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공 사영(琴溪公 士英)과 귀암공 덕조(龜巖公 德操) 종보463호(2014.1.1)
작성일 13-12-20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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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공 사영(琴溪公 士英)
공은 판서공 휘 인(靷) 현손이며 이판공 휘 곤(琨)의 장자이다.
공의 자는 자화(子華)이고 호는 금계(琴溪)이며 세종 29년에 출생하여 습독으로 인후관중(仁厚寬重)하니 어질고 후덕하여 너그러워 덕망이 뛰어난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상세한 약력을 찾을 수 없으니 가히 애석하다. 명종 9년에 졸하니 수 108세였다. 묘소는 안동시 와룡면 태리 소등촌 진봉산에 있다. 후사는 응정(應禎), 응상(應祥), 응희(應禧)를 두었다.
사진1. 19세 사영 묘소(안동시 와룡면 태리 소등촌 진봉산)
장남 응정(應禎)은 교수(敎授)이며 묘소는 와룡면 태리 선고묘 위에 있다. 아들은 덕기(德麒)와 덕린(德麟), 덕봉(德鳳), 덕황(德凰)을 두었다.
사진2. 20세 응정 묘소(안동시 와룡면 태리 소등촌 진봉산 선고묘 귀암공 묘위)
2남 응상(應祥)의 아들은 덕방(德邦)이다.
3남 응희(應禧)의 호는 한송(寒松)이며 성종 16년에 출생하여 창신교위(彰信校尉)로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고 선조 6년 89세로 졸하니 묘소는 안동시 와룡면 소등촌 진봉산 태리 선고묘 우록에 있다.
후사는 장자 덕조(德操), 차자 덕원(德遠), 덕심(德深), 참봉 덕순(德純),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덕윤(德潤)을 두었다.
사진3. 20세 응희 묘소(안동시 와룡면 태리 소등촌 진봉산 선고묘 우록)
귀암공 덕조(龜巖公 德操)
덕조(德操)는 자는 윤보(潤甫)이고 호는 귀암(龜巖)이다.
사진4. 21세 덕조 귀암정과 비(경북 청송군 진보면 광덕동 신한)
귀암공은 중종 2년에 출생하여 충정공(忠定公) 벌(橃)에게서 수학하고 사옹원 주부를 거쳐 학행으로 추천되어 제용감판관이 되었다. 1545년 인종이 승하하고 어린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와 윤씨 외척의 난정과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니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정계에서 쫓겨난 문정왕후(文定王后)측의 세력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 형제는, 김안로가 실각한 뒤 다시 등용되어 점차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국은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친정인 대윤(大尹)과 윤지임(尹之任)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의 친정인 소윤(小尹)으로 갈라져 외척간의 권력투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장경왕후에게 원자(元子) 호(岵)가, 문정왕후에게는 경원대군(慶源大君) 환(峘)이 각각 탄생하자, 윤원로·윤원형 형제(小尹)는 경원대군으로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여, 세자의 외척인 윤임 일파(大尹)와의 사이에 대립과 알력을 빚게 되었다.
사진5. 귀암정 재사
인종의 즉위와 함께 유관(柳灌)·이언적(李彦迪) 등 사림의 명사들이 인종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고,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에 의해 그 파의 사류(士類)가 많이 등용되어, 기묘사화 이후 은퇴한 사림들이 다시 정권에 참여하였다. 또한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일부 사림들은 소윤인 윤원형 일파에 가담함으로써, 사림들도 대윤·소윤의 양세력으로 갈라졌다.
이 동안 소윤의 공조참판 윤원형이 대윤의 대사헌 송인수(宋麟壽)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는데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뒤를 이어 이복동생인 어린 경원대군이 명종이 되자, 문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에 정국의 형세는 역전되어, 조정의 실권은 소윤으로 넘어갔다. 재등용된 윤원로는, 윤임 일파의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그들을 무고하였으나, 영의정 윤인경(尹仁鏡)과 좌의정 유관이 천친(天親)을 이간한다고 탄핵함으로써 오히려 파직, 해남(海南)에 유배되었고 대윤이 정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문정대비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소윤측의 뒤이은 음모는 끈질기게 진행되어 윤임·유관·유인숙 등은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死賜)되었다.]
사진6. 화왕산성 의진시
이같이 정국이 혼탁한 조정에서 공은 관직을 유지한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되니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청송 진보에 살며 징소(徵召)가 되어도 나가지 않고 인사범절을 모두 피하였다. 만년에 임진왜란이 일어 아들 준(晙)을 화왕산 곽재우에 보낼 때 시로 격려하였다. 선조 27년 88세로 졸하니 안동시 와룡면 태리 소등촌 진봉산에 있다. 참판 유치명(柳致明)이 비문을 지었다.
청송군 진보면 광덕동 신한에 귀암정(歸巖亭)과 종택이 있는데 귀암정 상량문에 “선조의 덕이 그윽하게 잠기었고 추모하여 생각하니 부군은 행의(行誼)가 청고(淸高)하고 지절(志節)이 강개하다. 일찍이 충정공(忠定公)의 문하에 들어 근사(近思)의 법을 얻어 인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불행하게도 보은할 곳이 없고 년로에 세차례 징소(徵召)의 사은은 본 뜻이 굳고 임난이 일어나 두아들을 군에 종사케 하고 북문의 화(을사사화)를 지나 산림에 은거할 뜻을 굳혔다. 진보고을의 토지는 비옥하고 샘은 감미가 있어 시를 읊고 노래함에 한가함이 넉넉하니 저술의 책이 많을 것이다. 한스러운 것은 화마에 소실되어 아득하게 되었다. 정자를 건축하자는 의논이 만오헌공(晩悟軒公)이 발의하여 언덕에 터를 잡았다. 두산이 북쪽에 솟으니 바람이 모이고 한수가 서쪽으로 흐르니 옷깃 싸임이 공고하다. 공장(工匠)을 감독하니 빛나는 정자가 웅장하고 홀연히 산천의 경치가 보인다. 겨울과 여름에 공부함은 동리 서실의 규모에 의하였다. 일편의 붉은 충절이 고금과 같다. 원컨대 후손들에게 효충의 명의를 가르쳐 아손들이 청숙한 기운으로 태어나 밝은 세대에 많은 인재가 나와 무궁하리라 ”하였다.
사진7. 귀암정기문
귀암정 기문에 “지조와 절개를 지킴은 영원히 그 이름이 남는다. 제용감 판관 귀암 권공은 명망이 높아 모두 앙모하여 기대하였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매년 중조기일이면 제수를 진설하고 통곡하며 ‘小臣獨抱遺弓立 七月年年 淚徹泉 운운’ 한 시가 있다. 고난을 당하여 한탄하고 슬퍼한 시이다. 생각으로는 목숨을 바쳐 적을 쳐 나라의 근심을 덜고자 하나 나이 80이 넘었으니 근력이 못되어 아들을 곽재우에게 보내며 시를 지었다. 공의 충군애국하는 절의는 평생토록 변치 않음이니 지조와 절개를 보는 것 같다. 직무에 임하여서는 예절 법도를 본받아 틀림이 없고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학문은 스스로 깨우쳐 성취하였다. 후에 사림에서 그 옛 집터에 선비들이 귀암사를 세우고 향사를 받들었으나 나라의 철폐령으로 세월이 흘러가 후손들이 합하여 사실을 상익(相翊)에게 위촉하니 삼가 기문을 짓는다.”
선조 27년에 졸하니 수 88세이고 묘소는 안동시 와룡면 태리 소등촌 진봉산증조묘 위에 있다.
사진8. 귀암공 덕조 묘소(안동시 와룡면 태리 소등촌 진봉산)
공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서(曙)는 장사랑이며 차남 해(咳)는 봉사이고
3남 준(晙)은 군자감정과 판관을 역임하였다.
송만공(松巒公) 휘 준(晙)
공의 호는 송만(松巒)이며 명종 14년 안동 금계리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재주가 뛰어나 판관공이 집안을 흥하게 하리라 하였다. 공은 부친이 장수하니 항상 곁에 뫼시며 마음과 몸을 다하여 봉양하였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다.
사진9. 송만정(경북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354번지)경북 문화재자료 제577호
임난에 종제 완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창녕의 화왕산 곽재우 휘하에 들어가 통달한 전략을 세워 전승하였다. 늦게 은전이 내려 군자감정판관(軍資監正判官)을 제수(除授) 받았다. 전란이 끝나고 공은 은거하여 소나무를 쓰다듬고 호를 송만(松巒)이라 하였다. 작고하니 청송 세천 목계리에 장사하였으며 김도화(金道和)가 비문을 지었다.
배 평산 신씨는 100세를 향수하니 인조조에 사찬(賜饌)을 받고 고을이 조세를 탕감받는 견복을 입었다. 송만공(松巒公)의 계자 지선(止善)은 선조 22년 출생하여 어버이 섬김에 지효(至孝)하니 효종이 사찬(賜饌)하였고 가선대부를 제수받고 사적이 읍지에 올랐다.
사진10. 송만정 내당
진보면 광덕리 354번지에 권준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863년 건립한 송만정은 경북 문화재자료 제577호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ㄷ자형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묘소는 경북 청송군 진보 파천 묵계리 망곡에 있다.
귀암공 증손 욱(彧)은 호가 송고(松皐)이고 선조 29년에 출생하여 임천에서 의리를 닦아 사우(士友)의 추종을 받아 수직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숙종 22년에 졸하니 수는 101세였고 묘소는 진보의 교동 선고묘하에 있다. (감수 권명오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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