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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慕齋 諱 復興과 丹溪書堂(종보 446호 20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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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594회 작성일 12-07-2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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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자는 중원(仲元)이요 호는 오모재(五慕齋)요 좌윤공파 24世이다. 증 좌의정(贈左議政) 문정공(文靖公) 휘 희정(希正)의 8세손이고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 죽림공(竹林公) 휘 산해(山海)의 5세손이며, 판관 철손(哲孫)의 고손이고 장사랑 경릉(敬陵)참봉(參奉) 휘 평(平)의 아들이다. 명종10년 (1555년)현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인 서산류씨(夫人瑞山柳氏)는 참봉 희춘(希春)의 딸이다.


단계서당 전경(경주시 강동면 다산리878


공은 천성이 인자하고 기계가 곧고 효성이 지극하며 남달리 가문의 명예를 소중히 하고 선유(先儒)의 맥(脈)을 이어 학업에 전념하였으나 혼탁한 정국이라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후학양성으로 자족하며 참 선비로 성실히 살아오던 중 왜란을 당하니 38세로 족병(足病)으로 부자유한 일신이지만 선천적인 강개지심을 억제할 수 없어 주위의 극진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말하되 “우리 집은 대대로 충(忠)과 의(義)를 생명처럼 소중히 지켜왔는데 차제에 왜구를 토벌하여 나라에 보답함이 신하의 도리이거늘 어찌 생사와 이해로서 몸을 돌볼 수 있겠는가” 하고 즉시 가산을 정리하고 의병자금을 마련하여 수제검상마(遂提劒上馬)하여 동지의병 수십 인을 지휘하여 곳곳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마침내 부산 다대포(多大浦) 격전에서 혈전을 거듭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동년 4월28일 만고충신 공(萬古忠臣公)은 장렬히 순절(殉節)하였다.

부인 서산류씨(夫人瑞山柳氏)는 갑작스런 부군의 전사통보를 접하고 즉시 가인을 동원하여 격전지에서 수일동안 누볐으나 끝내 부군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 만 부득 유의(遺衣)로 초혼(招魂)하여 예를 갖추어 장례하고 근친과 노비에게 이르기를 “나라를 위하여 순절하신 부군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불출아낙이 무슨 면목으로 살 것이요” 하고 아들을 근친에게 부탁하면서 “이재 4살이라 젖이 없어도 살 수 있으니 내가 어찌 차마 혼자 살 리요”하고 구일불식(九日不食)으로 자진하였다. 공의 충의와 류씨의 의열(義烈)은 임란사에 길이 기록된 충렬이었다.


단계서당 (경북 문화재 464호)



영조 13년(1737년)에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중관(李重觀)은 희대의 충절사적(忠節事蹟)을 감영에 진언하니 순상(巡相) 박문수(朴文秀)가 조정에 장계하여 왕이 가납하여 특명으로 정려(旌閭)를 내렸다. 영조 15년 정려각(旌閭閣)을 건립하고 충신의사의 편액을 걸었다. 
 

충열사 내삼문



충열사 오묘재선생 위패


영조16년 참의 정중기(鄭重器)와 진사 김예갑(金禮甲)이 발의하여 도내 사림(士林)의 발의로 묘우를 세우고 의사 오모재 권선생(義士五慕齋權先生)의 위패를 봉안하고 묘우는 충렬사(忠烈祠)로 강당은 숭의당(崇義堂)으로 당호는 단계사(丹溪祠)라 현판을 달고 향중유림과 자손들이 향례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영조17년에 숙종(肅宗)40년 이후에 창건(創建)한 향현사(鄕賢祠) 및 영당(影堂) 훼철령에 의하여 폐쇄하였다. 


단계서당



단계서당기문(여강 이능윤 찬)


정조 10년(1786년) 경주부윤 홍재(洪梓)가 정려기명병서(旌閭記銘幷序)를 찬하고 충신 권복흥공(權復興公)의 행적과 열녀 서산류씨(瑞山柳氏)의 열행이 행여 인멸될까 염려하여 즉시 입석표지(立石標識)하라는 언질에 따라 유허비(遺墟碑)와 비각(碑閣)을 세우고 징사(徵士) 한산 이광정(韓山李光靖)이 찬하였다. 


전사청


정조 12년(1788년) 조정(朝廷)에서 병오년 이전(丙午年以前)에 폐쇄된 향현사(鄕賢祠) 및 영당(影堂) 복설령(復設令)에 따라 묘우(廟宇)와 신문(神門), 강당(講堂‧ 성인재成仁齋‧ 지미재趾美齋), 전사청(典祀廳), 유정문(由正門), 관리실(管理室)을 중건(重建)하고 매년(每年) 3월 中丁日에 향중유림(鄕中儒林)과 자손들이 향례를 받들었다. 정조 18년(1794년) 경주부윤 임재원(林濟遠)이 열녀 류씨(烈女柳氏)의 사적을 감영에 보고하니 순상 이조원(李祖源)이 장계하여 왕이 가납하여 “열녀 의사 권복흥처 서산유씨 지문(烈女義士權復興妻瑞山柳氏之門)”이라 정표함과 아울러 식물을 제급하고 명 급복(命給復)하다. 이에 따라 충신편액전면(忠臣扁額前面)에 열녀편액(烈女扁額)을 병현하고 이조판서 홍양호(洪良浩)가 충렬정려기명(忠烈旌閭記銘)을 병서하였다. 그러나 1868년 대원군의 전국서원 철폐령으로 충렬사(忠烈祠)는 훼철되고 단계사(丹溪祠)도 단계서당(丹溪書堂)으로 개칭하고 제향마저 철향하게 되었다.


오묘재 복흥 유허비각


1924년 향중에 공의가 일어 충렬사지에 설단하고 복향(復享)행사를 하였으며, 광복후 1954년 묘우(廟宇)를 중건하고 충렬사편액(忠烈祠扁額)을 다시 걸고 봉향하였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464호로 지정되어 2006년부터 2008년까지 경주시 문화재국에서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 878에 현재의 단계서당(丹溪書堂)을 완전히 중수하였다. 오모재실기(五慕齋實記)가 있으며 사적이 동경지(東京誌)와 읍지(邑誌)에 실려 있다. 


오묘재와 배위 서산류씨 정려각


오묘재 정려문과 서산류씨열녀문

단계서당은 입구의 드넓은 대지위에 외삼문, 전사청(典祀廳), 강당인 숭의당(崇義堂), 내삼문(神門), 묘우인 충렬사(忠烈祠)가 자리하고 밖으로 왼쪽에 유허비각(遺墟碑閣), 권복흥(權復興)과 서산류씨(瑞山柳氏) 정려각인 충렬각(忠烈閣)이 자리하고 있다. 

충신 오묘재공의 묘소(강동면 다산리 행장골 산29)


묘소는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 행장골 산29에 합폄이며 전 어모장군 세손 익위사위수 여강 이헌락(前禦侮將軍 世孫翊衛司衛率 驪江 李憲洛 謹撰)이 묘비명을 찬하였다. 
 

묘소를 수호하기위한 달림재사


묘소를 수호하기위한 달림재(達林齋)가 있다. 기문은 통훈대부 전행홍문관 부교리지제 교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서학교수 여강 이중구(通訓大夫前行弘文館副校理知製 敎兼 經筵侍讀官春秋官記注官西學敎授驪江李中久)가 썼다.


후면에서 본 오묘재공의 묘소


공의 아들 지(䥍)는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이며 묘소는 선고 동록에 있다. 손은 익현(益賢)과 우현(友賢)이고 익현의 아들은 취경(就經)과 희경(熙經)이고 우현의 아들은 유경(有經)과 이경(以經)과 대경(大經)과 칭경(稱經)이 있다. 이후 자손이 번창하였다.

< 자료제공 12세손 권혁무 편집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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