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世 承旨公 錫忠의 後孫들 종보 478호(20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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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182회 작성일 15-03-30 09:51본문
월곡공(月谷公) 용하(龍河)
공은 승지공 석충(錫忠)의 10대손이고 장곡공 태일(泰一)의 8대손으로 고조는 증가선대부 동지중추 익갑(益甲)이고 증조도 동지중추 만중(萬中) 부 휘 도협(道浹)은 용양위부호군으로서 헌종 13년(1847년) 출생하였다.
1871년 기려자(騎驢子) 송상도(宋相燾)는 1919년 유림의 파리장서(巴里長書)운동으로 유명한 봉화출신의 독립운동가 청산(請山) 권상익(權相翊;복야공파 33世)에게 배우고 교유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아호를 기려자라 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애국자의 자료를 수집하여 기려수필을 편찬하였다. 이 수필은 항일투쟁을 알리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병인양요, 6.10만세운동, 1929 광주학생운동에 이르기까지 사건과 단체 및 239명의 항일투쟁사가 실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하였다. 이 기려수필은 청산 권상익(權相翊)이 서문을 썼는데 이 수필에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소식을 듣고 향리에서 홀로 자진(自盡)한 월곡공(月谷公) 권용하(權龍河)열사의 사적이 실려 있다.
월곡공 용하의 묘소 : 의성 다인면 송호리 당현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데 있어 농사짖고 이웃과 화목하면서 향당에서 쌓은 학식과 덕망이 조정에 계달되어 고종 39년 47세로 종4품 선략장군(宣略將軍)의 무산계로서 사헌부 감찰(監察)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공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하고 있는 중 종제 용혁(龍爀)이 와서 나라가 합병되었음을 알렸다. 공은 나라가 망했는데 살아 무엇하랴 하면서 통곡하더니 의관을 정제하고 서울을 향해 북향 4배를 마치고 그대로 기둥에 머리를 받아 피를 토하며 기도가 막히더니 숨을 거두었다. 기려수필에는 “이 무슨 일인가 나라는 이미 폐허가 되고 사직은 가옥으로 변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자가 보고서 숨을 쉬고 있을 때인가.(是豈臣子 視息之時乎) 곧바로 머리로 벽과 기둥을 받더니 피를 토하며 절명하였다. 오호라 장하도다, 사람으로 하여금 흥감케 한 것이 과연 이로써였다.(使人興感 果以此也)”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무과(武科)한 영규(寧圭)이고 차남은 영선(寧璿), 3남은 영국(寧國) 4남은 영호(寧鎬)이다.
공에 관한 사적은 기려수필 이외 예천군지와 안동향교지, 의성군지, 충의렬지, 안동판 독립사에 실리고 독립유공자 훈록 제12권에도 실렸으며 비문은 한국금석문집 제15권에 수록되어 있다.
시산 유동준은 공의 전(傳)을 짓고 찬하기를 “회곡공의 9대손이요 대한의 빼어난 백성인데 어찌 하늘의 해가 한가운데서 비침을 모른다 하랴” 하였고 풍산 유시봉은 비문을 짓고 명하기를 “충성을 다하고 효도를 다하니 하늘에서 받은 천성이요 나라가 망하니 몸도 없어짐은 공의 절개인데 우주를 일관하여 떠받들었으니 굳세고 또한 장렬하였네, 봉분과 사당은 눈물을 흘릴 고개에 있는데 무릇 저들 도적질해 사는 자 누구라 얼굴이 부끄럽지 않겠는가”하였다.
공의 생거지는 의성군 안사면 월소리이고 묘소는 의성 다인면 송호리 당현에 있다.
34世 대영(大永)
춘계(春桂)의 10대손이며 장곡공 태일(泰一)의 아우 태정(泰精)의 9대손이다. 통정대부 면(冕)의 장 증손이고 경산정(耕山亭) 용보(龍普)의 아들이다.
철종 7년 출생하여 성품이 순근(淳謹)하고 의표(儀表)가 단결(端潔)하며 일생을 공부에만 치중하여 배우러 오는 자들이 개도(開導)하였다. 공은 처음에 서산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나중에 용산 이만인(李晩寅) 문하에서 교유하면서 문집을 남겼다. 1933년에 졸하니 78세였다. 묘소는 안동시 예안면 태곡 수암의 비룡등에 있다.
애국지사 34세 니남공(泥南公) 영탁(寧鐸)
공은 춘무(春茂)의 10대손으로 고조는 가선 수중(壽中)이고 증조는 후(喣), 조부는 도무(道武), 고의 휘는 용필(龍必)이다. 고종 26년 안동 와룡 태리 272번지에서 태어나 총명하고 성품이 당당하였다.
애국지사 영탁의 묘소 :영양 청기면 기포동 포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로 방방곡곡에서 3.1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공은 뜻을 같이하는 김원진, 송기식 권이원, 권점필 권경영 등과 1919년 3월 18일 안동 장터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3월 23일 밤 3,000 여 군중이 안동시내 동서남북에서 자주독립만세를 외쳤다. 공은 동지들과 동분서주하면서 왜경에 대항하니 그 기세는 하늘을 진동하였다. 왜경은 왜인들에게 중창을 주어 200 여 편대로 무차별 사격하고 칼로 찔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순국한 사람은 공과 30 여명이었는데 공의 장지는 사니산 서록이었다. 1남 2녀를 두었는데 오완(五琓)의 나이는 7세였다. 1983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는데 재종숙 영목과 장손 종적이 공의 사적을 수집하여 경과를 비에 기록하였다.
방후손 좌윤공파 권영태(權永泰)가 비문을 지었다. 右銘曰
天降民彛 하늘이 내린 떳떳한 백성으로 惟義與仁 어짐과 더불어 의로움이요
死生呼吸 생사를 호흡하니 孰能其仁 그 누가 알리오
仁義愛國 어짐과 의로 애국하니 義以殉躬 순국으로 의를 다하니
奠銘攸藏 소장으로 명하고 드리오니 昭示無窮 밝게 끝이 없도다
35世 탄곡공(炭谷公) 오봉(五鳳)
가연공(佳淵公) 춘계(春桂)의 11대손으로 경산정(耕山亭) 용보(龍普)의 손자요 이하공(易下公) 대영(大永)의 아들이다. 공은 고종 32년에 출생하여 자질이 명석하여 가업을 이어 문학이 심우(深優)하였으며 향내에서 명망이 높았다. 16세때 경술국치로 참의 이만도가 안동에서 자결하였는데 영양출신 유학자 벽서 김도현이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1914년 유시를 남기고 영해 관어대(觀魚臺)에서 투신 분사하자 공은 크게 감명을 받고 항전배일정신이 폐부에 가득하여 1919년 기미 독립운동이 일어남에 25세로 시위를 창도하였다. 왜경을 피해 객지를 전전하기 20여년 해방되자 고향으로 귀환하였다. 그후 영양의 청기 기포동 향리에서 서숙하며 인근의 자녀들 70여명을 모아 한학을 가르치고 예속(禮俗)을 교시하며 일생을 보냈다. 공의 항일운동사적이 입석양명(立石揚名)되었다. 1976년 82세로 졸하니 묘소는 영양 청기면 기포동 포두 앞산에 있다.
문하생들이 적적영모비(蹟績永慕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문학박사 김일렬이 지었다. (자료제공 :권진량, 사진:권기덕, 감수 권영목 고문, 편집 죽헌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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