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순례 60)安襄公 諱 攀과 諸子孫(2) (종보 제428호 20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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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991회 작성일 12-04-20 21:16본문
(유적지순례 60)安襄公 諱 攀과 諸子孫(2) |
정익공(貞翼公) 휘 징(徵) 지난호는 충정공의 차자까지 소개하였으며 이제 3자 22世 정익공(貞翼公) 휘 징(徵)부터 소개한다. 정익공은 호는 송암(松菴)이고 중종33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명종 13년 식년시(式年試) 생원3등으로 급제하고 명종 1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을 거쳐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이 되고 명종 22년 승정원 주서, 병조좌랑으로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 신록찬수에 참여하였다. 선조 원년 사간원 정언, 선조 6년 헌납, 선조 9년 사헌부 집의(執義) 동 13년 우승지로 당상관이 되고, 14년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선조 16년 강원감사(江原監司)를 지내고 19년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고 20년 충청감사(忠淸監司)에 부임하여 역서(驛書)로 13책을 펴 백성의 어려움을 풀어주니 임긍은 직무를 충실히 한다고 칭찬하였다. |
22세 정익공 징 묘소(경기도 성남시 금토동 월천 능안 선영우록 21년 함경감사, 선조 22년 52세로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경연 춘추관 도총부도총관(資憲大夫 兵曹判書 兼知義禁府事 經筵 春秋館 都摠府都摠管)이 되었다. 2년 후 평안감사(平安監司)로 부임하고 1592년 임진왜란에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부임하여 삭녕에서 흩어진 군사를 모아 군량미 조달에 진력하였다. 한성이 함락되자 몽진하는 왕을 호종하였는데 옥교를 구해 정성을 다해 보호하니 왕은 공을 증직하고 원종공신(原從功臣)1등에 봉하였다. 선조 25년 3월 수원을 수성하는 17책(冊)을 올리고 부산에서 12책을 펴니 임금이 우답하였으며 26년 운량사(運糧使)의 명을 받고 궁량이 동나지 않토록 하니 공이 컸다. 인조 5년 실록에 선조가 송경에 주필(駐驆)하면서 공을 불러 임진강을 파수하라 하니 공은 남은 병졸 200여명을 데리고 적병을 핍박하여 27일을 지탱하였다. 동년 11월 권율(權慄)과 함께 의병을 받아 익년에 도순찰사가 되었다. 5월에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가 11월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어 각처의 유민을 모아 경작시키는 안집사(安集使)의 부사직을 맡았다. |
22세 정익공 휘 징 신도비 |
공은 언제나 봉록을 현제와 고루 나누었기에 곳간은 비었으니 사람들이 효우(孝友)와 청백함에 감복하였다. 율곡 이이(李珥), 송강 정철(鄭澈), 우계 성혼(成渾)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으며 종가의 사당에 제복을 비치하였다. 정유재란에 공은 18조를 진하니 왕이 비답하기를 “진소(陳疏)가 글자마다 충적(忠赤)하니 깊이 가탄하며 병이 심하여 어찌 구제할바 없으니 경은 조초하여 상하 여망에 부응하라”하였으니 세상에서 참으로 명상소라 하였다. 공은 선조 31년에 61세로 졸하니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이사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二師)에 추증되고 정익(貞翼)의 시호가 내렸다. 백현 이경석이 시장을 짓고 우암 송시열이 신도비문을 지었다. 묘소는 경기 성남시 금토동 월천의 선영 우록에 있다. 5남3녀를 두었으니 장자 각(恪)은 생원진사 양시에 입격하여 별제(別提)에 이르고 아들 일(佾)은 무과하여 오위장(五衛長)을 지냈다. |
23세 경의 묘소(충북 음성군 삼성면 능산리 망월산) |
차남 흡(恰)은 음보로 현감(縣監)이 되고 흡의 아들 영(亻英 )은 선조 29년 증광시(增廣試)진사 2등으로 합격하여 병자호란에 강화도에서 호군에 피살되었다. 3자는 이(怡)이고 4자 동리공(東里公) 첩(怗)은 선조 39년 증광시생원 2등으로 합격하여 음보로 대흥현감에 이르고 광해군 8년 증광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통정대부 승지가 되고 인조 2년 호조참의(戶曹參議),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으며 가선대부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올랐다. 인조 5년 명나라에 행사(行使)로 다녀와 경주(慶州)부윤(府尹)이 되고 인조 7년에 졸하니 묘소는 금토동 월천에 있다. 동리공의 아들 준(儁)은 인조 11년 증광시생원 2등으로 합격하여 안악군수와 밀양부사를 지냈다. 5자 경(憬)은 호는 청계(淸溪)이고 선조 2년 출생하여 인조 7년 형조좌랑에 이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인조 9년 영평현령(永平縣令)으로 재직시 호변(胡變)의 우려를 10난으로 소를 올려 비답을 받으니 명소라 하였다. 호란에 임금이 항복하니 공은 두문불출하고 자제에게 교회(敎誨)하기를 “천지가 회색하여 사대부가 행세할 때가 아니니 농사하며 독서하라”고 하였다. 효종7년 졸하니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기주관에 추증되었다. 서울에서 조익(趙翼) 등 34인이 도의지교(道義之交)로 계첩을 지었다. 묘소는 월천의 동록에 있었는데 음성군 삼성면 능산리 망월산으로 이장하였다. |
24세 수졸재 대사헌 휴 묘소(음성군 삼성면 능산리 만월산) |
경의 아들은 휴(休), 어모장군 유(攸), 장사랑 주(儔), 수(脩)가 있으며 대사헌공(大司憲) 휴(休)의 호는 수졸재(守拙齋)이며 광해군 5년에 출생하여 병자호란에 선고의 뜻에 따라 과거를 폐하고 자제에게도 독서수신토록 하고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초려 이유태와 함께 영호계(永好稧)를 조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후에 아들이 귀히 됨에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여주군 오금산에서 음성군 삼성면 능산리 망월산으로 이안하였다. 9대손 태연이 묘지를 짖고 송석성이 신도비문을 지었다. |
24세 대사헌 휴 신도비(음성군 삼성면 능산리) |
홍성 낙향조 휘 확(確) |
21세 홍성 입향조 확 묘소(충남 홍성군 홍동면 대영리) |
공은 연산군 8년에 출생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충좌위 부사과(忠佐衛 副司果)를 지냈다. 관직을 끝내고 충남 홍성으로 낙향하여 명종 9년 53세로 졸하여 충남 홍성군 홍동면 대영리 한산동에 장사지냈다. 후에 손자 여주공 현(睍)이 조정에서 하사하는 벼슬을 고사하고 선고에게 특은(特恩)을 받도록하여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지의금부사(戶曹判書 謙知義禁府事)로 추증되었다. |
21세 입향조 확 묘비 |
아들은 승(昇)과 빙(憑)을 두었는데 증 영의정(領議政) 휘 승(昇)은 중종 32년에 출생하여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에 이르고 63세에 졸하니 4남 현(睍)의 특은으로 의정부 영의정 겸경연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사(議政府 領議政 兼經筵 弘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師事)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홍성군 대영리 한산동 선고묘 위에 있다. |
22세 증 영의정 승 묘소(홍성군 대영리 선고묘 위) |
승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성(省)은 무과하여 군수를 지냈다 하나 연도 미상이고 선조실록30년 부안현감, 39년에 소강첨사(所江僉使)를 지냈다. 묘소는 대영리 한산동 조고묘 계하에 있다. |
23세 성 묘소(대영리 조부묘 계하) |
차자 목(睦)은 인조 2년 이괄의 난에 왕이 공주로 파천하였을 때 식양을 헌납하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안했다. 묘소는 대영리 한산동에 있다. |
23세 면을 위한 유화재(한산동 묘소 아래 |
3자 면(眄)은 선조 7년 출생하여 충의위 병절교위로 충훈부(忠勳府)도사(都事)에 이르렀으며 41세에 졸하니 대영리 한산동 천마산에 장사하였다. |
23세 면의 묘소(홍성군 홍동면 대영리 한산동 천마산) |
24세 담 묘소(홍동면 선고묘 계하)<다음호에 계속> (권혁원 안양공 종회장, 권영환회장 감수, 현봉 권경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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