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순례 33] 同正公派祖와 安東의 後裔들(1) 종보 제392호 2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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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462회 작성일 12-04-30 13:59본문
[유적지순례 33] 同正公派祖와 安東의 後裔들(1) |
同正公派祖와 安東의 後裔들(1) 동정공은 6대손 사위인 심이해(沈以海, 청송인)의 손 심종성(沈宗聖) 가(家)의 고첩에서 공 이하 4세의 기록이 나와 정조 18년 후갑인보에 입록되었다. 1986년 안동시 안막동 호소곡에 단소(壇所)를 설단하였으며 김일대(金日大)가 지은 단비문에 점필재 김선생의 문집에 신라의 종가, 지가의 자손들이 번성하고 사방으로 산재 거주하여 호장(戶長)이 되고 고려태조 통합 후는 호장이 조정에 나아가 시중대광(侍中大匡)에 오르고 혹 귀향하여 호장이 되었으니 향리의 일족은 과시에서 사족(士族)과 같으며 지금의 거벌(巨閥)들이 모두 호장의 후손들이라 하였다. |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의 향손록(鄕孫錄)에 영가(永嘉)의 산수경치(山水景致)와 인물의 성함을 칭찬하고 향손 중 화원군(花原君) 권희학(權喜學)은 충성을 다하여 난리를 평정하고 호군(護軍) 권후중(權後重)은 우암에게 인지를 받아 우암이 군자는 마음가짐을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이 하여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16자로 면대(面對)하니 그 심인후덕(深仁厚德)의 여음이 후손에 드리워져 충효행의(忠孝行誼)가 출중하고 기량이 높은 인사가 배출되었다고 하였다. 20세에 호장 효숙(孝淑)은 응치(應錙, 호장)와 응추(應錘, 증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두었고 응치는 7남매를 두었다. 응추의 손들은 다음 호에 상세히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 호는 호장공 응치의 후손에 대해 소개한다. |
동정공 단정비 |
용산재사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동) |
응치의 아들은 득종(得宗, 통정대부)이고 손 세익(世益)은 부친과 함께 인조 14년 병자호란에 쌍령전투에 참전하여 계공랑(啓功郞)이 되고 동지중추부사로 추증되었다. 증손 후중(後重)은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종학하였으며 군기시찰방으로 제수되었으나 양친이 노쇠하여 부임치 않았으며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고손은 시형(是衡) 시창(是昌) 시량(是亮)이고 시창은 학덕과 행의를 닦아 흉년에 유리걸식하는 백성을 거두고 구휼한 공이 어사에 의해 임금께 포계되어 사직(司直)에 제수되었으며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량은 숙종 8년 증광시 생원 3등으로 합격하였으며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문하에서 수학하고 후진을 길렀다. 시량의 계자 순기(舜紀)는 생부가 시창이며 문장과 덕행으로 명현의 추종을 받았으며 약계정을 지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
용산정( 시창공이 아들 순경, 순기, 순강 3현제를 가르치려고 지은 집) |
시창의 아들은 순경(舜經) 순강(舜綱)이며 무와공(無窩公) 순경은 38세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고 학행이 높아 아우 순기와 함께 많은 후학을 기르면서 예서 상례집략(喪禮輯略) 4권을 편저하고 용천연고(龍川聯稿)를 남겼다. 69세에 졸하니 정재 유치명(柳致明)이 비문을 짓고 도정 이한응(李漢膺)이 행장을 지었다. 또 공은 무와십계(無窩十戒)를 지어 자제들에게 계율을 삼았으니, 게을리 하지 말라. 아비의 명을 어기지 말라. 형제간 겨루지 말라. 아랫사람을 억누르지 말라. 재화를 그물질 말라. 여색을 가까이 말라고 하였다. 시창의 3자 소와공(素窩公) 순강(舜綱)은 효도와 우애가 천성으로 타고 나서 분가 후에도 새벽이나 한밤에도 예를 다하였다. 제2자 약계공(藥溪公) 순기(舜紀)는 시량(是亮)에 출계하여 어려서부터 재기가 특출하였으나 양가 부모의 상을 당해 과거를 놓치고 학행으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말년에 약계정(藥溪亭)을 짓고 소요자적하였다. 공은 유서에서 제사에 부(富)하면 많이 차리고 가난하면 간략히 차리되 사부의 예를 다하라 하였다. |
용산정과 정문 |
순경의 제 2자는 27세(世) 오헌공(梧軒公) 흡(忄翕)이며 숙종 36년 안동 오촌리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재기가 특출하였으며 명경과(明經科)를 업으로 삼아 학업을 닦았는데 편모가 연로하니 거업을 거두고 도애(道崖)정사를 짓고 시문을 짓는데 강도 수십명이 난입하자 공이 이르기를 “그대들도 이성을 가지고 있거늘 어찌 사지를 게을리 하고 나쁜 짓을 하는가” 하니 도적들이 깨우치고 돌아갔다. 공은 70 노모를 지성으로 섬기다 39세에 와병으로 고종하니 향리에서 애도하고 고종조에 조봉대부 동몽교관의 증직과 마을을 정표케 하니 정효각(旌孝閣)이 내렸다. 정와 김대진(金岱鎭)이 행장을 짓고 효행을 발천하는 성순상문(星巡相文)은 삼산 유정원(柳正源)이 지었다. 정려비문은 유형진(柳衡鎭)이 지었으며 정효각 기문은 이진국(李鎭國)이 짓고 비문은 조헌기(趙獻基)가 지었다. |
정효각 : 27세 오헌공 흡에게 내려진 정효각 |
용산정(龍山亭)과 시창(是昌) 순경(舜經) 흡(忄翕) 3대(代) 조선 숙종 때 25세(世) 시창공(1650~1707)이 그의 아들 순경(舜經), 순기(舜紀), 순강(舜綱) 3형제를 가르치려고 용산정 집을 짓고 공부를 시켰다. 3형제는 학업에 매진하여 순경은 1713(癸巳)에 생원을 하였고 인심선악도(人心善惡圖)와 사단도(四端圖), 상제집약을 간행하였다. 순기는 시량(是亮) 숙부에게 출계하고, 순경의 제 2자 오헌공(梧軒公)은 과거를 보러 가다가 강물을 건너는데 모두 다투어 배를 타려 하였으나 공이 홀로 물러서며 피하여 배의 전복에서 화를 면하니 그 근신(謹愼)함이 특이하였다. 또 공의 어머니가 발에 악창이 나서 붓고 곪아 위로 올라오니 침으로 수술하려 하자 공이 울면서 중지하게 하고 빨아서 농혈이 없도록 하니 달포 후에 병이 나았다. 순경이 해소병이 있어 동절에는 더욱 심하여 백약이 무효여서 자신이 얼음을 깨고 목욕재개 하고 북두칠성에 빌어서 자신이 대신하기를 청하고 환자의 분뇨 맛을 보고 차도(差度)를 증험하였다. |
무와공 순경의 유훈 |
시형(是衡)의 고손 29세 성범과 아들 사도를 위한 세효각 |
성범과 사도에게 내려진 정려의 세효각 : 안동시 남면 신석리) |
25세(世) 시형의 고손 성범(聖範)은 안동부의 향리(鄕吏)로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부모상을 당하여 3년 시묘살이를 하루같이 정성을 다하고 무덤에 각종 화초를 심었고 10대 종손으로 생가와 양가 부모를 비롯하여 후사가 없는 숙부모, 계부모 여덟 분 어버이를 봉양하고 복상하는 효를 다하며 산소를 오르내리니 세상 사람들은 이 길을 효자로(孝子路)라 하였다. 이로 인하여 효행으로 그의 차자(次子) 사도(思度)와 함께 1808년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내렸다. 안동부사(安東府使) 김학순(金學淳)이 서문을 짓고 이유경(李有慶)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성범의 차자 사도는 효행으로 1841년(辛丑)에 정려가 내려지고 교리(校理) 김건수(金建銖)가 증수기(增修記)를 짓고 이시수(李蓍秀)가 비문을 지었다. 안동시 남선면 신석리(음곡)에 세효각(世孝閣)이 있다 <사진 기사 : 현봉 권경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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