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縣令公 穀, 洛濱公 震翰과 梅窩公 士諤 (종보 제450호 201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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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808회 작성일 12-11-3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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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령공 휘 곡(穀)

현령공 휘 곡(穀)은 좌의정에 추증된 문정공(文靖公) 희정(希正)의 장자로 려조에 판도 정랑(版圖正郞)을 지내고 판관을 저쳐 경산현량(慶山縣令)을 지냈다. 조선조에 와서 벼슬을 버리고 다섯째 아우 초(軺)와 함께 예천 용궁의 대죽리로 들어와 시거하였다. 묘소는 대죽리 우감산에 연분으로 부인이 앞에 있다.


사진1 호계서사전경(경주시 안강읍 산대리 361-2)


현령공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낭장(郎將) 처중(處中)이고 차자는 처용(處庸)으로 파주목사를 지냈고 세종조에 부제학으로 추증되었다. 공은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로 소문이 났다. 묘소는 예천 용궁 오송산에 있다. 3자는 처화(處和)이며 사직이다. 묘소는 오송산에 있다. 처용(處庸)의 아들은 효손(孝孫)이며 만호(萬戶)로 원종공신이고 문종조에 우부승지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용궁의 대동 위봉산에 있다. 처화(處和)는 아들 계생(係生), 계종(係從)을 두었다.




사진2 호계서사 경의당


효손(孝孫)의 아들은 한생(漢生)이며 호는 만회(晩悔)이고 파보에 의하면 세종 2년에 출생하여 세종 22년에 함창현감이 되고 세종 30년 문과 급제하고 문종 2년에 집의가 되었다. 묘소는 예천 용궁 오송산에 있다.

계생(係生)의 아들은 돈(敦) 사정, 호(浩) 사정, 한(漢) 부장이다. 한(漢)의 자는 국평(國平)이고 손(孫)은 치(錙) 장사랑이며 증손은 구서(龜瑞), 용서(龍瑞), 붕서(鵬瑞), 일재(逸齋) 운서(雲瑞)로 장사랑이다. 23세 일재(逸齋)는 6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진한(震翰), 차자는 진우(震羽), 3자 진석(震錫)은 어모장군으로 보성군수,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를 지냈다. 4자는 진길(震佶), 5자는 진휴(震休), 6자는 진욱(震勗)으로 무과를 하였다.
 


사진3 호계서사 기문과 사당기


낙빈공(洛濱公) 진한(震翰)

24世 낙빈공(洛濱公) 진한(震翰)은 파보에 의하면 광해 7년에 출생하여 현종 4년 식년시 문과 갑과 장원(壯元)급제하여 숙종 1년 사헌부감찰에 배한 후 결성현감으로 나갔다가 홍주목사를 지냈다. 숙종2년 사간원 정언, 숙종 3년 병조정랑이 되었는데 서울 집에서 졸하니 수는 63세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손을 잃은 것 같다며 부증(賻贈)을 특가하였으며 순조 12년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으로 추증되었다. 공은 과거에 급제하기 전 어떤 선유(先儒)를 문묘에 배향코자 청하는 유림의 통문에 “세상에 어찌 사소(邪疏)에 참여하는 권진한이 있겠는가” 하고 거부한 일로 오래도록 좌폐되어 과거를 보지 못하였다가 과거급제하여 요직에 안자마자 탄핵을 받아 삭출되었다.


사진4 상덕묘 삼문


실록에 사신(史臣)은 “권진한 같은 이야말로 굳세고 씩씩하도다. 강재교(强哉矯)하고 칭찬할만한 인물이라 하겠다” 고 기록되었다. 동년 8월 사헌부의 추고에 함답(緘答)을 세차래 거부한 일로 형추케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추함(推緘)을 거부했다고 해서 조관을 외방에서 형추한 예가 있느냐”고 봉입승지를 꾸짖었다고 한다.


사진5 상덕묘 사당


공은 소시부터 척당(倜儅)하고 지절(志節)이 있었으며 포의로 시사를 논변하는 항소를 올려 조야의 주목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장원하였으면서도 환로가 열리지 않았다. 일찍이 낙동강 천석(泉石)을 좋아하여 신풍정(新楓亭)을 짖고 고궁락도(固窮樂道)하며 소요자적하면서 스스로 낙빈거사라 하였다. 성산 인물지와 계방록에 사적이 오르고 문집을 남겼으며 황학 윤영섭(尹永燮)이 행록을 지었으며 공산 송준필(宋浚弼)이 행장을 지었다. 묘소는 구미시 선산읍 낭산 하둔동에 있다.


매와공 사악(梅窩公 士諤)





사진6 매와공 유허비각


종보448호(10월1일)에 귀봉공(龜峰公) 덕린(德麟)에 대하여 상세히 소개한바 있으나 지면관계로 매와공(士諤)은 이번 호에서 논술하고자 한다. 매와공 사악(梅窩公)의 부친은 귀봉공의 아우 덕란(德鸞)이고 첨정(僉正)으로 봉정대부 군자감정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안강읍 두류리 중현에 있다.

사진 7 호계서사 측면


매와공 사악(梅窩公 士諤)은 명종 11년 경주 안강에서 출생하여 백부 귀봉공에게서 수학하고 공은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7세로 의병을 일으켜 경주판관 박의장과 함께 문천에서 회맹(會盟)하고 손시, 최진립과 더불어 정병 수백을 이끌고 영천으로 진격하여 의병대장 권응수와 합세하여 영천성을 수복하였다. 공은 선조 26년 밀양의 율리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울산으로 가 여러 의병장과 회맹하였다. 선조 27년 전공으로 훈련원 주부가 되어 관군에 배속되었으며 첨정으로 형산강 기장 등지에서 적을 격멸하였다. 선조 29년 팔공산 회맹에 참가하고 선조 30년 창녕 화왕산으로 들어가 방어사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훈련원정으로 승차하였다. 선조 31년 난이 평정되자 사천현감으로 부임했다가 형조정랑이 되고 선조 33년 귀향하여 동강의 매사에서 학문을 닦으며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하였다.


사진8 호계서사 현판


선조 38년 선무원종공신3등에 록훈되고 광해 1년 울진현령 겸 강릉진관병마절제도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안강의 호계동에 침류정(枕流亭)을 짓고 시문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광해 4년 57세에 졸하니 정조 10년 사림이 유지에 호계서원(虎溪書院)을 세워 제향하였으며 철종 10년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으로 추증되었다. 서원이 철폐되었다가 2001년 안강읍산대리 구지(361-2) 에 복원 중건되었다. 묘소는 포항시 기계면 안심동에 있다.

사진 9 매와공 묘소


매와공(梅窩公)실기에 보면 이조판서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홍양호(洪良浩)가 쓴 유사에 “임진년 왜란에 경주, 영천일대는 왜적들이 들이닥쳤는데 몇몇 충절지사들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막았으니 권응수, 최진립이 가장 뛰어났다. 권사악(士諤)공은 향병을 모집하여 충의공 대열에 들어가 혈전으로 영천성을 수복하였다. 공은 본래 유가의 자손으로 유시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는데 섬나라 오랑캐가 창궐하니 전쟁터로 달려가 전공을 세웠다. 군수를 역임하였으나 시속을 좇아 이름 높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찌 충의지사들이 한 지방에 모여 있는 것인가? 산천의 영험함이 유독 경주에만 치우쳐 선비들이 성대한 기상을 드러내 보이는가? 공은 스스로 매와(梅窩)라 자호하고 저술들은 전란에 사라졌는데 후손 덕환이 업적을 모아오고 충의공 일지와 계림지(鷄林誌)에 의한 것이니 내 경주 부윤을 지냈으며 사료편찬의 관직에 있었으니 평소 공의 의기(義氣)를 사모하던 터라 이 글을 쓰노라” 하였다.

임금은 “나라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그대는 이미 나라를 중흥시키는데 힘을 쏟았도다. 짐은 이에 은혜를 원종공신으로 미루어 옛 법도를 따랐도다. 섬나라 도적들이 나라를 동란으로 몰아넣었다. -중략- 선비들이 병기를 들고 적을 쳤으니 모두 기록하여 영구히 후대에 전하노라. 너희 자손들이 만세의 안락을 향유토록 하라.”하였다.

사진 10 매와공 교지


영천성 복성기에는 “임진년 7월 왜적이 크게 영천성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의병대장 권응수는 추평에 진을 치고 적의 형세를 엿보고 있었다. 그때 경주의 선비 권사악은 손시, 최진립과 함께 정예병사 수백명을 이끌고 우항의 뒷산에 올라 두 부대가 합세하여 작전을 도모하여 성 전체의 왜적들을 불을 질러 섬멸하고 우리 남녀 1900명을 데리고 나왔다.”


사진 11 매와공 공신록


호계사기문의 대의는 「전략-임란때 향병 수백명을 규합하여 권응수에게 가 회합하여 영천성의 왜적을 토벌하고 그로 인해 군속이 되었다. 매번 싸움에서 선봉에 서서 적의 예봉을 꺾었으며 율림과 형산강의 승리에 있어 공의 공로가 대부분이다. 함께 화왕산에 들어가 곽재우와 협력하여 성을 사수하였으며 공천으로 사천현감에 제수되었다. 이에 앞서 공은 문장으로 천거되었지만 기해년 정시에 발탁되었으나 실격당하니 식자들이 애석히 여겼다. 후략」

<자료제공 운곡서원운영위원장 권혁근,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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