節義 忠愍公 竹林先生과 魯峰書院(종보 제447호 20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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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895회 작성일 12-08-29 14:07본문
죽림공 휘 산해(山海, 19世 佐尹公派)는 중문지후(中門秪候) 이조참판을 지낸 영가군(永嘉君) 휘 혁(奕)의 5세손이며 문하시랑(門下侍郞) 증 좌참찬 희경공(僖敬公) 휘 용일(用一)의 고손이며 문정공(文靖公) 증좌의정 휘 희정(希正)의 증손이며 감사(監事) 송고공(松皐公) 휘 초(軺)의 손자이고 경력공(經歷公) 휘 관(寬)의 아들로 태종 3년(1403년) 예천군 용궁읍 대죽리에서 출생하였다. 송고공은 이태조가 북백(北伯)과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 하였으나 받지 않고 염송산에 은거하여 송도를 생각하는 일념으로 산 이름 중 염(廉)자를 생각 염(念)자로 고치고 호를 송고(松皐)라 하니 충효를 전승하는 전래가 되었다.
사진1 : 17세 초의 묘소(예천군 지보면 신풍리 산47)
선생은 일찍이 종조부(從祖父) 좌의정(左議政) 문경공(文景公) 휘 진(軫)에게서 수학하였으며 경혜공(景惠公) 권전(權專,16世 부정공파)의 장녀를 실인(室人)으로 맞이하였는데 1431년 권전(權專)의 제3여 휘 순임(順任)이 세자빈으로 책봉되니 이분이 문종(文宗)의 비로 현덕왕후(顯德王后)이다. 이로부터 선생은 과거응시를 폐하고 녹사와 주부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안했다. 그러다가 문종 2년 김종서, 황보인, 박팽년, 성삼문 등과 어린 임금을 보필하라는 문종의 유명을 받고 단종 2년 종부시 첨정(宗簿侍僉正)으로 제수하니 나아갔다. 을해(乙亥)년 단종(端宗)이 양위되고 공을 찰방에 제수하니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였다.
사진2 : 18세 관의 묘소(신풍리 염송산)
1456년 단종(端宗)을 복위(復位)하려던 성삼문(成三問) 등의 거사가 누설되어 화란이 일자 선생은 의관을 정제하고 “이것이 참으로 하늘의 뜻이니 내 홀로 살아서 사직을 구하지 못할 바에야 어찌 살리오” 하고 조복을 갖추어 입고 누각에 올라 선왕께 4배한 후 투신자살하니 54세였고 공의 아우 휘 수해(壽海)와 아들이 염송산 선고 계하에 장사하였다.
사진3 : 노봉서원1(경북 문화재자료 59호)
조정에서는 선생을 나포하려 금부도사(禁府都事)를 보냈으나 이미 숨진 뒤이며 부인(婦人)이 서적(書籍)을 불살라 증거가 없으므로 죄과가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고 성명을 죄적부에 올리고 가족(家族)은 변방(邊方)으로 내치고 자손은 백년(百年) 금고(禁錮)를 당하였다.
명종 11년 (1556년)에 선생의 죄가 사해지고 2년 후 손자 휘 경(經)과 증손이 사마시(司馬試)에 급제(及第)하고 선생의 사적을 추기(追記)하니 유사(遺事)로서 후손에게 전하게 되었다.
사진4 : 노봉서원2(우측이 내삼문과 충의사)
선생은 생전에 성품이 화순(和順)하나 선악의 시비를 가림에 있어 엄격하였고 고금의 명인(名人) 절개(節槪)를 논하기 즐겨하며 남과 터놓고 지내는 일이 드물었는데 오직 충장공 권자신(自愼)과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교호(交好)하였다.
징사 곽진(郭山晋)이 공의 묘소에 광지(壙誌)를 써 이르되 “공은 천품이 강직하고 지조(志操)가 견실(堅實)하며 어릴 때부터 구차함이 없었다.” 고 하였다. 일찍이 백이전(伯夷傳)을 읽다가 거듭 탄식하기를 ‘이런 사람(伯夷叔齋)이 있은 연후에 만고강산을 부지한다’ 고 하니 종조 문경공이 기이하게 여겼다. 병자년에 화가 일어나는지라 선생은 ‘내가 선왕에 갚지 못한 은혜를 어린 임금에게 갚는다’ 하였으나 일이 크게 어긋났다.
사진5 : 숭의사(경북 예천군 호명면 내신리 340)
태학관에서 선생을 서원에 숭보하라 하니 사림(士林)이 공의하여 정조 9년 운곡서원(雲谷書院) 태사공사당(太師公祠堂)에 배향(配享)되었고 정조 13년(1789년) 후손 종락(宗洛)이 기유년(己酉年) 영월(寧越) 장릉(莊陵)에 배향해주도록 상소를 올리니 형조의 죄적부를 찾아 복작명을 받았고 정조 15년 1791년 장릉(莊陵)에 설단하여 단종조 충신들을 제향(祭享)할 때 조정의 신하와 경기, 충청, 영남의 유생들 2천여명이 소를 올려 선생도 사육신과 같이 숭보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은 묘당(廟堂)에서 의논하라 하니 형판(刑判), 예판(禮判), 이판(吏判)과 범암 채재공(蔡濟恭)이 자손(子孫)이 금고(禁錮)를 당한 것을 보니 사육신과 다를 바 없으며 많은 유생들의 청이 과한 것이 아니라 말하니 윤허하고 정려(旌閭)하여 정충각(旌忠閣)을 세우라 하니 선비들과 부녀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한다.
정조 15년(1791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고종 22년(1885년)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의금부사(贈 資憲大夫 吏曹判書兼 知義禁府事)로 가증되고 충민(忠愍)의 시호가 내렸다.
사진6 : 죽림선생 신도비와 정려각
노봉서원(魯峰書院)은 정조 19년(1794년) 향교, 사림, 후손의 발의로 세워 죽림공(竹林公)을 봉안하였으나 철종 5년에 소실되고 고종 5년 훼철되었다. 일화에 노봉서원을 세울 때 흰 까치가 울고 갔는데 이는 권산해가 죽어서도 단종을 잊지 못하고 왕위 복위를 못한 한을 풀기위하여 흰 까치가 되어 울고 갔다고 전한다.
고종(高宗) 38년 부조지전(不祧之典)이 내려 별묘(別廟)를 세우고 1921년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통문을 내리고 병산서원(屛山書院) 호계서원 등과 사림(士林)의 발의로 예천 호명 내신리 340번지에 노봉서원(魯峰書院)을 세워 제향하게 되었으며 2001년 선생의 12대손 갈산공 휘 종락(宗洛)을 배향하게 되었다. 노봉서원은 경북 문화재자료 제59호로 지정되어있다.
사진7 : 죽림선생 정려
사진8 : 죽림선생 정충각
선생의 사기는 장릉지열전(莊陵誌列傳), 명현록(名賢錄), 용궁읍지(龍宮邑誌) 등에 올라있고 행장(行狀)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행장은 박기녕(朴箕寧)이 짓고 비문(碑文)은 이광정(李光庭)이 지었으며 신도비명(神道碑銘)은 1852년 돈령부도정진성인 이한응(李漢膺)이 지었으나 세우지 못하다가 1956년 인암 권상규(權相圭)씨의 후식을 부쳐 선생 묘하 지보면 신풍리 피악골 길가에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가 호명면 내신리 노봉서원 앞으로 2004년 옮겨 세웠다.
판윤(判尹) 이헌경(李獻慶)이 죽림절사전(竹林節士傳)을 지었다.
사진9 : 죽림선생 정려기문(이조판서 홍양호 찬)
정충각(旌忠閣)은 1791년 정려가 내리니 이조판서 홍양호(洪良浩)가 주관하여 정조 18년 (1794년) 대죽리 입구에 세웠다.
정충각(旌忠閣) 상량문은 판서(判書) 목만중(睦萬重)이 짓고 기문은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이조판서겸지 경연 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제학 홍양호(洪良浩)가 짓고 문숙공 안정복(安鼎福)이 썼다. 철종 5년 염송산으로 옮겼으나 후에 서원앞으로 옮겨세웠으니 호명면 내신리에 있고 마을 입구에 노봉서원 표석과 내력이 써있다.
사진10 : 죽림선생 교지(증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의금부사)
묘소는 지보면 신풍리 산47번지 염송산아래 유좌이며 그 위로 선생의 배위 증정부인(贈貞夫人) 영가권씨(永嘉權氏) 묘가 있다. 묘역위로 17세 송고공 휘 초(軺)의 묘소가 그 아래로 18세 선생의 선친 관(寬)의 묘소가 있다.
선생은 4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철조와 철종은 요사하고 철명(哲命)은 별제(別提)이고 철손(哲孫)은 판관(判官)이다. 철손(哲孫)의 자손은 종보445호(2012.7.1)에 상세히 게재한바있다.
사진11 : 신도비각 정충각 내력
철명(哲命)의 장자 경(經)은 명종 13년 해금되어 생원시 진사가 되고 선친이 품고 있던 소문을 듣고 죽림공의 유사(遺事)를 지었다는 기록이 파보에 있다. 차자 윤(綸)은 선무랑 덕원교수(敎授)이고 삼남 순(純)은 참봉이며 사남 수(綏)는 직장이다. 경(經)의 계자 응성(應星)은 중종 25년 출생하여 명종 13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응성의 장자 경은 군자감 봉사이며 차자 만(潫)은 유성룡의 문인으로 임난시(壬辰倭亂) 곽재우의 진에 종군하여 소모장(召募將)이 되었고 인조 2년 증광시(增廣試) 생원으로 합격하였다. 명현록(名賢錄)에 들었고 문집(文集)을 남겼다. 순(純)의 자 안분당(安分堂) 응삼(應參)은 명종 13년 생원시(生員試) 합격하고 유고(遺稿)를 남겼다. 수(綏)의 아들 호암(湖巖) 응정(應定)은 명종 13년 생원시(生員試) 합격하고 임난(壬亂)에 창의(倡義)하여 순절(殉節)하였다.
사진12 : 절동재사(예천군 지보면 신풍리)
철손(哲孫)의 아들은 보공장군(保功將軍) 민(敏)이다. 민의 아들은 순경(舜卿)이고 순경은 3남을 두었는데 장자는 통훈대부 양(良)이며 차자는 영(寧)이다. 영의 아들 복시(復始)는 첨정(僉正)으로 호가 구사재(九思齋)이며 임난(壬亂) 창의(倡義)로 녹훈을 받았다. 순경의 3남 장사랑 경릉참봉 평(平)은 복흥(復興)을 두었는데 복흥(復興)은 임난(壬亂) 창의(倡義)로 순절(殉節)하니 부인 류씨와 함께 충열(忠烈)로 정려(旌閭)가 내리고 단계사(丹溪祠)에 봉향되었다.
사진13 : 죽림선생 묘비(좌:신도비 우:묘정비)
죽림공의 아우 사정공 수해(壽海)의 현손 귀봉공(龜峯公) 휘 덕린(德麟)은 선생과 함께 운곡서원에 배향되었으며 다음호에 상술(詳述)한다. 후손(後孫)들은 예천, 경주, 순흥 등지에 거주(居住)하고 있다.
자료를 보내고 발간을 보지 못하고 서거한 寧夏 故人의 冥福을 빈다.
<자료 : 죽림공 행장, 부총재 고 권영하 감수 권혁무 편술 현봉 권경석>
사진14 : 죽림선생 산해의 묘소
사진15 : 배위 영가권씨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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