판서 공(功)과 호장 공무(公茂)를 두었다. 공(功)의 자 녹(祿)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상호군(上護軍)이고 녹(祿)의 아들은 면(勉)으로 그 후손들은 의성 점곡에 세거하고 있다.

늪실(訥谷)은 고려 공민왕시 파조의 6세손 자형(子衡)의 사패지(賜牌地)이며 부정공파 종택은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눌곡)에 1926년 상량하고 1928년 사당을 건립하였다. 사당은 파조 설단자리에 있었으나 종택 건립 후 이건하였다.

종택은 눌곡 입향조 24세 호양공(湖陽公) 익창(益昌)이 임진왜란 피란시 입향, 개척하여 파족 30 여호가 세거하고 있으며 당시 심은 느티니무는 경상북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등암공(藤巖公) 징(徵)

증조(曾祖) 자형(子衡)

공의 출생년도는 미상이고 공민왕 9년 사마시에 오르고 공민왕 10년 홍건적의 침구로 왕이 복주(현 안동)로 몽진할 때 호종하였으며 상주, 이듬해 청주에 호종하니 왕은 봉순대부(奉順大夫) 삼사부사(三司副使)에 배하였으며 안동부 북쪽 감마촌(현 와룡면 가야리 눌곡일대)에 전답10결, 임야 사방10리를 사패지로 받았다. 조선조 태종 1년 가선대부(嘉善大夫) 평양도좌익병마단련사(平壤道左翼兵馬團鍊使)로 나갔다.


등암공 징(徵)





07 등암공 사당 :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부정공파 세려 후록

 

공은 부정공 9세손으로 자형의 증손이고 선고는 통덕랑 종부시직장을 지낸 가후(可後)이다. 세종 8년에 출생하여 세종 29년(정묘1447년) 식년시 생원으로 합격하였으며 세종 32년, 문종즉위년 문과 정과 급제하여 세조 4년 공조좌랑,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세조 13년 함경북도병마평사가 되어 관북으로 정벌을 나갔으며 이때 이시애의 난에 종군 중 형세가 급박한 가운데 고군분투하다 패하니 옷소매를 잘라 혈서를 쓰니 “남아의 하는 일과 장부의 명이 자고로 이와 같다” 하며 자진하고 순절혈서를 보내니 향년 42세였다. 혈서가 도착한 이날(음 5월10일)을 기일로 하였다. 싸우던 곳을 권평사사절동(權評事死節洞)이라 하였다. 세조 1년 좌익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세조 5년 경서(經書)를 강하였으며 세조 9년 사헌부 지평시 지방에 호패를 규찰하러 나갔다.



08 등암공 징 묘소 :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 청석동


22세에 이기설(理氣說)을 지었고 사헌부 관원들과 총마계를 만들었다. 안동부 향사당에 쓴 시와 전시대책문(殿試對策文)이 있으며 후에 부조지전(不祧之典)이 내렸다. 의관장(衣冠葬)으로 묘소를 봉축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 청석동에 있다. 보덕 유태좌가 행장을 짓고 해좌 정범조가 비문을 지었다.

아들은 갑성(甲成)과 을성(乙成)을 두었으며 갑성의 아들 엽(燁)은 참봉으로 졸하니 군자감정으로 추증되었다. 엽(燁)의 후사는 위기(偉器) 대기(大器) 중기(重器) 그리고 1녀를 두었다.



09 20세 갑성 묘소 :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 청석동 선고 계하



10 21세 엽 묘소 : 안동시 서후면 대두서리 한도실

위기(偉器)는 중종 4년에 출생하여 호는 성재(誠齋)이고 명종 10년 식년시 급제하였다. 유고를 남겼으며 묘소는 안동시 남선면 백일동에 있다. 위기(偉器)의 아우 인재공 대기(大器)는 식년시 급제하고 용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위기는 선(宣) 밀(密) 용(容)을 두었다.

성곡공(城谷公) 선(宣) 중종 26년에 출생하여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선조 12년 식년시 병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지내고 상주, 경주, 청송 등 훈도(訓導)를 지냈다. 선조 18년 졸하니 향년 55세이고 묘소는 안동시 남선면 백일동 선고묘역에 있다. 성곡공(城谷公) 선(宣)의 아들은 익창(益昌)이고 밀(密)의 아들은 익형(益亨)이며 용(容)의 아들은 익수(益壽), 익복(益福)이다. 익형(益亨)은 선조 36년 식년시 생원으로 급제하였다.



 

호양공(湖陽公) 익창(益昌)

공은 부정공 14세손으로 등암공의 5세손이며 증 군자감정 엽(燁)의 증손이고 문과 병과한 성곡공(城谷公) 선(宣)의 아들이며 호는 호양(湖陽)이고 자는 무경(茂卿)이다. 명종 17년 출생하여 용모가 단아하고 소시부터 역학(力學)하여 태극도시(太極圖詩)를 지어 당숙 송소공 우(宇)에게 보이니 기특히 여기었다.



11 24세 호양공 익창 묘소 :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부정공파 세려 후록


눌곡(訥谷) 입향조안 공이 임진왜란중 당시 연곡촌으로 피란와서 지명을 눌곡(訥谷)으로 개칭한 후 청룡등 자락에 정자를 짓고 경학(經學)에 침잠하였는데 사서오경(四書五經), 낙건(洛建) 등 서적을 읽고 설파하니 대학자인 월천 조목(趙穆)이 공의 강설을 듣고 “권모는 ‘주역(周易)의 주해를 모두 암송하고 백가(百家)에도 두루 통하였으니 가히 두려운 사람이다’하였다. 서애 유성룡(柳成龍)을 배알하고 정인군자의 논설을 얻어 들었다.

때로는 정자앞 배회당(徘廻塘) 연못을 거닐거나 자적(自適)하면서 붕우(朋友)와 교유하였다. 일에 자상하고 정대하며 담박(淡泊)한 취미로 경전을 읽고 세상에 뜻이 없으면서도 시정의 실책이나 수령의 탐학(貪虐)을 들으면 근심하며 상소(上疏)를 올려 임금의 천청(天聽)을 깨우치려 하였다. 어버이를 섬기고 스승을 융숭히 받드니 학봉(鶴峰)선생이 그 기품과 용모를 보고 헏되이 죽을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일생 후학을 기르다 인조 23년(1645년) 84세로 졸하니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추증되었다. 호양집 4권을 남기고 이시명이 행장을 지었으며 유림의 발의로 학암서원(鶴巖書院)에 제향되었는데 상향 축문에서 “학문은 퇴계(退溪)와 서애(西厓)로 올라가고 성리로 하도와 낙서에 미쳤다”고 하였다. 학암서원은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에 1777년 창건이후 선생과 정사성(鄭士誠), 정사신(鄭士信)을 배향하였는데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

우유당(優游堂)은 선생이 1610년(庚戌) 후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초정 3간을 짓고 우유당이라 편액을 걸어 서당 겸 정자로 후학 지도하니 제자 100 여명에 달하였다. 선생은 여기서 학문연구에 전념하면서 십도십목(十圖十目)을 체계화 하였다. 후에 정자를 대청마루와 방 2개를 와가로 개축하여 춘향을 지내다가 1996년 해체하였다.

묘소는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눌곡 종택 후록에 있으며 후사는 규(圭), 새(璽), 정(土鼎 ) 과 4녀를 두었다.

27세 문두(文斗)

호양공의 증손이며 호조참의 정의 손자며 병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증직된 이달(以達)의 셋째아들로서 숙종 10년 출생하여 호를 연옹(淵翁)이라 하였다.



12 27세 문두 묘소 :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퇴곡


공은 기량이 굉원(宏遠)하고 학업에 힘써 성경현전(聖經賢傳)에 숙성(夙成)하였다.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70 여명의 유랑민을 3년간 거두었으며 부(富)와 수(壽), 자손복을 누리고 유호덕(攸好德)까지 갖추어 세인(世人)이 오복을 완전히 향유하였다고 하였다. 영조 49년 89세에 수직으로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받았다. 시에 능하여 연옹유고(淵翁遺稿)를 남겼으며 청대 권상일(相一)이 “선대 효도하고 종문(宗門)에 돈목(敦睦)하며 성현(聖賢)의 이학(理學)과 지략(智略)을 겸하였다.”고 하였으며 만곡 조술도(趙述道)는 “나태와 완매(頑昧)함에 빠지기를 경계하여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고 하였다. 정조 2년 94세에 졸하니 묘소는 와룡면 가야리 퇴곡에 있고 비문은 갈천 김희주가 지었다.

아들은 상건(相建), 상근(相近) 모두 통덕랑(通德郞)이다.

(감수 : 권영억, 권오중 기사 :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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