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지 순례 23 ] 서부영남 鶴山公 諱 三變의 忠孝 (종보 제378호 2006.12.1) > 복야공파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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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 순례 23 ] 서부영남 鶴山公 諱 三變의 忠孝 (종보 제378호 2006.12.1)

작성일 12-04-3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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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 순례 23 ] 서부영남 鶴山公 諱 三變의 忠孝
영남서부일대에 세거하는 안동권씨의 입향조(入鄕祖) 군기감정공(監正公) 휘 집덕(執德)의 자손들에 대해 연재해왔다. 이제 마지막으로 촌(忖)의 차자 계복(繼福)의 후손 학산공(鶴山公) 세가(世家)를 소개한다.

密陽 入鄕祖 鶴山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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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공 휘 계복 재사(합천군 대병면 성리)


감정공(監正公) 의 8세손 휘 삼변(三變)은 자는 요경(了經)이며 호는 학산(鶴山)이다. 공의 11세조 문탄공(文坦公) 휘 한공(漢功)은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을 지냈고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에 봉직되었으며 10세조 충헌공(忠憲公)휘 중달(仲達)은 밀직사사(密直司事) 화원군(花原君)이고 9세조 휘 사종(嗣宗)은 판종정사사(判宗正寺事)를 지냈다.

고조는 경의(敬義)인데 부정(副正)을 지냈다. 증조는 광국(光國)으로 별좌(別座)이며 조부는 부장을 지낸 옥형(玉衡)이며 부는 승사랑(承仕郞) 휘 추(錘)이다. 공은 선조10년 단성에서 태어나 나면서부터 영오(穎悟)하고 6세에 선친을 여의고 효가 지극하니 사람들이 감읍(感泣)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모친 윤씨는 공이 어려서 배움을 놓칠까 염려되어 공의 당숙부 직장공 권치(權錙)에게 배우도록하기위해 낙동강 건너 밀양부 북쪽 양양으로 이사하니 지금의 위양(位良)이다. 직장공은 공의 재주가 영특하여 “이 아이는 생각과 목표가 범인보다 뛰어나고 재주가 보통을 넘으니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일으킬 것이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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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공 휘 계복의 묘소(대병면 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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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정사 (경남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임진년 왜적이 밀양으로 쳐들어오니 공은 모친을 업고 선군의 위패를 모시고 창녕 대산으로 피신했다. 여기서 공의 나이 16-17세인데 충의(忠義)로 싸우고저 격려하니 동지들이 모두 감복하여 분전하였다. 영산 현감이 겸관이라하고 진중에 들어와 심하게 호령하니 모두 흩어진 틈에 왜적이 침입하여 잡히니 공은 “내몸은 죽일 수 있어도 어머니를 어찌 해롭게 할 수 있겠는가” 하며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血書)하니 왜적은 “이 사람은 조선의 효자다. 이 사람을 죽이면 우리 군의 명성이 실추된다.” 하고 천조각에 “勿害孝子之母(효자의 모친이니 뒤에 오는 군사들은 침범치 말라” 라고 써서 보내고 공은 일본으로 데려갔다. 공은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있는 동안 매일 새벽 해에게 절하고 “아침 해여 나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비춰주소서, 해가 날개를 빌려 준다면 돌아가서 어머니께 절할 수 있을 텐데” 하니 일본인이 해에게 절하는 수재라고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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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정사 본당

갑진년 사신을 따라 10년만에 돌아오니 모친은 실명상태라 공은 토끼간으로 정성을 다해 치료하니 회복하게 되었다. 모친이 하세(下世)하여 공은 여막을 짖고 곡을 하니 호랑이도 공을 지켜주었다. 공은 “성은(聖恩)을 입어 고국으로 무사 귀환하니 마땅히 분수를 지켜 성군의 은택에 살겠노라”하고 소학(小學)을 읽으며 여러 자제들에게 “사람의 도리가 이 책에 다 있다” 하면서 효경(孝經)을 손수 써서 제생을 가르쳤다. 공이 쓴 산재기(山齋記)에 “화악산 동남으로 구슬이 연이은 듯 뻗어내려 마을의 진산이 된 것은 대산(大山)이다. 어머니 상중 여막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산재(山齋)라 하였다. 호랑이가 울고 오르기 어려워 사람들이 꺼려했다.” 이윽고 무오년(1618년)묘아래 집이 이루어져 현판을 학산(鶴山)이라하니 학산정사(鶴山精舍)이다. 요동학(遼東鶴:요동의 정령위가 학이 되어 승천했다는 고사)이 고향으로 돌아온 뜻을 취한 것이다. “내 고국에 돌아와 모친 봉양하기를 마쳤으니 임금님 은혜가 두텁다. 성군의 은택을 입어 어머님 생각하며 여생을 보낸다.”라 하였으니 공은 평생 임금의 성은과 모친을 그리워하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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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재정(밀야사 부북면 위양리) 학산공 정자

경신(庚申)년 밤에 공이 세상을 하직하니 향년69세이고 부북면 위양리 대산에 장례하였으며 인조26년(1648년) 사과(司果) 김내성(金迺聲)이 공의 유사(遺事)를 짓고 고종2년 완산부사(府使) 이상억(李象億)이 발문을 썼으며 1860년경 여강 이종상(李鐘祥)이 행장(行狀)을 쓰고 1870년경 형조판서(刑曹判書) 겸 도총관(都摠管) 허전(許傳)이 묘갈명(墓碣銘)을 썼다. 묘표는 도사(都事) 송병선과 8세손 중석(重錫)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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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재정 전경(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위양지)

빼어난 仙鶴의 忠貞, 王休徵의 孝誠

후손(後孫)들은 공이 공부하던 곳에 재실을 지어 묘사(墓祀)를 받들고 재계하는 장소로 제공하였으니 학산정사(鶴山精舍)이고, 물길을 따라 시를 짓던 섬을 개척하여 정자를 이루었으니 완재정(宛在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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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공 유허비(위양리 위양지 앞)

학산정사(鶴山精舍)는 영조4년(1728년) 학산공의 증손 대임(大任)이 학산정사를 중수하고 중수기를 지었다. 1865년 학산정사를 중건키로 하고 중건기(鶴山精舍重建記)는 지부(知府) 유치장(兪致長) 교리 정인협(鄭寅協) 6세손 수(洙)와 7세손 상호(相祜)가 기록했는데 상호의 중건기에 “후손이 되는 자는 여기서 부지런히 공부하여 부조의 가업을 계승하고 시례(詩禮 )의 교훈을 이어받아 효우(孝友)와 돈목(敦睦)을 공고히 한다면 어찌 문려(門閭)가 커지고 자손이 번성치 안을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또 밀양도호부사 이승신(李承臣)은 학산정사 상량문(鶴山精舍上梁文)에서 “학산 권선생은 무리에서 빼어난 선학(仙鶴)이요 세상에서 드문 상서로운 기린이다.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꾸짖으며 절의(節義)를 온전히 하였으니 소무(蘇武:흉노에 붙잡혀 절개를 지킨 전한의 명신)의 높은 충정을 보겠도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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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공 묘소(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대산)

완재정(宛在亭)은 동부승지 이만도(李晩燾)의 완재정(宛在亭)기문에서 “양양지는 둘레가 5리인데 가운데 5개의 섬이 있고 신라 때부터 은자(隱者)가 살던 곳이다. 학산 권공이 이 마을에 이사와 정자를 지으려고 이름을 완재(宛在)라 정하였다. 300년이 지나 1900년 자손들이 한개의 섬에 공의 뜻을 이루어 집을 짓고 배를 갖추어 왕래하였다”라 하였으며 또 의금부도사 송병순(宋秉珣)은 “밀양의 구경거리 영남루라 하였는데 영남루 북쪽에 기절(氣節)한 곳이 있다. 네 개 둑에 아름다운 나무가 있으니 학산 권공이 위양마을에 복거하여 당피(塘陂:못 언덕)를 소요(逍遙)하여 섬에 정자를 짓고자 완재(宛在)라 하고 돌아가셨다. 경자년 후손들이 정자와 방주를 갖추어 왕래하니 더욱 아름답고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내가 거닐어 보면 옹(翁)의 학(鶴)을 탄 모습을 만날 것 같으니 어찌 주자(朱子)의 차(茶)를 달이는 주전자와 같은 시가 없을 수 있을까?”라 하였다. 공의 7세손 우중(友中)이 완재정 중건상량축문을 쓰고 동부승지 안희원(安禧遠)이 완재정중수기를 썼다.

학산정사와 완재정에 대해 고래로 수많은 이들이 시(詩)를 지어 찬양하였으니 「제현(諸賢)의 제영(題詠)」을 살피건데 자손들은 6세손 수(洙)외 22인이며 타성씨들은 부사 남정현(南廷顯)의 학산정사용구운(鶴山精舍用舊韻)외 100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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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공의 산재기(학산정사내)

학산공(鶴山公)의 배위 밀양손씨는 훈도 충보(忠輔)의 딸이며 4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적(積)과 차남 직(稷)은 요절하였고 3남은 욱(稶)이며 4남은 목(穆)이다. 욱(稶)의 아들은 맏이가 이규(爾規)이고 둘째는 이구(爾矩, 贈吏曹參判)이고 목(穆)의 아들은 이도(爾度) 이준(爾準), 이평(爾平)이다.

후손들은 공의 유지를 받들어 유적지를 잘 가꾸어 보존하며 학산공유허비 건립을 추진하여(위원장 12대종손 權奇德) 1992년 종후손 권헌조(權憲祖)가 유허비명을 짓고 1995년 윤8월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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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상 : 성산공 묘소(청도읍 대현리) 좌하 : 화동재(성산공 재사)

우상 : 성암공 묘소(부북면 위양리) 우하 : 화산재(성암공 재사)

학산선생유허비명(鶴山先生遺墟碑銘)에 “공이 난리에 의로움을 떨치고 앞장섬은 육규(陸游:宋의 애국시인)의 충성심이요 모친을 위해 칼날을 무릅쓰며 모친의 약을 구함은 왕휴징(王休徵:모진 계모를 위해 효를 다함)의 효성이요 여막살이에 범이 땅을 판 것은 천지신명이 감동의 소치이니 4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이 공을 흠모한다.”고 하였다.

학산실기는 1958년 노근용(盧根容)이 서문을 짓고 9세손 태희(泰希)가 발문을 썼다. 2006년 국역학산실기를 발간하고 10세손 권영적(權寧迪)이 발간사를 썼다.



< 글, 사진 :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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