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烈公 諱 順長과 忠烈祠 종보 제358호(2005.4.1) > 추밀공파 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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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烈公 諱 順長과 忠烈祠 종보 제358호(20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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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465회 작성일 12-07-12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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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섬 함락하니 부부가 절의(節義)을 이루다.

충렬공(추밀공파 24世)의 호는 수와(睡窩)이며 14세 정헌공 후(煦)의 후손 박(博)의 현손이다. 증조부는 풍담공(楓潭公) 휘 극중(克中)이며 좌참찬으로 추증되었고 부친 휘 진기(盡己)는 형조참판을 지냈다.

사진1 충열사(인천시 강화군 선행리371)


공은 선조 40년 출생하여 인조 2년 18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 건원능참봉, 빙고별제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안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도 조정에서는 국방을 소홀히 하여 38년 만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공은 모친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고 조정에서는 한성판윤 김경징을 검찰사로 하여 강화를 수비토록 하였는데 그는 천혜의 요충지로 믿고 술을 마시며 대비를 꾀하지 안했다.

사진2 충열사 사당


공은 분개하여 김익겸 등과 함께 글을 보내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임할 시기에 술마실 때가 아니라고 하였으나 김경징은 오히려 화를 내니 식자들이 탄식하였다. 공은 강개하여 “나와 더불어 강나루로 나갈자 없는가” 하니 선비들이 수성을 다짐하며 모여 들었다. 의여(義旅)라 이름하고 본진에 합류하였다. 이윽고 적병은 해협을 뒤덮으며 건너오니 관군은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무너지고 김경징은 나룻배로 도망하였다. 적군은 도륙전을 펼치는데 성의 남문을 지키고 있던 공은 동지들과 필순(必殉)을 맹세하였다. “종묘사직이 위급한데 어찌 살기를 도모하랴” 김상용이 화약궤에 앉아 “그대들은 물러가라” 말하였다. 공은 눈물을 뿌리며 화살을 문루에 쏘기를 세 차례 하자 그때 대폭발이 일어났다. 공도 함께 돌아가니 31세 청춘이었다.

사진3 충열사비


분사소식을 듣고 공의 처와 누이가 자결하고 아우 순열(順悅)과 순후(順厚)도 적에 죽으니 일가 10 여인이 일시에 순절(殉節)하였다. 강화유수 윤이지는 절의(節義)한 사람 중에 권가가 가장 많았다고 하였다. 공은 순절후 인조조에 지평(持平)으로 추증되고 숙종조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가증되고 다시 의정부(議政府)좌찬성(贊成成)을 더하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충열은 위신봉상(危身奉上)이 충(忠)이요 병덕준업(秉德遵業)이 열(烈)이라한다. 영조는 정려(旌閭)를 명하고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내렸다.

사진4 충열사 내삼문


충열사는 종묘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강화가 함락됐을 때 인조 15
년에 남루에서 우의정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이 생원 김의겸과 더불어 화약을 안고 자폭하였으며 병조판서 이상길 등 6인이 배향되었는데 후에 발의하여 그때 남루 위에 있다가 불길이 치솟아도 피하지 않고 함께 죽은 원임 금부도사 권순장(權順長)과 성균관생원 김익겸(金益謙,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손자) 등 28인을 배향한 사당이다. 인조 19년(1641)에 지을 당시에는 「현충사」라 하였으나 효종 9년(1658)에 임금이 유수 허휘(許徽)에게 현판과 전답을 내리면서 「충렬사」라 개칭하였다.



사진5,6 성취당 내실, 성취당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어 있고 소재는 강화군 선행리371번지에 있다.

숙종 27년(1701) 김상용의 증손 김창집(金昌集)은 ‘강화충열사비(江華忠烈祠碑)’의 건립을 발의하여 건립하였으며, 비석은 방부이수 양식으로 3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만 오석(烏石)이고, 방부와 이수는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이수는 용무늬가 아닌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가 짓고, 당대 예서의 대가인 김진규(金鎭圭)가 예서체로 비문의 글씨와 전을 썼다.

사진7 수직방


공은 여주군 방목동에 장사하였다가 훗날 양평 수대곡 선영에 이장하였다.

배위 완산 이씨는 일이 주상에게 계문되자 정려(旌閭)를 하명하였고 공의 묘지명은 대제학 조복양(趙復陽)이 찬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하였다.

氷雪之淸 未足喩其潔

松柏之貞 未足喩其烈

是夫是婦 節義雙聲

我銘斯丘 百世風聲

빙설(氷雪)의 맑음도 족히 깨끗함을 비길 수 없고

송백(松柏)의 곧음도 그 매움을 비길 수 없나니

지아비와 지어미 절의(節義) 쌍으로 이루었네!

내 이 언덕에 새겨 백세(百世)토록 바람소리에 실으리.

<부처장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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