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지 순례 3 ] 충정공 권벌(忠定公 權橃) 삼계서원(三溪書院)
작성일 12-04-3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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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 순례 3 ] 충정공 권벌(忠定公 權橃) 삼계서원(三溪書院) |
임금을 섬김에 절개를 다하였으니 충정(忠定) 충정공 충재 권벌(忠定公 冲齋 權橃)은 20世로 복야공손(僕射公孫)이다. 조선조 중종(中宗)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니 나이 30세였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과 대학(大學)을 강론 |
[관물루 전경 봉화읍 유곡리 닭실] 공은 중종9년 호조정랑이 되고 영천군수를 제수 받아 나갔으며 중종12년 사헌부 장령이 되고 이듬해 정3품 통정대부로 올라 승정원 우승지가 되었다. 이때 공은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쓰고 영의정 정광필, 대사헌 김정, 부제학 조광조와 함께 석강(夕講)에서 대학을 강론하였다. 공은 중종14년 종2품 가선대부에 오르고 예조참판이 되어 동지중추부사를 제수 받았는데 어버이를 모시고자 휴직하고 삼척부사로 나갔다. 그러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선정을 베풀던 공이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이 중앙에 있었더라면 조광조 등과 함께 남곤에 의해 화를 당했을 텐데 파직으로 끝난 것은 부모님의 덕이라 하겠다. 공은 봉화 유곡에 복거하여 서재를 짓고 호를 충재라 하였다. 중종28년 직첩을 되돌려 받으니 13년 만이었다. 중종 30년 한성부 좌윤, 33년 경상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가 되고 이듬해 정2품 자헌대부 한성판윤에, 중종35년에 병조판서, 예조판서를 두루 지냈으니 공은 늦게 입신하여 빠른 승차를 한 것이다.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의 추탈된 위호를 회복 |
[청암정 석천장사전경] |
공은 일지기 중종7년 삼포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강화를 허락지 말도록 계청하고 문종의 왕비이자 노산군(端宗)의 생모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의 추탈된 위호를 회복시킬 것을 청하는 상소를 무려 11차례나 올려 중종의 윤허를 받았다. 이와 같이 공은 품성이 강직하고 임금을 섬김에 충성을 다하였다. |
[삼셰서원-본당] |
김안국은 “권벌은 소박하고 진실하며 충성스럽다” 하였으며 정광필은 “권벌은 어렸을 때 목숨을 다 바쳐도 그 뜻을 빼앗지 못한다.” 하였고 무신년 강직한 사관 안명세는 간신들의 행태와 헌신들의 억울한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공의 충직함을 그대로 기록하였으니 공의 절개를 가히 알 만하다. 삼계서원(三溪書院) 공은 인종원년 68세로 정1품 숭정대부로 올라 의정부 우찬성이 되었으나 명종2년에 문정왕후를 비방하는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되었으니 나이 70이었고 이듬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조 원년에 공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감 춘추관사에 추증되고 선조4년 충정(忠定)의 시호가 내렸는데 “임금을 섬김에 절개를 다하였으니 충이요, 행실이 헛되지 않았으니 정이다” 라 하였다. 공을 추모하는 사당인 삼계서원은 1592년 선조25년 완성되고 임진왜란 후 선조34년 위판을 봉안하여 충정사(忠定祠)라 이름 하였다. 강당은 정일당(精一堂), 동재와 서재를 짖고 누각은 관물루(觀物樓)라 이름 하였다. 그리고 1623년 묘소에 신도비를 세웠다. 공이 남긴 문집은 충재집10권이 있으며 정조18년 원래 근사록에다 영조가 하사한 근사록을 왕이 열람하고 심경(心經)한질을 더하여 하사하면서 어제서문(御製序文)을 지어 내렸다. |
[충재선생 유묵] |
<賢奉 權景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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