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곡공(屛谷公) 구(榘), 수곡공(樹谷公) 보(糸甫 )와 후손(종보461호)2013.11.1 > 복야공파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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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곡공(屛谷公) 구(榘), 수곡공(樹谷公) 보(糸甫 )와 후손(종보461호)2013.11.1

작성일 13-10-23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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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곡공(屛谷公) 구(榘)


선생의 호는 병곡(屛谷) 또는 환와(丸窩)이다. 현종 13년 가일에서 출생하여 부친에게서 글을 배우는데 뛰어나 시렁위에 쌓인 서책을 모두 읽으며 육경과 정주(程朱)의 글에 전념하되 벼슬에 뜻을 두지 안했다. 갈암 이현일의 문인이며 경학(經學)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사진21 병곡종택(안동시 풍천면 가곡리)시습재로 경북 민속자료 제138호


사진22 병곡공 휘 구 사당



경종 원년 역적 이능좌가 찾아와 함께 일하자 함에 공은 꾸짖어 물리쳤더니 이들이 무고로 공을 주모자라 하여 한양으로 나송되어 친국을 받았는데 왕은 공의 신색(神色)이 천연하고대답이 곧음을 보고 대신과 의론하니 학문과 도를 갖춘 자 아니면 그럴 수 없다 하므로 왕은 석방하였다. 무신년 영남에서 소를 올림에 정조는 경연에서 “권구의 일은 장하구나 칼날 앞에 머리를 준다는 것은 어찌 사람마다 할 수 있으랴” 하였다. 영조 25년 고종하니 향년 78세였다. 공은 온화하고 담박하며 절조를 지킴에 더욱 굳으며 이(利)와 의(義)를 분석함에 확실하고 간소함을 좋아하여 누협한 집에서 거쳐하며 학자는 반드시 뜻을 먼저 세워 이수(理數)를 궁구(窮究)하면 귀(貴)는 자연히 얻으니 털끝만치도 사(私)를 나타내선 안 된다고 하였다. 공은 주역과 중용에 힘써 독역쇄의(讀易鎖義) 학용취정록(學庸就正錄)을 지었고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등 저서와 중국고금 역대연혁지도(中國古今歷代沿革之圖)의 목판을 남겼다.


사진23 노동재사 전경(병곡공 묘소를 수호하기위한 재사 : 우측건물


이 집은 병곡공 구(榘)의 종택이며 화산공 주(柱)선생이 살던 집으로 200 여년 전에 중건되어 경북 민속자료 제 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호는 시습재(時習齋)로 논어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에서 취한 것이다.

가일마을 서쪽으로 언덕에 노동재사(魯東齋舍)가 크게 2동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 재사는 병곡공을 모시고 묘소를 수호하며 참제원의 숙식을 제공하는 집이다.


사진24 노동서사(풍천면 가일마을 서쪽 언덕)좌측건물


사진25 병곡공 휘 구 묘소(풍천면 가곡리 서측


사진26 병곡공 교지

수곡공(樹谷公) 보(糸甫 )


공은 숙종 35년에 출생하여 처음에는 과거에 전념하였으나 영조 4년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선친의 모습에 출세의 길을 버리고 학문에 정진하여 서책을 즐겼으며 경서의 연구와 산수(算數)에 방통하였다. 지방의 산물과 풍속에 밝으니 고유(高裕)가 탄복하여 말하되 “나는 환로에 나다녀도 밝게 알지 못하는데 공은 어찌 소상히 아는가” 하였다. 사학(史學)에 밝아 제가(諸家)가 그릇된 예와 정론을 잃은 것이 많으니 공은 기록해 자료로 삼으니 충(忠)과 열(烈)을 천양함에 힘썼다. 정조 2년에 졸하니 수 70이었고 1남 1녀를 두니 아들은 조우(祖佑)이고 손은 30세(世) 조(目兆)와 환(睆)이며 증손은 평(玶)과 장(璋) 그리고 진사 규(珪)와 우(瑀)이다. 돈령부 도정 연하(璉夏)가 묘갈명을 지었다.


사진27 수곡고택 (풍천면 가곡리)


동곡재사(東谷齋舍)와 수곡고택(樹谷古宅)


사진30 동곡재사(풍천면 가곡리 대정산 수곡공 묘를 수호하기위한 재사)




사진29 수곡공 보 묘소(풍천면 가일 대정산 우록)



정산(井山)의 두 봉우리 가운데 동쪽을 소정산(小井山)이라 하고 서쪽을 대정산이라 한다. 지맥의 서쪽으로 향한 곳의 혈(穴)이 수곡공(樹谷公)의 묘소이다. 이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동곡재사(東谷齋舍)를 건립하였는데 모두 8칸으로 가운데를 신경당(信敬堂)이라 하였고 동쪽은 수후실(收厚室)이라 하였으니 종족의 화목을 바람이요 남쪽을 연모실(燕毛室)이라 하였으니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뜻함이다. 1923년 노동골 동편에 건립하였다.


사진31 일지재(수곡고택 별당으로 학문연구의 장소)경북 민속자료 제 176호


수곡고택(樹谷古宅)
은 정조 16년 30세 조(目兆)가 조부 보(糸甫 )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ㄷ자형 집이며 ㅡ자형 사랑채가 있다. 별당인 일지재(一枝齋)는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마련된 곳으로 중요 민속자료 제 176호이다.


31세 야유당공(野遺堂公) 장(璋)


사진32 야유당(31세 장을 위한 집)풍천면 가곡리 수곡고택 동쪽에 있다.

야유당(野遺堂)은 조(目兆)의 아들로 순조 2년 출생하여 효우가 지극하고 재주가 호매(豪邁)하였다. 공명과 이득에 기울이지 않고 근검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공은 과거는 폐하고 능동재사(陵洞齋舍) 수리와 선원재실의 영건, 노동서사의 설립 등에 성의를 다하였으며 본부(本府)의 환곡(還穀)은 백성의 고질(痼疾)이 되기에 유도종(柳道宗)과 김용락(金龍洛)과 함께 교정(矯正)하여 백성이 구제되었다. 고종 11년 병으로 고종하니 수 73세다. 공은 평소 모든 일을 조치함에 공명정대하였고 마음에서 우러러 충후하니 사소한 흠도 없었다.

아들은 익(金翼), 도(金度), 찬(金贊), 숙(金肅), 석(金石)을 두었다.



32世 남천공(南川公) 숙(金肅)


남천공은 용모가 응중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종조부 환(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형제간 사마온같은 우애가 깊고 친족에게 화목하며 항상 서책으로 즐겨 지내다 병으로 고종하니 70세였다.


사진33 남천고택(야유당이 아들 숙에게 지어준 집 가곡리 동측) 경북문화재자료 제324호)


남천고택(南川古宅)
은 야유당 장이 철종 1년 아들 숙(金肅)에게 지어준 집이다. 가곡리 동쪽에 위치하고 숙의 호에 따라 남천고택으로 불려왔으며 경북 문화재자료 제 324호로 대지 200 여평에 토담이 길게 둘러 처져있고 안에 연못이 있어 풍치가 아름답다.

33世 우암공(友巖公) 준희(準羲)는 찬(金贊 )의 아들로 야유당의 장자 익(金翼)에게 출계하여 덕기가 침중하고 화평에 애써 어려서부터 생, 양가를 봉양하고 어버이 모시기를 일삼고 여막(廬幕)을 지키기 엄격하였다. 묘갈을 세우며 위토를 마련하고 재실을 세우는 등 성의가 방조에 까지 미치고 흉년이 든 해는 종족과 인리에 구제를 고루하니 생불(生佛)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사진34 성학10도 병풍(은분으로 작성한10폭 병풍)


공은 1913년 광복단(光復團)에 가담하여 1918년 광복단이 피검될 때 공도 공주옥에 수감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고도 태연스러우니 왜는 군자인(君子人)이라 일컬으고 석방되었다. 1938년 졸하니 88세였다. 수동에 안장하였다. 아들 다섯이 있으니 동직(東稷)의 아들은 오상(五尙(五敦))이고 동만(東萬)의 아들은 오헌(五憲)이며 동호(東浩)의 아들은 오운(五雲)이다.


항일(抗日)구국열사 오설(五卨)과 오돈(五敦) 오운(五雲)


의사(義士) 오돈(五敦)의 다른 이름은 오상(五尙)이다.

1924년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중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에 들어가고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한 뒤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집행위원으로 1926년 6월10일 융희황제 국장일에 맞춰 격문을 뿌리고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징역 1년을 언도받고 1928년 보석으로 풀려나자 보름만에 순국하였다.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의사(義士) 오운(五雲)은 준희(準羲)의 손자로 17세에 입학 원흥의숙(元興義塾)하고 중앙고보(中央高普) 졸업 전에 종형 오상(五尙)과 항일조직대열에 가입하여 암행활약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귀가 1일 후 운명하였다.

오헌(五憲)은 신간회 안동지회 간사회 수금위원으로 1929년 8월

‘불온축문(결사항쟁 독려문)’사건으로 구속되어 곤욕을 치렀다.


사진35 항일 구국열사 권오설의 옥중 서신


항일(抗日)구국열사 오설(五卨)

은 병곡공의 8대손이며 명우(命佑)의 6대손으로 1897년 풍천 가곡에서 출생하여 서울 중앙(中央)학교에서 수학하고 3.1운동이 일어나자 광주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투옥되었으며 향리에서 농민운동, 청년운동에 관계하였다. 원흥학교를 설립운영하고 안동청년회안동동지회에 참여하였다. 이때부터 민족해방투쟁의 동지요 전우가 된 김재봉, 이준태, 감남수와 가일마을의 혈족인 오상 오운과 함께 하고 1924년 상경하여 조선노동총동맹 등에서 항일운동을 하면서 1926년 60만세운동에 치밀한 거사계획을 세우고 선언문과 태극기를 마련하는 등 대사를 도모하였으나 총독부에 탐지되어 체포되고 감옥에서도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여 1934년 최후를 마쳤다.

鼎山자락에 드리운 節義(국학진흥원 자료)


가일마을에 근대를 상징하는 인물은 권오설이다. 가일 마을 앞에 그를 기리는 기적비를 세운 내력을 소개 연재한다.


광복회활동(光復會活動)과 해외 독립지원(獨立支援)


광복회 활동에 가일마을 인사들이 참가한 것은 바로 군자금 모집에 적극 동참한 사실이다. 특히 그 무렵 광복회가 박상진이 지휘한 이 거사는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광복회가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안동 주변에서 활동이 벌어질 때 가일마을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가일 사람들은 군자금을 맡았다. 광복회에 가담한 가일마을 사람으로는 권준희(權準羲)(1849-1936), 권준흥(權準興)(1881-1939), 권영식(權寧植)(1894-1930)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병곡공 권구의 셋째아들인 수곡공 권보(權糸甫 )의 후손들이면서 가일마을 8부자로 일컬어지는 집안의 후손들이다. 1910년대 독립운동에 참가한 인물 모두가 가일 8촌형제이거나 9촌 숙질사이이며 가일의 주역이다. 특히 권준희는 당시 학문으로도 명성이 높은 학자였다.

1917년 가을 가일에서 자금을 내놓았다. 이 거사로 주역들이 체포되었다. 권준희(權準羲)(수곡공樹谷公의 5대손)는 당시 71세였고 훗날 6.10만세운동에 참가했던 권오상(權五尙), 오운(五雲)과 중국에서 활약하다가 돌아온 권오헌(權五憲)의 조부이다. 권준흥(權準興)(수곡공의 손자 환(睆)의 증손)은 혜민원 주사를 지냈다. 권영식(權寧植)(수곡공의 손자 환(睆)의 고손)은 광복회에 자금을 제공하여 1918년 2월 일경에 체포되고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 1917년 가을부터 이듬해까지 가일 사람들은 혹독한 시기였다. 광복회가 추구한 투쟁목표는 독립군 양성과 독립전쟁이었다.

이를 위해 만주에 세워진 독립군기지를 지원하는 것이 1단계 목표였고, 자금을 모금하는 것이 우선 실행목표였다. 그러기 위해 인력 공급도 중요한 과제였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를 모집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으며 이들의 활약으로 권원하, 김종엽 등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활동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청년들을 보내는 과업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활동에 가곡의 권재수(權在壽)가 있다. 그런데 1920년 일제에 발각되어 17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권오설의 등장-다음호에 연재>

(감수 가일문중 권대직010-8598-1335, 기사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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