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순례 34] 同正公 後裔들(2) 感顧堂 花原君 諱 喜學(종보 제393호 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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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707회 작성일 12-04-30 14:19본문
[유적지순례 34] 同正公 後裔들(2) 感顧堂 花原君 諱 喜學 |
同正公派祖와 安東의 後裔들(2) 感顧堂 花原君 諱 喜學 지난 호는 21世 응치의 제 자손에 대하여 소개하였는데 이제 응추(應錘)의 손과 감고당(感顧堂)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다. |
응추의 자는 칭무(稱武)이고 덕행(德行)이 있었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추증되었다. 응추(應錘)는 득정(得正)을 낳았으며 득정은 병자호란에 병마사(兵馬使)로 허완을 따라 쌍령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안동부 호장을 지냈고 수직으로 사복시정이 되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로 추증되었다. 감고당의 조부 홍(鴻)은 장예원판결사로 증직되고 부친 화성군(花城君) 명형(命逈)은 장자 희규와 차자 희학이 귀히 되어 한성부우윤으로 추증되고 순충결기보조공신 공조판서(工曹判書) 겸 오위도충부도총관 화성군으로 가증되었다. 감고당의 형 일우당(逸愚堂) 희규(喜奎)는 문과급제하여 절충장군이 되고 절제사가 되었으며 전라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었다가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증직되었다. |
봉강영당과 어서각 |
감고당 희학(喜學)은 화성군의 둘째 아들로 현종 13년(1672년)에 안동 범상동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자품(資稟)이 영위(英偉)하고 재기(材器)가 통민(通敏)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촉망을 받게 되었다. 스스로 호를 감고당(感顧堂)이라 하였다. 공은 어려서 전장놀이에서 대장을 하는등 대인(大人)의 기풍(氣風)을 가졌으나 부친이 일찍 별세하니 집이 가난하여 낙엽을 주어 글씨 연습을 하였다. 일찍이 지인(知印-기관장의 잔신부름을 하는 사람)으로 있을 때 소론의 거두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이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공이 첫눈에 들어 문하에서 공부를 시켰다. 하루는 부사와 함께 누각에 올랐는데 멀리서 아낙이 나무를 줍고 있으니 공이 뛰어가 모친의 일을 돕고 돌아왔다. 부사 명곡이 서울로 가게 되어 공을 데리고 가니 18세였다. 명곡은 그의 장자 곤륜과 똑같이 보살피고 구수영산법을 공에게 가르치니 아들이 자기에게는 왜 안가르쳐 주는가 문의하니 너희들은 어려워서 배워도 모른다고 하였다. 3년 후 결혼차 귀향하였으나 명곡이 다시 불러 수학하며 증광시를 보았는데 피봉을 쓰는 방법이 틀려 장원을 못하고 낙방하였다. 공이 26세 때인 숙종 23년(1697년) 3월 최석정이 세자 경종 책봉 주청사로 연경(燕京)에 갈 때 수행원들 중 한사람으로 갔다. 보고 듣고 경험한 일을 일기로 남겼는데 이것이 연행일록(燕行日錄)이며 그 공로로 교련관(敎鍊官)에 승진 되었다. 숙종 24년(1698년) 국내 대흉년으로 조정이 청국(淸國)에 식량을 대차(貸借)할 때 최석정이 해운시랑사사(海運侍郞謝使)로 관서지방에 행차하자 종사관으로 그를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서북지방에 갔다 오는 길에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일기로 남겼는데 그것이 서행일록(西行日錄)이다. 숙종 26년(1700년) 경복궁위장(景福宮衛將)에 임명되었다. |
화원군 영정(경북 유형문화재 제281호) |
경종이 즉위하자 유약하여 노론파 영의정 김창집 등 4대신은 왕세자를 영잉군(영조)으로 책봉하였는데 소론파 우의정 조태구 등은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그후 왕세자가 정무를 대리하게 됨에 소론은 김일경 승지로 하여금 노론 4대신을 역모로 무고하여 극형을 당하고 노론은 실각하고 소론이 집권하였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소론은 참살 당하면서 노론 4대신을 무고한 소론 김일경 등이 죽게되었는데 영조 3년 노론의 일부가 실각하자 이인좌 정희량 등이 주동이 되어 밀풍군을 추대하고 영조 4년(1728년) 삼남지방에 난이 일어났다.(戊申亂 이라고도 함) 이인좌는 청주를 습격하면서 흰옷을 입고 경종을 애도하는 것처럼 하였다. |
화원군 묘소(남선면 신석동 뒷산) |
화원군 신도비 |
화원군 묘비 |
공은 영남의 열읍이족(列邑吏族) 및 사림족(士林族)과 긴밀한 연계가 되어 있는데다가 참모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영남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안의에서 기병한 정희량, 이웅좌 등이 안동 상주 지방세력과 연결을 시도하자, 공은 안동 상주 지방은 반란군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거기에 효과적인 대처를 한 결과 반군을 쉽게 토벌하게 되었고 안동 상주 지방의 연루자들을 적극 변호해 주어서 그곳 사족(士族)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 공은 첨사(僉使), 오위장(五衛將)과 운산군수 장연부사 등 삼진(三鎭) 오읍(五邑)을 진수(鎭守)하면서 임지마다 치적을 올리고 4월에 숭례문에 이르니 임금이 친히 문루에 입어하여 위로하고 공신의 칭호를 내리니 공은 공훈이 큰 15인 중 하나로 수충갈성결기효력앙무공신 3등에 녹훈되고 종2품 가선대부 화원군으로 봉군되었다. 공은 외직으로 고군산진장(古群山鎭將), 남해미조진 첨절제사(僉節制使), 광양. 곤양군수, 장연도호부사, 해주진관병마첨사, 영변부사 등을 지냈는데 미조진에는 공적비를 세워 공의 덕을 칭송하였다. 공의 상이 공신각(功臣閣)에 걸리고 영정이 왕명으로 하사되었다. |
공의 스승인 명곡 최석정이 정축년 연경에 다녀온 감회시 |
공은 관직에 있어 청렴하였으니 경복궁 위장시 하졸들이 낙엽을 모아 팔자고 하였는데 공은 공물(公物)이기에 사리사욕을 취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곤양(사천)현감 재직시 사족 산사람이 좌상의 편지를 가지고 와 청탁하였으나 목민관으로서 백성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할 수 없다고 하여 사족이 좌상에게 고을 다스림이 엉망이라고 일러바치니 좌상은 대신의 청탁을 물리친 것으로도 치적이라 하였다. |
이인좌의 난을 평정후 수훈자 향연에서 내린 영조의 어제가 |
공은 영조 18년(1742년)에 71세로 졸하니 자헌대부 공조판서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추증되었다. 사후(死後)에 이족(吏族)과 사림(士林)이 순조 5년(1805년)에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에 봉강영당(鳳岡影堂)을 창건하고 영정(影幀)과 어서(御書)를 봉안하였는데 그 영당은 1862년 춘양(春陽)(봉화군 명호면 풍호리)에 이건(移建)되었다가 다시 1870년 안동군 남선면 신석리에 이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막곡리에는 봉강동천(鳳岡洞天 봉무산 기슭 살기 좋은 곳)이라고 예조판서를 지낸 이집두(李集斗)의 글씨가 암각되어 있다. |
정조의 어제시 |
묘소는 안동군 남선면 신석동에 있으며 돈녕부 임여재(臨汝齋) 유규(柳氵奎 )가 행장을 짓고 영의정 귀곡 조현명(趙顯命)이 신도비문을 지었으며 묘지문은 교관 최홍간(崔弘簡)이 지었다. 남선면 신석동에 봉강영당의 화원군 영정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81호이며 문적은 제 190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강영당에는 명곡의 감회시와 영조의 어제시, 정조의 어제시 그리고 봉강영당 상량문이 걸려있다. 영조의 어제가 “나라 어지러울 때 계합하여서 군신이 같이 늙어가는 오늘의 모임이여! 나라를 보전함을 잊을 수 없고 나라가 장차 반석위에 놓이리라.” <자료제공 동정공파 권오수 / 글,사진 현봉 권경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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