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순례53] 僕射公 諱 守洪과 判書公 諱 靷 (종보 제418호 20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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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843회 작성일 12-04-30 15:42본문
[유적지 순례53] 僕射公 諱 守洪과 判書公 諱 靷 |
복야공(僕射公)은 보승별장호장중윤(保勝別將戶長中允)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증직 받은 중시(仲時)의 차남으로 관직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서좌복야(尙書佐僕射)에 상장군(上將軍)을 겸하였다. 공이 조정에 출사한 이후 한평생 내란과 몽고의 침략으로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는 국가를 구하고자 안으로는 현상(賢相)이며 밖으로는 명장(名將)의 역할을 다 했으리라 보여 진다. 공의 품계인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는 고려의 문물제도가 완비되는 문종 때 정3품의 위계였으나 공민왕 때에는 정2품이었으므로 상서좌복야(尙書佐僕射)의 관직과 일치한다. 좌복야(左僕射)란 벼슬은 각 왕조별로 그 역할과 권한이 다르게 변천하였으나 당, 오대, 송나라 시대에는 상서성에 속하여 문하성의 장(長)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겸임하여 명실공이 좌복야(左僕射)가 곧 좌승상(佐丞相)으로 재상이었다. 당시에는 복야(僕射)가 재상(宰相)이란 뜻으로 쓰였고 공의 추밀원부사직(樞密院副使職)은 정3품 관직의 장관급으로 왕명(王命)의 출납, 궁중의 숙위(宿衛), 군사기밀 등을 맡아보았다. |
복야공 단소(안동시 서후면 교리) 공의 독자(獨子)인 자여(子輿)는 관직이 종1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병부상서(兵部尙書)였다. 손자로 ੑ (척)의 관직은 종1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첨의평리(僉議評理)이고, 윤평(允平)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증직되었고, 윤보(允保)는 중문지후(中門祗侯)였고, 조여(祖如)는 정1품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份(빈)은 중문지후(中門祗侯)를 지냈다. 공의 5세손은 다시 11개 계열로 나누어지는데 사종(嗣宗)은 복야공(僕射公)의 종손(宗孫)으로 정3품 정순대부판종정시사(正順大夫判宗正寺事)로 종정공계(宗正公系), 계용(季容)은 단성명량찬화공신(端誠明亮贊化功臣)이며 종2품 봉익대부(奉翊大夫) 여천군(呂泉君)에 올라 여천공계(呂泉公系), 방위(邦緯)는 도총제(都摠制)로 총제공계(摠制公系), 인(靷)은 예의판서(禮儀判書)로 판서공계(判書公系), 천생(天生)은 봉사(奉事)로 봉사공계(奉事公系), 자후(子侯)는 사재시정(司宰寺正)으로 사재공계(司宰公系), 시중(時中)은 문과에 장원하고 지서주사(知瑞州事)로 서주공계(瑞州公系), 추(錘)는 소윤(少尹)으로 소윤공계(少尹公系), 근중(近中)은 직장(直長)을 지내고 교리(校理)에 올랐으며 직장공계(直長公系), 중(重)은 하양현감(河陽縣監)을 지냈고 하양공계(河陽公系), 문칭(文稱)은 호장동정(戶長同正)을 지냈으며 동정공계(同正公系)로 각각 갈리었다. |
복야공 신도비 |
공의 후손이 번성하여 이제 수십만을 헤아리고 경향각지와 해외에까지 번창한데도 공의 묘소를 실전하여 제향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1994년(갑술) 후손들이 뜻과 정성을 모아 시조 태사공의 묘소에서 멀지 않은 곳인 공의 5세손 판서공(判書公) 인(靷)의 묘역 송야산(松夜山)에 설단(設壇)하여 4월 5일(음2월 25일) 청명 한식일에 준공고유 및 신도비 제막식을 가졌다. 신도비각(神道碑閣)은 2004년(甲申) 11월 13일에 준공고유제를 봉행하였다. 判書公 諱 靷 |
송파재사 (안동시 서후면 교리) |
공은 복야고의 5세손이며 증조의 휘(諱)는 윤평(允平)이고 증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이며, 조부의 휘(諱)는 구(具)로 흥위위(興威衛) 보승호군(保勝護軍)이며 선고(先考)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휘(諱) 세진(世珍)의 독자이다. 공민왕 23년(1374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청백으로 발탁되어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오르고 가선대부검교한성부윤(嘉善大夫檢校漢城府尹)을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관성황씨(關城黃氏) 전객령(典客令)인 지현(之鉉)의 딸이고 묘소는 안동시 서후면 교리 송파(松坡)에 건좌(乾坐)로 합폄(合窆)하였고 묘비는 11대손 승서(承緖)가 세웠으며 재사 좌측으로 신도비를 세웠는데 신도비문은 18대손 상규(相圭)가 지었다. 아들은 창신교위(彰信校尉) 응양위(鷹揚衛) 중령중랑장(中領中郞將) 휘(諱) 후(厚)가 있고 딸은 정랑(正郞)인 손순백(孫順伯)에게 출가했다. |
판서공 휘 인의 묘소(서후면 교리) |
손자 휘(諱) 계경(啓經)은 선교랑역청하횡성현감(宣敎郞歷淸河橫城縣監)을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증직되었으며 묘소는 판서공 계하에 있다. 현감공은 개(玠)와 곤(琨)을 두었는데 개(玠)는 태종 16년 출생하여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신교위부사정(彰信校尉副司正)이 되었으며 아우 곤(琨)과 화산우향계(花山友鄕稧)를 조직하고 서거정(徐居正)과 시가계축(詩歌稧軸)을 만들다 미완하였는데 장자 숙형(叔衡)이 대신하였다. |
판서공 신도비 |
송파재사(松坡齋舍)는 안동시 서후면(西後面) 교리(校里)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로 복야공 단소와 판서공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묘소 아래에 1743년 8칸으로 창건하였다가 1748년 ㅁ자형으로 중창한 목조와가이며 대청과 서재는 건축연대를 가름할 수 있는 귀중한 양식(樣式)이다. 재사에는 「송파재사(松坡齋舍)」라는 현판과 13세손 범조(範祖)가 쓴 중창기, 18세손 정일(正鎰)이 쓴 중수기와 비각기(碑閣記)가 게판(揭板)되어 있다. 2001년 11월 1일 경북유형문화재 제32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 8월 8일 국비와 지방비로 중수된 사묘재사이다 . 吏判公 諱 琨 |
선락장군 곤의 묘소(와룡면 태리 |
자는 가진(可珍)이며 판서공(判書公) 휘(諱) 인(靷)의 증손으로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 휘(諱) 계경(啓經)의 차자이다. 세종 9년인 1427년 정미(丁未)에 출생하여 호군(護軍)의 관작(官爵)을 받았다. 호군(護軍)은 조선조 때 오위(五衛)에 딸린 정4품 벼슬로 현직이 아닌 문관, 무관, 음관(蔭官)에게 주던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덕망 있는 분들과 우향계를 맺고 교유하니 향당부로(鄕黨父老)의 칭을 받아 진고지향(眞古之鄕) 선생이 되었다. 연산군 8년인 1502년 임술에 76세로 졸(卒)하였는데 손자 충정공(忠定公) 휘(諱) 벌(橃)이 귀히 됨에 따라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 추증되었다. 공은 형 사정공(司正公) 휘(諱) 개(玠)와 더불어 향당에서 추증을 받고 명성이 높았다. 배위는 증 정부인(貞夫人) 서원정씨(西原鄭氏) 좌랑(佐郞) 약(若)의 딸이며 묘소는 안동시 와룡면 소등촌 진봉산(振鳳山)에 자좌(子坐)로 합폄(合窆) 되어 있고 삼당(三塘)인 김영(金瑛)과 현손으로 정랑인 위(喡)가 그 비문을 지었다. 아들은 습독(習讀)인 사영(士英), 증(贈) 영의정(領議政)인 사빈(士彬), 사화(士華), 사수(士秀)가 있고 두 딸을 두었는데 장녀는 현감 이대근(李大根)에게 출가했다. 所等齋舍 |
선락장군 곤을 위한 재사(안동시 와룡면 태리 소등촌) 경북 중요민속자료 204호 |
소등재사(所等齋舍)는 와룡면 태리의 소등촌에 있으며 이판공(吏判公) 휘(諱) 곤(琨)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재사이다. 영조 2년(1726년) 내당인 추원재를 건립하여 1727년에 증축하고 2004년 중수하였다. 이 재사는 ㅁ자형으로 안채는 15칸이며 동재와 서재가 있고 아래채는 13칸으로 처음 건립당시 모습을 잘 갖추고 있어 중요민속자료 제2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판공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사영(士英), 차가 사빈(士彬)이고 사빈은 또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야옹공(野翁公) 의(檥), 차자는 충재공(冲齋公) 벌(橃), 삼자는 예(欚), 사자는 장(檣)으로서 종보 제369호(2006. 3. 1)와 제388호(2007. 10. 1)에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松巒亭 |
송만공 준을 위한 재사(진보면 신한리) |
이판공(吏判公) 휘(諱) 곤(琨)의 장자인 사영(士英)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교수공(敎授公) 응정(應禎), 차자는 응상(應祥), 삼자는 한송공(寒松公) 응희(應禧)이다. 한송공(寒松公) 응희(應禧)는 창신교위(彰信校尉)로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아들은 귀암공(龜巖公) 휘(諱) 덕조(德操)이며 충재선생에게서 수학하여 학행으로 제용감(濟用監) 판관(判官)을 지냈는데 을사사화에 벼슬을 버리고 진보(眞寶)로 낙향하여 99세에 졸하였다. 판관공(判官公) 휘(諱) 덕조(德操)는 사남매를 두었는데 삼남은 준(晙)이고 호는 송만(松巒)이며 명종 14년 안동 금계리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재주가 뛰어나 판관공이 집안을 흥하게 하리라 하였다. 송만공(松巒公) 휘 준(晙)은 부친이 장수하니 항상 곁에 뫼시며 마음과 몸을 다하여 봉양하였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창의하여 창녕 화왕산성의 곽재우 휘하에 들어가 통달한 전략을 세워 전승하였다. 늦게 은전이 내려 군자감정판관(軍資監正判官)을 제수(除授) 받았다. 전란이 끝나고 공은 은거하여 소나무를 쓰다듬고 호를 송만(松巒)이라 하였다. 작고하니 청송 세천 목계리에 장사하였으며 김도화(金道和)가 비문을 지었다. 진보면 신한리에 공을 기리기 위한 송만정(松巒亭)을 창건하였는데 금년에 경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僕射公派 判書公系 鉉緖 權啓東 감수, 현봉 權景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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