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순례 39] 東峯公 諱 克立과 立巖書院 (종보 제399호 200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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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611회 작성일 12-04-30 15:39본문
[유적지 순례 39] 東峯公 諱 克立과 立巖書院 |
「기만영봉(奇巒靈峰)이 참차열립(參差列立)하여 신묘한 자태를 드러내고 청류격단(淸流激湍)이 굽이굽이 감돌아 맑은 정취를 자아내는 환경이 마치 造化翁이 특별한 기교로 만든 별천지인 듯한 立巖은 權先生이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한 곳으로 자손들이 世居하고 명덕(名德)이 이어진 勝地이다」동봉공 유허비명에 새겨진 입암의 예찬 글이며 입암서원 약설(略說)에는 「동천(洞天)이 활짝 트이고 자호천 맑은 물 굽이도는 기슭마다 기암괴석들이 창공에 솟아 고색이 창연한 여기가 安東權氏 세거지이며 입암(立巖)이라」 하였다. 영천호를 끼고 자호천을 굽이굽이 돌아 죽장면 입암리에 이르니 산세가 수려한 곳에 입암서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
입암서원(포항시 죽장면 입암리)경북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70호 동봉공(東峯公) 휘 극립(克立)은 복야공파 20世로서 영의정을 지낸 문절공(文節公) 휘 중화(仲和)의 6대손이며 총제공 휘 방위(邦緯)의 5대손이고 충렬위 부사정을 지낸 공의 증조 균(勻)이 영천으로 이거하였다. 공은 명종 13년 3월 영천군 북아천리에서 울산훈도를 지낸 해(諧)의 독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애친경장(愛親敬長)의 도리를 알았으며 주귀봉(周龜峯)선생에게 사사하여 학문과 덕행이 숙취(夙就)하였다. 선조 10년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하고 선조 19년 동시에 장원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오직 학문에만 힘썼다. |
입암서원 강당(죽장면 입암리 178번지) |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솔을 이끌고 용화촌으로 피난하였다가 천석(泉石)이 아름다운 입암(立巖)을 찾아 정착하였으며 산중에서 의병의 진중에 왕래하면서 왜적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다. 1596년 청송에 피난 중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대사헌, 공조판서)에게 입암에서 함께 살기를 청하니 막역한 친구인 여헌이 정우헌(鄭遇軒) 정수암(守菴)형제와 함께 와서 우거하게 되었으며 먼저 도착한 손륜암(孫綸庵)과 서약하였다. 장선생은 사우(四友)라 하였으며 매일 도의(道義)를 강론하였다. 여헌이 입암을 중심으로 28경에 이름이 지어졌고 난리가 평정되자 각기 귀향하였는데 동봉공만 영주하여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
입암서원 묘우(여헌 장현광, 동봉 권극립등 5위 배향) |
공은 금서(琴書)와 석천(石泉)으로 뜻을 추구하고 덕을 쌓으려하였거늘 약관 54세에 병을 얻어 고종하여 이동 매봉 오향원에 안장하였다. 공이 창의토적(倡義討賊)한 사적을 조정에서 알고 선조 38년 작성한 선무원종공신록에 의병장으로 되어 있어 인조 3년 가선대부 工曹參判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으로 증직되었다. 공의 졸 후 장선생이 제문(祭文)에 「품은 바는 충신의 덕이었고 지킨 바는 정고(貞固)한 지조였으니 옥돌 속에 숨겨진 구슬이요 홑옷 속에 감춰진 비단 옷」이라 하였으며 당시 제현들은 모두 숙덕중망(宿德重望)으로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의 뛰어남을 말하였고 사림들이 서원을 세워 여헌을 주벽으로 위 사우(四友)등 5위분을 배향하였다 |
탁입암과 일제당(좌측 卓立巖은 높이 20m, 둘레 15m) |
공은 1남 4녀를 두었는데 독자 봉(崶)은 선조25년 출생하여 수직으로 부호군(副護軍)을 받았다. 공의 아들 봉은 호는 성재(省齋)이며 旅軒의 십철(十哲) 중 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여헌선생에게서 수학하고 약관 20세에 부친이 고종하자 집안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여헌선생 뒷바라지를 다하였으니 사문기문록(師門記聞錄)에 기록되어 있다. 성재공은 만년에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일로 삼아 사람들은 지상의 신선이라 하였으며 성재집을 남겼다. 80세에 수직으로 통정대부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었다. |
일제당(동방인 우란재에 동봉공이 거처했다.) |
동봉공과 성재공이 평생 학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문이 별로 남지 않았는데 원래 성재공의 유문이 상당한 분량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손자 목(穆)이 증조부 동봉공 글과 함께 보관했다가 화재로 인하여 소실 되고 또 화재시 목(穆)은 공의 비위(妣位) 신주를 안고 참화를 입어 나라에서 효자 정려 (旌閭)가 내렸다 |
동봉공 유허비(입암서원 자측에 수갈) |
동봉공의 孫으로는 장남 우당(愚堂) 상민(尙敏)은 광해3년 출생하여 여헌의 문인으로 효행과 병자호란시 창의하였으며 현종12년 졸하여 고조묘하에 장례하였고 정중기가 묘지를 지었다. 암재(巖齋) 호민(好敏)은 광해 6년에 출생하여 여헌의 문인으로 효행이 있고 현종13년에 졸하였다. 사성(師聖) 구민(求敏)은 광해12년에 출생하여 현종3년에 졸하였다. 사성의 子 목(穆)은 효자 정려를 받았다. 유성(由聖) 진민(晋敏)은 인조 1년에 출생하여 역시 여헌의 문인으로 효종8년 식년시 급제하여 성균생원(成均生員)이고 숙종23년 졸하였다. 모성(慕聖) 무민(務敏)은 인조4년에 출생하여 현종12년 졸하였다. 태민(泰敏)은 가선대부 동지의금부사 도총관(都摠管) 오위장(五衛將)이다. |
후면에서 본 입암서원 전경 |
입암서원 마을 앞 강두(江頭)에 20m 높이 깎아지른 입석바위로 인해 마을 이름이 立巖이 되고 수령 400년 거목 사이에 동봉공 휘 극립을 비롯한 위 5위 분을 배향한 입암서원은 효종 8년에 건립하여 고종 5년에 강당이 훼철되고 순종 원년에 묘우가 소실되었으나 1913년 강당을 복원하고 1972년 묘우를 복원하였으며 1986년 경북지방문화재기념물 제 70호로 지정되었다. |
영모당 : 동봉공 후손들이 종사를 의논하는 집(죽장면 입암리) |
입암서원의 부속건물로는 만활당(萬活堂-장현광선생의 거처)과 일제당(日躋堂)이 있다. 일제당은 탁입암(卓立巖) 옆에 위치하며 1600년 건립하였다. 일제당 동방인 우란재(友蘭齋)에는 동봉공과 정우헌이 거처하고 서방인 열송재(悅松齋)에는 손륜암, 정수암이 거처하였는데 공은 오직 독서하고 이치를 궁리하는 것을 급선무로 몸을 닦고 성을 기르는 것이 본분임을 알아야 하며 젊어서 부지런히 배우고 노력해서 위로 우러러 보거나 아래로 내려다 봐도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입암정사기에서 강조하였다. |
종택(죽장면 입암리) |
서원 경내는 서원 본당인 강당, 뒤로 사당인 묘우 그리고 묘우 옆에 포사가 자리하며 서원 좌측으로 동봉공 유허비가 있다. 마을에는 동봉공 극립(克立)의 별서(別墅)로서 자손들이 문사를 의론하는 영모당(永慕堂)과 오로정(五老亭), 입암종택이 있으며 서원앞 냇물가에 노계 박인노 선생의 시비가 있는데 입암 29곡을 노래한 것이다. |
여현 장현광이 거처이 거처한 집(입암리) |
<자료제공 : 權泰銖 立巖書院有司 , 기사 : 賢奉 權景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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