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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 순례 8/32 ])옥봉공(玉峰公) 도계서원(道溪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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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190회 작성일 12-04-3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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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 순례 8/32 ])옥봉공(玉峰公) 도계서원(道溪書院)
道溪村 入鄕祖 諱 士彬과 後裔들(2)

玉峰公 諱 暐와 道溪書院




선생은 복야공파 22世로서 도계촌(道溪村) 입향조(入鄕祖) 휘 士彬의 증손이며 야옹공(野翁公) 휘 의(檥)의 제6子 심행(審行)의 둘째 아들로 명종 7년(1552년) 안동 도촌리(道村里)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숙회(叔晦)이고 스스로 별호를 옥봉(玉峰)이라 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후중(厚重)하고 근면하여 일찍이 학문을 성취하였으며 월천(月川) 조목(趙穆),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서 학덕을 익히고자 백운정(白雲亭)에 머물면서 학봉에게서 주자서(朱子書)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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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북후면 도천리 도계서원




선생은 21세에 동당초시(東堂初試)에 장원(壯元)하였으며 28세에 선고 생원공이 현감의 참소를 입어 한양으로 이끌려 가게 되니 선생이 수행하여 애매한 사정을 호소하여 생원공이 풀려났으나 병을 얻어 객사에서 별세하였다. 선생은 3년간 시묘를 하였으며 또 효성이 지극하여 생원공 생전에 임하에 있을 때 육십리 길을 매일 밤 천렵하여 어버이 반찬을 보내기 십여년 지속하였으며, 모친상을 당하여 묘소에서 3년동안 거려(居廬)하니 효성이 지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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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서원 본당

선생은 생원공 일로 벼슬에 뜻이 없었다가 연로한 모친을 위로하기 위하여 50세의 나이로 선조 34년(1601년) 과거에 응시하여 식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선생은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에 보임되었다 곧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옮겼다. 明國의 사신 고천준(顧天俊)이 와 심희수(沈喜壽) 판서(判書)가 접반사로 있을 때 선생의 도움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심판서(沈判書, 후날 영의정)가 선생의 지위가 인품에 못 미친다 하였다. 선생은 이어 형조(刑曹), 호조(戶曹),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으며 외직(外職)으로 해미(海美), 강진현감(康津縣監) 수성찰방을 거쳤다. 해미현감 재임 時 청렴 검소하며 공명정대하게 정사(政事)를 처리하였다. 광해 10년 예조와 형조정랑(正郞)으로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으나 동경교수(東京敎授)를 제수하니 부임하여 유생(儒生)의 훈육에 전념하였으며 유생들에게 “선비는 스스로 도학(道學)의 공부가 있으니 과거(科擧)에 집착하여 물욕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로 훈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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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서원내 만대헌(옥봉공의 강학 장소) 경북 유형문화재 제 267호

선생은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명나라 陳모가 안동에 진을 쳤을 때 그 막료 주원조(朱元兆,호는 鶴林)가 선생을 한번 보고 마음으로 열복하여 친교를 맺으니 휘하 장수들이 선생을 존경하였다.

선생은 인조(仁祖) 8년(1630년) 고종(考終)하니 향년(享年) 79세로 안동부 서쪽 마감산(麻甘山, 풍산읍 노리)에 배위(配位)와 함께 합폄하였으며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배위는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니 문성공(文成公 휘 초명裕, 안향(安珦)의 후손이다. 2남 3녀를 두었으니 맏이는 극재(克載)로 선무랑(宣務朗)이며 둘째는 극기(克己)로 통덕랑(通德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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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봉고 휘 위를 위한 사

선생은 퇴계(退溪)선생을 마음으로 모시고 그 학문(學文)정신을 흠모하였으며 옥봉문집( 玉峰文集)을 남기고 일록(日錄)을 저술하였으며 시(詩)119수와 서(書) 행장(行狀)등이 있다.

형제간 우애가 깊어 노비(奴婢)와 전답(田畓)을 모두 형제에 나누어 주고 척박(瘠薄)한 전답만을 취하였다. 인품이 근후하여 평생 구차한 행실을 하지 않고 재물에 탐함이 없었으며 몸가짐을 엄숙하게 하여 누구에게나 소홀히 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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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면에서 본 도계서원(마을앞에 옥계천이 흐르고 있다.)

숙종 13년(1687년) 선생의 학문(學文)과 덕행(德行)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에서 도계정사(道溪精舍)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가 1928년 옥봉선생이 거쳐하던 만대헌(晩對軒) 옛터에 서원(書院)으로 승격하여 복설하였으며 1991년 후손들에 의해 사당인 모현사(慕賢祠)와 강당인 명륜당을 수리하고 동재, 홍도문(弘道門), 주사 등을 새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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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서원의 정문 홍도문

만대헌(경북 유형문화재 제267호)은 선생이 40세에 건립하여 제생(諸生)을 강학(講學)하던 곳이며 주원조(朱元兆)와 화답한 시문(詩文)이 있다. 선생은 시문(詩文)이 출중하여 문장을 모두가 전송(傳誦)하였으며 종제 매당(梅堂) 휘 욱(旭)의 제문(祭文)을 지었는데 “함께 백운동(白雲洞)에서 더불어 주자(朱子)의 가르침을 정토하였으되 졸업하기 전에 임란(壬亂)이 일어 지리멸렬하였고 젊은 나이에 방(榜)에 올라 임금과 어버이를 기쁘게 하려 하였건만.....” 하였으며 4촌 함계공(咸溪公) 담(曇)이 쓴 만사(輓詞)에는 우리 문중의 수복(壽福)에는 홀로 능히 누려 단아(端雅)하고도 엄숙한 기국(器局)은 사람들이 다투어 사모하고 화려한 문장은 세상이 모두 전송(傳誦)하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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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봉공 권위의 묘소 (풍산읍 노리 마감산)

매당공 旭은 임란(壬亂) 의병장(義兵長)으로 왜적과 싸웠고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어 의정공 사빈(士彬)의 제 4子 제촌공 휘 장(檣)과 함께 봉산서원(鳳山書院-예천군 감천면 현내리)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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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촌 권용섭 옹이 소장하고 있는 성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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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촌 권용섭 옹이 소장하고 있는 성현의 유묵

좌상 : 이퇴계 유묵/ 좌하 : 송암공 휘 호문의 유묵/ 우상 : 하당공 유묵/ 우하 : 창설공 유묵



<자료제공 : 안동 도계촌 權龍燮옹, 기사 : 賢奉 權景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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