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순례61-1]參議公 諱 齡 과 諸子孫 종보 제430호 2011.4.1)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963회 작성일 12-04-20 21:21본문
[유적지 순례61-1]參議公 諱 齡 과 諸子孫 |
추밀공파(樞密公派) 참의공(參議公) 휘 령(齡)은 14世 정헌공(正獻公)의 5세손이며 밀직공(重貴)의 현손이고 판관공(判官公) 휘 실(實)의 5형제 중 장자이다. 증조부 부윤공(府尹公) 숙(肅)은 고려조에서 문과하여 태조3년 양촌공이 임금에게 건의하여 두 아우와 함께 왕씨성을 삭적하고 본성으로 복적하였다. |
참의공종중 재사 추원재(대전시 괴정동) 이후 출사하여 승지와 대사성,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고 63세에 졸하니 자헌대부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추증되었다. 조부 좌윤공 순(循)은 사헌부 지평을 지내고 내자시 소윤으로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남부 삼도 기근을 살피고 판제용감사(判濟用監事)를 지내고 한성부 좌윤으로 추증되었다. 백부는 세조1년 좌익원종공신에 녹훈된 돈녕부사공 격(格)이고 중부는 단종 2년 증광시 문과 급제하여 청주목사를 지낸 예참공 지(至)로서 가선대부에 오르고 예조참판 벼슬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판관공 실의 단소(대전시 괴정동 참의공묘소 우록 상) |
선친은 판관공(判官公) 실(實)이며 참봉을 거쳐 제용감판관(濟用監判官)을 지내고 손자 홍이 귀히 됨에 통정대부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실전하여 장단에 설단 하였다가 1993년 대전시 서구 괴정동 참의공묘소 우록에 이단하였다. 참의공 휘 령(參議公 諱 齡) |
참의공 령 묘소(대전시 괴정동 지초동) |
19세 참의공은 세종 13년에 출생하여 음보(蔭補)로 장례원사의(掌隷院司議), 호조정랑을 지낸 후 외직으로 연산군 5년 진위현령, 양근, 옥천군수를 지낸 후 연산군 12년 당상관으로 승차되어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다. 성종 18년에 경차관(敬差官)으로 지방에 파견되었다. 중종 4년 향년 69세로 졸하였으며 아들 홍이 귀히 됨에 형조참판(刑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대전시 괴정동 지초동에 있으며 배위 정부인 청주박씨가 명당인 이 묘자리를 얻고자 친가로부터 기지를 발휘하였다는 설이 있다. 영의 형제는 노(老), 담(聃), 미(眉), 재(載)가 있으며 공의 아들은 홍(弘), 박(博), 심기(청송인), 민세량(여흥인) 과 연산군 후궁인 숙의(淑儀)가 있다. |
참의공 령의 묘비 |
대사헌공(大司憲公) 휘 홍(諱弘) 대사헌공은 세조13년에 출생하여 성종 20년 진사가 되고 연산군 3년 별시 문과에서 장원(壯元) 홍문관 수찬, 교리, 연산군 10년 사헌부 집의, 중종 2년 경기도 어사(御使)로 나가고 문신중시(文臣重試)에 장원하여 사간원대사간에 승차하였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이어서 한성부 우윤을 거쳐 중종 4년 예조참판(禮曺參判)이 되고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중종6년 황해도 관찰사, 8년 별시(別試) 시관(試官)이 되고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중풍으로 위독하였으나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기용되고 중종10년 개성부 유수에서 11년 졸하니 50세였으니 사람들이 아까워했다. 묘소는 양주시 덕계동 도둔촌에 합폄하였다. |
20세 대사헌 홍의 묘소(양주시 덕계동 도둔촌) |
공의 계자는 서령공(署令公) 덕유(德裕)이며 중종 32년에 사마시 생원이 되고 음보(蔭補)로 종묘서령(宗廟署令)에 이르렀다. 명종 17년에 졸하니 묘소는 양주군 주내면 백양동 현석원에 장례하였고 훗날 좌참찬으로 추증되었으며 양주시 산북동으로 이장하였다. 아들은 극인(克仁), 극의(克義). 극례(克禮), 극지(克智), 극관(克寬) 5형제를 두었다. |
21세 덕유의 묘소(양주시 산북동) |
장남 극인(克仁)은 이조참판으로 추증되고 아들 성기(成己)는 선조37년 숙천, 장단부사와 옥천, 고양, 천안, 금산군수를 지내고 노직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묘소는 선친과 함께 양주군 덕계동 선영 후록에 있다. 차남 극의(克義)는 명종10년 식년시 문과병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을 지냈다. 묘소는 양주 덕계동 조부묘 후록에 있다. |
22세 극인의 묘소(양주시 덕계동 선고묘 후록) |
삼남 이판공 극례(克禮)는 명종13년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검열, 명종22년 병조좌랑, 호, 예, 병, 형,공조의 5조 정랑(正郎)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으며 형조 병조참의를 거쳐 선조5년 원주목사, 9년 길주목사, 선조 14년 부사(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충청감사에 보임되었으며, 16년 함경감사, 19년 대사간, 20년 이조참판을 거쳐 대사헌(大司憲), 호조판서(戶曹判書), 22년 이조판서(吏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으며 60세에 졸하니 임금은 2일간 조회를 폐하였다. 다음해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추록되고 의정부 좌참찬(左參贊) 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세자좌빈객으로 추증되었다.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등에 실려있다. 묘소는 양주시 산북동 선고묘 계하에 있다. 이판공은 수기(守己)와 정기(正己), 득기(得己) 등 7남 1녀를 두었으며 수기(守己)는 선조15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공조정랑, 양천현령 양성현감을 지냈다. 묘소는 양주시 산북동 선고 계하에 있으며 우윤 시(諰)기 비문을 지었다. |
22세 극의 묘소(양주시 덕계동 선고묘 후록) |
정기(正己)는 학문에 힘쓰고 벼슬을 하지 안했다. 배위 온양정씨는 현숙하고 행의가 있어 임난에 피란하면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각처를 발섭(跋涉)하였다. 7남3녀를 두었고 묘소는 산북동 선영 아래에 있으며 명재 윤증(尹拯)이 비문을 지었다. |
22세 극례의 묘소(양주시 산북동 선고계하) |
충숙공(忠肅公) 극지(克智)는 중종33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명종13년 식년시 진사로 합격하였으며 선조 원년 승의랑으로 식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수찬, 교리를 지내고 예, 병, 형조 정랑을 거쳐 사헌부 집의 선조 18년 부제학, 21년 대사헌(大司憲), 병조참판(兵曹參判),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내고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지경연의금부사(知經筵義禁府事)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에 이르렀다. 외직으로는 충청도도사 선조25년 경상도(慶尙道)관찰사(觀察使)로 있을 때 안동의 시조묘비를 개립하였다. 공은 선조 25년 비변사당상으로 궁궐을 지키고 있다가 왜적의 형세가 급박해지자 피를 토하고 졸하니 향년 55세였다. 충신(忠臣)의 정려(旌閭)와 충숙(忠肅)의 시호가 내렸다. 성품이 간결하고 효도와 우애가 깊으니 빙벽의 고절(苦節)로 일컬었다. 묘소는 양주시 산북동 선고(先考) 우록에 있으며 좌의정 이정귀(李廷龜)가 비문을 지었다. 공의 정려(旌閭)는 전북 익산시 왕궁면 장암리에 있다. |
22세 극지의 묘소(양주시 신묵동) |
감역공(監役公) 극관(克寬)은 명종1년 출생하여 음직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을 지냈다. 천성이 낙천하여 강호에 소요하며 68세에 졸하니 승정원좌승지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양주시 선교묘 우록 아래에 있다. 무후하여 극례의 3남 만회공(晩悔公) 득기(得己)를 계자로 삼았다. 득기(得己)는 다음에 상세히 기술한다. |
22세 극관의 묘소(양주시 산북동) |
양주시 산북동 대사헌공종중 선영신도비 |
- 이전글[유적지 순례 62-2] 牧使公 諱 博과 諸子孫 (종보 제431호 2011.5.1.) 12.04.20
- 다음글(유적지순례 60-2)安襄公 諱 攀과 諸子孫(3) (종보 제429호 2011.3.1) 12.04.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