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사(判決事) 묵암공(黙菴公) 탁(卓)[종보455호201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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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938회 작성일 13-04-01 15:00본문
묵암공은 복야공파 예천군(醴泉君) 휘 계용(季容)의 7대손으로 선친은 월곡공(月谷公) 종(鍾)이며 학행이 있었고 조부는 길원(吉元)이다. 공은 중종 39년 선산의 월동에서 태어나 조부 길원의 묘소가 흥부원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조부 때에 김해(金海)의 흥부원으로 이주해 산 것으로 추정하는데 흥부원은 현재 김해시 흥동이다. 공은 호를 묵암(黙菴)이라 하고 학문이 높아 향당의 추중을 받았으며 난세에 장군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무예와 지략을 갖추었다.
[사진1] 현충사(경남 김해시 흥동 산20-3)
공이 49세 되는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부산 동래성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김해부사는 고을을 비우고 도주하니 왜병은 무혈 입성하였다.
읍성에서 10여리에 살던 공은 고을 백성을 수습하여 의기를 세우고 창의하여 김해성을 탈환하여 견고히 지켰다. 공은 상당기간 김해부를 장악하고 웅거하면서 여러 해 동안 항전하였다.
[사진2] 현충사 구지
1593년 9월 남쪽으로 후퇴한 왜적이 생포한 우리 백성들을 배에 싣고 왜국으로 달아나려 하니 선조가 국문교서를 내려 남도의 장수들에게 유시하여 “이 글을 가지고 적진에 들어가 나의 백성을 구출하라” 하였으나 적세가 강대하여 제장들이 두려워 하여 성지를 받들어 나갈 자가 없었다. 이때 공이 분연히 일어나 장사 수십인을 뽑아 양산강구(현 구포)에 있는 왜군진영으로 들어가 납치된 동포의 친척이라고 속이고 석별의 정을 나눈다고 하면서 교서를 읽고 왜군 수십인을 참하고 남녀 100여명을 배에 싣고 돌아왔다.
[사진3] 선조대왕 어서(어서각에 보존되어 있다)
어서(御書)의 요지는 백성들이 소굴에 숨어 반은 비도(匪徒)이고 반은 의병처럼 행동하며 조정의 명에 응하지 않는 자들이 많아 이들을 효유하는 내용으로서 ‘백성에게 이르는 글이라 임금이 이르사되 너희가 처음에 왜에게 후림은 너의 본 마음이 아니라 왜에게 편들었던 것이니 그런 의심을 먹지 말고 서로 권하여 다 나오면 너희들을 죄주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외왜의 일을 자세히 알아 오거나 더불어 나오거나 이러한 공이 있으면 양천(兩賤)은 물론하고 벼슬도 줄 것이니 전에 먹던 마음을 버리고 나오너라 이 뜻을 각처의 장수들에게 알렸으니 감히 의심 말고 모두 나오너라 --중략--당병이 황해도, 경상도에 있고 왜가 건너가면 우리가 배를 합하여 왜국으로 들어가 분탕 할 것이니 그때면 너희들도 빨리 죽을 것이니 너희가 서로 일러 그전에 쉬 나오너라’ 라고 되어 있다.
[사진4] 현충사 숭의문
11월 왜적은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여 공은 항전 끝에 읍성이 함락되면서 50세에 순절하였다. 공의 사후 120년이 지난 경종 2년 증손 재도(載道)등이 올린 상소가 주효하여 공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추증되었으며 김해시 흥동에는 현충사(顯忠祠)가 서고 묘정비가 세워졌으며
[사진5] 어서각과 교첨문(김해시 흥동 산 20-3)
어서는 1988년 보물 제 951호로 지정되어 어서각이 세워졌다.
현충사 비갈 표면에 「전성지공 활민지덕 허국충열 영세난훤 全域之功 活民之德 許國忠烈 永世難諼」의 전서가 있는데 이는 성을 온전히 지킨 공과 백성을 살린 덕이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허락한 충열을 영세토록 잊기 어렵다는 뜻으로 이지방 사람들의 공을 기리는 흠모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이 현충사는 일제시대 이후 여항(閭巷)의 집 틈에 끼어 파묻힌바 되었는데 1999년 국비와 도비로 후손이 기증한 부지에 이건하여 경남도문화재 3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림에서 주관하여 매년 향사를 올리고 있다. 공의 묘소는 김해시 흥동 유민산에 있다.
[사진6] 묵안공 휘 탁 묘소(김해시 흥동 유민산)
공은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이중(以中)은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이며 차남 이경(以經)은 호가 금산(琴山)으로 학행이 있었고 삼남 이시(以時)는 호가 운암(雲菴)으로 학행이 있었다. 손(孫)은 한민(漢民) 증 한성부좌윤, 득형(得衡), 정민(廷民), 흥민(興民)이며 증손은 재도(載道), 재수(載壽), 재만(載萬), 재원(載遠), 재공(載公), 재천(載天), 재평(載平), 재운(載運), 재후(載厚)이다.
[사진7] 묵암공 장례원판결사 묘비(좌: 구비)
현충사와 어서각은 김해시 흥동 산20-3에 있으며 현충사 보존회에서 1990.4.16 이건 준공하였다. 보존회장 김경용(金京龍)씨의 기념사에는 “우리고장의 성역인 현충사 어서각 이건을 끝내니 임난을 당하여 권탁장군은 포의(布衣)의 몸으로 선산에서 내려와 수성장을 자담하고 허물어진 성을 수축하고 병졸을 규합하여 이 고장을 지키다가 선조께서 효유하신 어서(御書)를 받들고 남녀 동포를 모두 구해내 왔습니다. 권장군의 살신성인하신 공훈을 길이 숭모하는 현충사가 철종 6년 이곳 유민산 기슭에 세워졌고 어서각에는 임금의 교서를 모신 뒤에 고종 7년 재건하면서 사림의 향배가 이어져 왔습니다. 1979년 어서각 및 현충사보존위원회가 구성되고 1988년 이건공사의 성역화를 하였습니다” 라 하였다. 부회장 오임환씨는 경과보고에서 그간 풍우천재와 주변인가 환경저해로 어서보존의 존엄성이 상실되고 1977년 어서 도난까지 당하였으나 다행히 도범자의 자수로 반환되어 재 봉안하고 1986년부터 이건을 추진하여 88년 이건을 완료하게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사진8] 어서각, 현충사 이건 기념비
승사랑 태능참봉 완산 유치호가 찬한 증 통정대부 장예원판결사 권공묘비문에는 “공은 명을 받들고 적진으로 들어가 왜적을 무찌르고 백성을 구출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높은 벼슬을 내리려 했으나 상처난 병으로 돌아가셨다. 경종 임인년에 3품벼슬을 내리니 후세 사람들이 공의 충열을 추모하여 가락성의 서족에 사당을 짓고 비석에 사적을 새겨 후세에 전하려고 공의 8세손 숙(淑)등이 오백리 길을 찾아와 비문을 청하는지라 행장을 살펴보니 휘는 탁(卓)이요 자는 사원(思遠)이며 안동인이라 키가 크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힘은 남보다 뛰어났다.
[사진9]경충재(김해시 흥동)
김해고을 강해(江海)의 요충이라 병사는 패잔하고 성(城)마져 함락당하니 군족들 두려워 하는데 공 혼자 수장(守長)이 되려 하네 모병하고 성을 높이 쌓고 진영을 복원하였네 삼경이 수복되니 적은 물가로 모여 우리백성 데려가려하니 임금께서 글 내리니 공만이 앞장서 분발했네 위장하여 염탐하여 사로잡힌 백성에게 왕의 교지를 주었네 왜적의 머리 마구쳐 섬멸하고 공도 칼에 찔려 모든 백성 함께 돌아옴이라 임금이 가상히 여겨 표창하려는데 상처가 심해 돌아가시었네 임금의 은덕이며 충신의 열열함은 남해처럼 아득하고 유민산처럼 높았구나 이 사적을 돌에 새겨 무궁토록 전하리라”
[사진10] 선조 국문교서 보물지정서(문화공보부 제 951호)
또 어서각 및 현충사 이건기념비에는 “전략-- 경종 2년 증손 재도가 공의 유사를 임금에 읍소하이 장예원판결사로 추증하였다. 순조 31년 김해부사 권복(權馥)이 공의 실기와 묘지명을 짓고 철종 6년 향인들이 흥동에 어서각과 현충사를 세워 공의 향사가 고종 7년 유림에서 재건하고 기문을 지었다. 그러나 규모가 협소하고 백여년 내려오며 풍우에 퇴락되어 성역다운 모습을 잃케 되었다. 1980년 어서각 현충사보존위원회를 구성하고 흥동 산20-3에 이건키로 하고 1989년 완공을 보게 되니 사적을 적고 명(銘)을 붙인다.
섬 오랑케 침범하여 열읍이 함락되고 남중(南中)의 민생들이 왜토로 끌려갈제 선묘(宣廟)의 교지 받들어 호혈(虎穴)에 잠입하여 백여명 생령을 꾀로서 구출했네 전대추숭(前代追崇)뒤를 이어 이건 끝내니 성조(聖朝)의 보물 교서 위에 모시고 림호산의 언저리 와우도 새로워라 영세토록 조두(俎豆)에 향사가 무궁하리
[사진11] 경남 김해시 현충사정로 표석
현충사기는 통정대부 김해도호부사 허전(許傳)이 썼는데 내용에 “공의 곧은 충성과 큰 의리는 해와 달처럼 빛나고 단청이 찬란하여 사람을 흥기하여 감동케 한다. 아! 장하시다. 공의 8대손 식(湜)과 호(濠)등이 대사헌 권복(權馥)이 지은 실기와 묘갈명이며 참봉 유치호가 지은 묘비를 가져와 청하기에 그 대개를 쓰노라” 하였다.
경충재기(景忠齋記)와 현충사 이건 상량문은 이우섭씨가 썼으며 이건 상량문
에 “장군별 떨어지니 시운의 불행이라 백년 공의 모아 제향 받들고 향중사림의 숭모정신 간절하다. 오랜 세월 사우가 후폐하고 문정(門庭)이 협책하여 이건하니 명당이 여기로다. 어서각이 엄존하니 어필(御筆) 더욱 휘황하다.” 라 하였다.
(자료제공: 후손 권이도, 편술: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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