晦谷公 휘 春蘭, 藏谷公 泰一, 參巖公 希仁(종보 제477호 2015.3.1) > 기타파 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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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谷公 휘 春蘭, 藏谷公 泰一, 參巖公 希仁(종보 제477호 20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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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499회 작성일 15-02-23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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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신령공 휘 직균(直均)5대손이고 병절교위 자관(自關)의 증손이며 증 좌승지 석충(錫忠)의 장자이다. 중종 34년 출생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선조 3년 사마시(司馬試)하고 선조 625세로 식년시 을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거쳐 수차의 외직을 맡았으며 안동에 낙향하여 있다가 선조 25년 임난시 59세로 김윤명의 의병에 가담하여 창의하였으며 선조 2862세로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으로 일을 맡고 선조 3462세에 청송부사에 부임하였다.
그후 사간원 사간 등 내직에 보하였으나 사양하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등과 경학(經學)을 강구하는 학문에만 전념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공은 후학을 많이 길러 추앙을 받았는데 선조가 경연(經筵)에서 권 아무개가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하니 공이 학문에 전념한다고 하자 이를 장려하는 예지(睿旨)를 내렸다. 공은 가슴에 품은바가 맑고 광활하여 산수를 사랑하였는데 더욱 정진하여 동구(洞口)의 임천(林泉)아래에 정자를 짓고 감원정(鑑源亭)이라 편액을 걸고 우유자적(優游自適)하면서 간간이 산동(山洞)을 왕래하며 류서애 등 제공과 강구(講究)하였다. 관직에 징소(徵召)하여도 사양하고 영천군수에 보하였으나 부임치 않았다. 그러면서 양공(養工)하기를 30년이니 류성룡이 공을 일컬어 나의 노우가 천리(踐履)한 공부를 내 능히 미칠 수 없다하였다. 회곡진학도(晦谷進學圖)와 공문언인록(孔門言仁錄)을 저술하였으며 유고로 회곡집(晦谷集)이 있다.


세덕사(회곡공 사당) : 영양군 평기면 기포리


  광해 9년 졸하니 수 79세다. 사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되고 사림의 발의로 안동의 주계서원(周溪書院)에 배향되었으며 그 사적이 선조실록과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증보문헌비고 등에 등재되어 있다.
묘소는 안동시 와룡면 태동 사니산의 선고묘 계하에 있으며 묘지명은 청음 김상헌(金尙憲)이 썼다. 후사가 없어 아우 춘계의 장자를 계자로 삼으니 형조참판 태일(泰一)이다. 공은 수령으로 있을 때 민심을 바루고 풍속을 우선하여 매월 초하루에 양로예(養老禮)를 행하고 흉년을 만나 창고를 열어 구제하니 살아남은 자가 많았는데 추수기에 목록을 불사르며 만약 공사로 견책을 당할 때는 내가 책임지리다.”하였다. 임술(1622) 여러 선비가 모여 선생을 백담(栢潭)의 사우에 배식토록 모의 하였으니 용산서원(龍山書院)이다.


회곡 고택 : 영양군 평기면 기포리 261 경북민속자료 제79(1988년 지정)

회곡고택의 경북민속자료서 제79(1988)에 경북 영양군 청기면 기포동 261번지 권춘란은 1539년 안동군 가구리에서 출생하여 사간원 정언,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집의 겸 세자시강원보덕, 춘추관 편수관을 역임하고 임란에 의병에 가담하였으며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말년에 사수를 따라 기포동에 우거하여 그 후손들이 기포동에 세거하게 되었다고하였다.

권춘란 과거급제 을과 제6(만력9)


퇴계선생을 찾아 갔을 때 선생이 입설인
(立雪人) 권춘란이라 하였다. 다음은 대동기문(大東奇聞)에 실린 공의 사적이다. 입설(立雪)이란 정문입설(程問立雪)에서 온 말로 유작()과 양시(楊時) 정이(程頤)를 찾아뵈니 명목(暝目)하고 있으므로 시립하고 있다가 물러가라는 명을 들었을 때는 문밖에 눈이 한자나 쌓였던 고사에서 제자가 스승을 받듦이 지극함을 이른다. 또 대동기문(大東奇聞)에 공의 용모는 백석(白晳)하기가 빙호(氷壺-얼음항아리 처럼 깨끝하고 맑음)와 같았고 통철히 맑았다. 어려서 향학의 뜻을 품고 부친과 효경(孝經), 주역(周易) 등 문답이 오갔으며 매 일과를 문적에 썼다고 하였다.


춘란 문집: 매곡선생 행장, 진학도 등


공은 퇴계에게 배우기를 청했는데 퇴계가 그 이름을 익히 알고 신중히 대하였다
. 공이 고전에 잠심(潛心)하여 육경(六經)과 사자(四子), 구류(九流), 백가(百家)의 서적에 이르기까지 달하였으며 주역(周易)은 항상 머리에 놓고 드러내지 않으니 남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어버이 섬김이 자상하고 도타웠다.


춘란 묘소 : 안동시 와룡면 태동 사니산 선고묘 계하



공의 유적인 감원정
(鑑源亭)은 세덕사(世德祠)로 되어 후손들이 중소로 되어 왔는데 현재 와룡면 태동 옛터가 화폐되어 후손들이 새로 복거(卜居)하던 영양 기포로 이전하여 보존한 내력을 후손 인환(仁煥)이 감원지라고 썼다.


25
() 장곡공(藏谷公) 태일(泰一)

공은 춘란(春蘭)의 계자로 선조 2년 출생하여 백담 구봉령(具鳳齡)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선조 24년 사마시하였으며 선조 25년 임난에 장인인 김성일(金誠一)휘하에서 서기(書記)를 맡고 대책에 계책을 내놓은바 컸다. 공은 선조 32년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를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으며 경주, 의주 등 삼부윤을 거쳐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내고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장곡공 태일선생 벼루


김상헌
(金尙憲)이 지은 신도비명에 공은 10세에 성인과 같고 시구에는 자신을 경계하는 것이 많았다. 백담선생에게서 수학하는데 총명하고 영오(穎悟)하여 범인을 초월하였다. 23세에 진사시하고 고을에서 문서를 작성하는데 중국인이 관련되어 서애가 공의 글을 채택하고 극찬하니 그 소리가 널리 퍼졌다. 영덕현령으로 보임된지 4년 거듭 풍년을 맞으니 상은 어의를 내리고 홍문과 교리를 내렸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다시 사헌부 집의 홍문관 응교를 지내고 선조가 승하하자 국장도감의 도난청(都郎廳)으로 국장을 끝내자 통정대부로 풍기군수로 전보하였다. 후에 경주부윤으로 나갔는데 경주는 탐관오리들이 있어 학정(虐政)에 백성들이 시달리고 있었다. 공은 공물을 중지하고 부로(父老)를 존경하며 백성의 교화에 힘쓰며 향중의 자제들을 모아 강독(講讀)을 진작시켰다. 다시 입조하여 호조참의가 되었다. 어버이 봉양을 위해 외직을 원하니 영해부사로 나갔다. 부친상을 마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는데 사환(仕宦)의 뜻이 없었다. 인조가 즉위하자 좌승지로 제수되고 노모 봉양을 위해 전주부윤으로 나갔다. 백성을 다스림을 경주에서와 같이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또 충주목사로 나갔는데 역도(逆徒)들을 잡는데 지혜로 체포하고도 자신의 공으로 삼지 않으니 상이 1계 특승하여 전라도 관찰사에 보임시켰다. 이어 대사간(大司諫), 현조참판(刑曹參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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