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우공(石愚公) 재두(載斗)와 송산공(松山公) 재규(載奎) (종보465호20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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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606회 작성일 14-02-25 11:55본문
서주공(西州公) 장환(章煥)
공은 우천공(愚川公) 극유(克有)의 9대종손으로 선고는 병천(秉天)이며 순조 30년 단성 강누리에서 출생하여 일생동안 우암(尤庵)을 흠모하고 고종 26년 60세에 학행으로 추천받아 통사랑 수봉관에 제수되었다. 문집을 남겼으며 묘소는 단성면 교동에 있다. 아들 재두가 행장을 지었으며 최익현이 비문을 지었다.
석우공(石愚公) 재두(載斗)
석우공은 우천공(愚川公) 극유(克有)의 10대종손으로 서주(西州) 장환(章煥)의 장자로 철종 2년 단성 강누리에서 태어났다.
1. 석동정사 : 산청군 단성면 강누리 교동
호는 석우(石愚)이다. 공은 우암(尤庵)의 학문을 따르는 것이 가학(家學)임을 강조하면서 빼어난 학행으로 아우 재규(載奎)와 더불어 명성을 날렸으나 장손으로 집안을 일으키기에 힘썼으며 사후에는 아들 봉현(鳳鉉)이 대신하였다. 산청군 단성면 교동에 석동정사(石東精舍)가 있으며 문집을 남겼다. 묘소는 교동 선영에 있다. 권운환이 행장을 짓고 기우만이 비문을 지었다.
강누리는 우천공이 들어와 터전을 잡고 스스로 어리석다고 하여 호를 우천으로 정하고 후학을 기른 우천정사가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우암 송시열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이곳을 지나다 강성벽을 보고 남명(南冥)의 시구에서 따온 적벽이란 글자를 강벽에 썼다고 하여 이곳을 적벽이라 불리기도 한다. 번암 채제공은 단성에 지내면서 단구록(丹丘錄)을 남겼다.
2. 인곡서당 : 산청군 단성면 강누리
1889년 서주공 장환(章煥)이 월고 등과 뱃놀이한 모습이 시에 보이고 1901년 노사집 중간(重刊)을 위해 신안정사(新安精舍)에 모인 이후 영호남 유림들이 뱃놀이 한 모습이 있다. 이처럼 강누리는 안동권씨와 성주이씨가 노론의 주요 거점인 신안정사 건립을 주도하면서 명사들이 많이 찾아오게 되었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된 뒤 석우공(石愚公)은 아우 재규(載奎)가 정재규의 의병모집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정재규에게 편지를 보내 대응책을 논의하였다.
송산공(松山公) 재규(載奎)
서주공(西州公) 장환(章煥)의 둘째 아들로 고종 7년 단성 강누리 교동에서 태어났다.
3. 인곡서당 전경
4. 인곡서당 경현사
호는 송산(松山)이고 노백헌(老栢軒) 정재규(鄭載圭)의 문인으로 경학(經學)에 정진하였다. 빼어난 문장과 학행은 서부영남의 거유(巨儒)로서 일세의 추앙을 받았다. 수많은 시문과 금석문(金石文)을 남기고 후학을 길러 학맥을 이었다.
그러나 송산공(松山公)은 을사조약 이후 신학교가 생겨 구학 서당이 학생수가 줄고 황폐화되어감을 한탄하면서 머리를 기르고 옛 복장을 하지 않으면 배움은 거짓되고 실심(實心)이 아니라고 하였다. 19세기 후반 경상 우도 지역은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의 학풍이 유행하였다. 이중에 핵심적 인물이 송산공(松山公)이다. 노론(老論) 기정진의 문인은 남명 조식의 후손과 상암 권준(權濬)의 후손이 단성에서 세를 이루었으니 이들 단성, 산청 등 노사학파(盧沙學派) 인물들은 주희(朱熹)와 송시열의 영정을 모신 신안정사인 이곳을 강학처로 자주 회합을 하였다.
4. 이당선생 숭모비
6. 이당선생과 제자들 : 1930년 신안정사에서
재규의 호는 송산(松山) 또는 이당(而堂)이다. 공은 권운환, 이도복, 한유 등과 노사학을 심화시키고 성(性)의 이일분수(理一分殊) 전개양상과 이기(理氣)설을 활발히 토론하였다.
공은 1914년부터 강학활동에 전념하여 많은 문도를 배출하였다. 그 명성을 듣고 찾아온 학생들이 많았으며 몸가짐이 바를뿐만 아니라 학문이 깊어 문도들이 넘치자 1915년 소천정(昭泉亭)을 짓고 1934년에는 다시 인곡서당(仁谷書堂)을 건립하여 천여명에 달하는 많은 문인들을 배출하니 일대 뿐만 아니라 멀리 합천, 진주, 하동, 호남 등에서 찾아왔다. 또한 공은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철저히 실천하였으며 일제치하에 일제 정책을 따르지 않고 공맹(孔孟)과 정주(程朱)의 도를 우선하였다.
7. 이당 묘소 : 산청군 단성면 신안정사 후산
1952년 83세로 졸하니 묘소는 단성 신안의 신안정사 뒤 조부묘 아래에 있다. 유고로 송산집 23권을 남기고 사림과 후학이 경현사(景賢祠)를 세우고 제향을 받들고 있으며 영정이 모셔있다.
(자료검토 : 인곡서당 內任 權載炯 기사 :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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