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評理公 頙, 文坦公 漢功, 花原君 仲達, 宗正公 嗣宗(종보453호 20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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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881회 작성일 13-02-28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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評理公 頙

평리공은 복야공(僕射公)의 자 지문하성병부상서(知門下省兵部尙書)를 지낸 자여(子輿)의 아들이다. 평리공은 고려 원종과 충열왕조사람인데 공의 상세한 벼슬과 무덤을 잃어버리고 다만 고휘(古諱)가 윤의(允宜)이고 벼슬이 금자광록대부첨의평리(金紫光祿大夫僉議評理)라는 기록만 알려있다. 아들은 일재선생 문탄공(文坦公) 한공(漢功)으로 고려사 열전에 입전(立傳)되었으며 한유(漢有)는 벼슬이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로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사진1 평리공 단소(예천군 지보면 신풍리676-2)


2006년 후손 五燁, 宗鉉, 寧沃, 奇德, 淸一이 역사를 주선하고 海鏗이 요청하여 명(銘)하니 경북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676-2에 평리공, 문탄공, 종정공 3대의 단소를 설하고 비를 세웠다.

“집안 번창함은 근원이 있었기에 덕을 쌓은 것이 두텁지 않았다면 어찌 후손들이 은혜로웠으리요. 첨의(僉議)권공은 여말에 크게 빼어나셨도다.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을 넉넉케 하고 문호(門戶)를 크게 여셨네, 아들이 현저(顯著)하여 집안을 창대(昌大)케 하셨네, 자손들이 대대로 혁혁하여 번창했네, 산소를 수호하지 못했으니 사모함을 어디에 붙이이리오. 화봉산 언덕은 증손의 무덤인데 한 기운 통함에 단소의 땅이 적합하도다. 비명(碑銘)을 지어 이로써 그 자취를 빛내노라”(허호구, 이상 大義)

一齋 文坦公



사진 2 문탄공 휘 한공 단소(지보면 신풍리 평리공 계하)


문탄공은 고려 충렬왕 28년에 문청공(文淸公) 권단(權㫜)이 장시(掌試)한 문과에 급제하여 동 20년 태자를 따라 원나라에 다녀와 충선왕 1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고 동 3년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이어 첨의정승(僉議政丞)이 되었으며 동 5년에 지공거(知貢擧)임을 맡았다. 충숙왕 1년 찬성사 권보(權溥)와 도감사 이진과 함께 성균관에서 중국에서 들여온 서적을 고열하였다. 충숙왕 2년 원(元)에 다녀오고 4년 연경궁에서 왕의 사연(賜宴)을 받으며 시를 지었다. 동 6년 원제(元帝)의 명으로 익재와 함께 절강성을 돌아보고 수행록을 썼다. 충선왕 양위(讓位) 후 원에 가 이제현과 같이 만권당(萬卷堂)에서 독서하며 문명을 떨쳤다. 공은 충선왕을 보필한 공으로 추성동덕협찬공신에 녹훈되고 충숙왕 11년 삼한벽상삼중대광 첨의우정승(僉議右政丞)으로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에 봉군되었다. 충정왕 1년 침실에서 졸하니 문탄(文坦)의 시호를 받았다.


사진 3 문탄공 신도비


일재집을 남겼으며 시문에 조예가 깊어 청구풍아(靑丘風雅)에 많이 올랐다.

충선왕이 토번(吐藩)에 유배되어 있을 때 “그대를 생각하니 정감을 잊을 수 없다.” 또 “개경을 떠나 만리를 걸어왔던고 갖은 고초 꿈결같이 겪고나니 님 생각 슬픈 회포 어찌 다 이길 수 있을까” 하니 군신의 의리를 상상할 수 있다. 또 익제선생과 감로사(甘露寺)의 다경루에 올라 운(韻)하니 “나라가 망했으니 연기는 옛 보루에 남아있고 금초의 종소리는 높은 누각에 우렁차네” 라 하니 전쟁의 참화가 가시지 않는 때 우국의 마음이 이와 같았다. 선생은 여섯 임금을 섬긴 원로에 50 여년을 현노(賢勞)하고 지위가 삼상에 이르니 공자가 이르되 ‘임금이 되기도 어렵고 신하가 되기도 어렵다’는 말은 이를 두고 이르는 말 갔다.

공은 화원군 중달(仲達), 동고공 중화(仲和), 중염(仲炎), 중산(仲山), 가봉(可封) 5남 7녀를 두었으며 봉군을 받은 이가 11인이다.

花原君 忠憲公 仲達


사진 4 충헌공 휘 중달 묘소(정읍시 금구면 상리)


화원군은 호가 유암(柳菴)이다. 원에 가 원제의 선수(宣授) 명위장군으로 제군만호부 만호(萬戶)가 되었다.

고려에서는 추성정책안사공신으로 녹훈되고 종 1품 삼중대광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고 화원군(花原君)에 책봉되었다. 졸 후 충선왕이 충헌(忠憲)의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정읍 금구면 상리에 있으며 실전되었다가 정조 5년 지석을 발견하여 부인 철원윤씨 후손 창현이 묘비문을 지어 입석하였다.

아들은 판종정시사 사종(嗣宗)과 전법판서 예천군 계용(季容) 그리고 5녀를 두었는데 4녀는 목은 이색(李穡)에게 출가했다.


사진 5 충헌공을 위한 재사 모원재(묘소 아래)


묘지옆에 화원군 재사인 모원재(慕遠齋)가 있으며 모원재 강의록 서문을 공의 18세손 권상적(相迪)이 찬하였는데 그 요지는 이러하다.

전라도 금구고을 악양상리에 우리 선조 충헌공의 묘가 있어 아래에 모원재가 있고 재실에 권씨 송씨강의록이 있으니 여산송공 휘 계일이 호남의 이름난 집안인데 우리 충헌공의 사위 목은 이문정공(색)의 외손으로서 송공이 이웃 마을을 지나다가 배광신 그가 집을 고치면서 뒤안을 파다가 옛 무담아래에서 한 비를 얻었는데 비면에 충헌공 화원군의 묘라는 제목이 있는지라 광신이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갑자기 딴데로 옮겨 감추어 묻는지라 송공이 말하기를 이 묘가 발견된 것은 하늘인데 하늘은 거스릴수 없다 하고 영남 우리 본손에게 알렸다. 우리 여러 종중이 바로 달려가 관가에 고발하니 송공 실인을 찍힌 증거를 첨부하였다.


사진 6 화원군 묘비와 모원재


법관이 비로소 송공의 속세에 곧은 도리를 품고 이름난 어진이를 유택에서 지키는데 감동하여 드디어 이치에 맞게 엄중히 심문하니 광신 또한 매맞아 죽고 그 동생 광택이 이어 자수하였다. 이에 일이 크게 풀려 이 비를 묘앞에 찾아 세우고 빠진 글자를 완전히 복구함으로 써 고려조에서 우리 할아버지의 깊은 학문과 위대한 공적을 가상하여 시호를 내려 예로 장사하고 위토와 사패를 소유하고 무덤을 지키는 다섯집을 두고 묘사에 이바지할 모원재를 지어 고직이를 두고 다시 멀고 가까운 여러 자손이 각각 옛날 같이 성묘하고 때 맞추어 묘사 올리고 예로써 옛날로 돌아갔다.

송공은 참으로 의사요 군자로다.

또 산청문화원장 정태수(鄭泰守)의 기록에 ‘무릇 뿌리없는 나무가 없듯이 인생에서 선조를 위하여 숭조보본하는 일은 가장 보람있고 후세에 길이 귀감이 될 것이다. 시경(詩經)에 무념이조(毋念爾祖)아 율수궐덕(聿修厥德)이라 하였다.


사진 7 모원재 이건기와 정화실기


단계에 세거하는 안동권씨 참봉공파 충강공계(忠康公系) 사장 台赫씨는 천성이 순수하고 효심이 간지하며 모선(慕先)의 정성이 지극하여 금구 화원군 충헌공(花原君 忠憲公) 묘역의 정화사업에 거금을 독담하여 여러 종원들의 모해(模楷)가 될 뿐 아니라 숭조사상을 고취시키는 표상이 되고 있다. 충헌공 묘소가 실전되어 영조병자(英祖丙子) 금구상리에서 호남인 송계일(宋啓日)이 지석(誌石)을 발견 후 25년 묘소를 수치하고 석물을 설치하며 위토와 수호관리자를 두고 춘추에 제사를 받들어 왔다. 우용공(宇容公)의 금구기행록(金溝紀行錄)에 광무8년 (1904)에 모원재(慕遠齋)를 준공하였다. 충헌공 묘비문은 알공(焥公)이 찬하였고 묘도비명은 창현공(昌鉉公)이 명(銘)하였다.’ 하였다.

종정공계(宗正公系) 파조인 사종(嗣宗)


사진 8 15세 종정공 휘 사종 단소(지보면 신풍리)


공은 정3품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종정시사(判宗正寺事)에 이르렀고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공조전서를 지낸 판사공(判事公) 집중(執中)이고 차자는 우왕 6년 병과 급제하여 상주목사를 지낸 집경(執經), 삼자는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지낸
예빈공(禮賓公) 집지(執智), 4자는 영남 서부일대에 세거하는 계파조 군기감정(軍器監正)을 지낸 감정공(監正公) 집덕(執德)과 2녀가 있다.

예천군계(醴泉君系) 파조인 계용(季容)은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냈고 아들은 남천부사를 지낸 장자 총(總), 목사(牧使)인 차자 수(綏), 3남 부(孚), 4남 완(緩)은 우왕 8년 문과급제하고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참찬에 올랐으며 세종의 영릉(英陵) 신도비음기 찬에 참여하였다. 5남은 윤(綸)이다.

16世 예빈공(禮賓公) 집지(執智)는 하동현감을 지낸 영창(永昌), 진사 영선(永善), 군수를 지내고 이조참의에 추증된 영화(永和)와 4녀를 두었다. 영창은 치명(致明), 치경(致敬)을 두고 치경은 의금부 경력을 지낸 관(寬)을 두었다.



사진9 경력공 관의 묘소(정읍시 고부군 금정면 내탄동)


17世 영창(永昌)
의 손 19세(世) 관(寬)은 의금부 경력(經歷)을 지냈다. 묘소는 정읍시 고부의 금정면 내탄동에 있으며 묘하게 경모재가 있다. 관의 손 만영(萬英)은 중종 2년에 출생하여 중종 38년 식년시 급제하였다.

관의 아들은 사형(士衡)이고 사형의 아들 만영(萬英)은 중종 2년에 출생하여 중종 38년 식년시 급제하였다.


사진 10 경력공을 위한 재사


영선(永善)
은 치중(致中)을 두고 손자는 형의공(刑議公) 인손(仁孫)이며 인손은 성종 6년 친시문과 급제하여 호조참의에 이르고 좌찬성으로 추증되었다. 성종 25년 함흥군수로 나가 선치(善治)하였다고 한다.

영화(永和)는 군수로서 손자 대사헌(大司憲)공 경우(景祐)가 귀히됨에 따라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사진11 경력공 합동재단(정읍시 고부군 소성명 외탄동 군부대뒤)

21世 만영(萬英)의 아들은 준(俊)이고 준은 극시(克時),극화(克和), 극중(克中)을 두었다.


사진 12 23세 초산공 극시 묘소(소성면 외탄동)


23世 초산공(楚山公)
극시(克時)의 호는 초산(楚山)이며 선조 10년에 출생하여 주부(主簿)가 되었다.

극시는 6아들 2녀를 두었는데 장자는 상하(相夏)이고 차자 상훈(相勛)은 인조 13년 증광시 진사 합격하여 후학을 기르니 문하에 우의정 충헌공 이숙(李䎘)과 이조판서 문정공 이익(李翊) 등이 배출되었다. 묘소는 순창 복흥 서미리 갈치에 있다. 또 4남 상규(相奎)는 고부인으로 광해 4년에 출생하여 효종 3년 증광시 합격하였다.

23세 청하공(靑霞公) 극중(克中)


사진 13 청하공 극중 묘소(고부군 소성면 외탄동)


만영의 손
극중(克中)은 호가 청하자(靑霞子)이며 선조 18년 고부에서 출생하여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광해 4년 식년시 진사로 합격하였다. 6세에 신동(神童)으로 불렀고 초학을 석계 최명룡에게서 배우고 장성의 현주 조찬한(趙纘韓)에게서 배웠으며 석계의 추천으로 사계에게서 배우며 중용(中庸)을 설하니 사계는 “내 평생 듣고 얻은 것이 이 말에서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인목대비의 유폐를 보고 통곡하며 두문불출하며 독서와 후학 훈도에 힘썼다. 기옹 정홍명(鄭弘溟), 택당 이식(李植), 석주 권필(石洲 權韠), 상촌 신흠(申欽)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효종 10년 졸하니 향년 75세였다. 유고로 청하집 8권을 남겼으며 서문은 동명 정두경(鄭斗卿)이 쓰고 행장은 도암 이재(陶庵 李縡)가 지었다.


사진 14 극중을 위한 서산서원 유허지(정읍시 이평면 팔선리)


유림의 발의로 정읍시 이평면 팔선리에 서산서원(書山書院)을 세워 제향하였다. 묘소는 정읍시 고부군 소성면 외탄동에 있다.

<감수: 권영평회장 편저: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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