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지 순례 5 ] 石洲 權韠先生 詩家의 正宗(종보 제348호 200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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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561회 작성일 12-07-16 02:08본문
朝鮮朝 詩家의 正宗 석주선생의 휘(諱)는 필(韠)이고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이다. 본은 안동으로서 시조 태사공(權幸)의 21대손으로 선조2년(서기1569년)12월26일 한양 현석촌에서 추밀공(樞密公)의 12대손이며 문충공(近)의 6대손, 습제공(擘)의 5자로 태어나 숙부 진사공 별에 입적하였다. 습제공은 벼슬이 예조참의에 올랐으며 습제집1책이 전하고 있다. |
[화산서원 서천군 기산면 화사리] 석주선생의 형제는 별좌공(韋華), 송화공(韌), 송파공(韞), 초루공(韐), 수은공(韜)으로 6형제였다. 공의 6형제는 모두 시(詩)에 뛰어났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당가5보(唐家五寶)에 비하기도하고 강상7현(江上七賢)이라고도 하였다. 선생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형제간에도 우의가 두터웠으니 석주집에 잘 나와 있다. 선생은 가첩시를 짖고 권씨의 본관인 화산(花山)을 가문의 영예로 여겨 화산세첩(花山世牒)에 서를 하였다. 또한 선조의 업적을 기리어 13세 국제공(溥)제문을 짖고 종계를 조직하고 서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명군(名君)을 보필하여 태평천하를 이루려고 병서(兵書)를 탐독하고 육경에 뜻을 두었으나 시대상황은 당쟁과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생을 영입치 못하고 선생의 우국충절이 시로서 표출되곤 하였다. |
[비각 / 고양시 성석동] |
선생은 어려서부터 시에 능하여 7세에 장구시를 지었으며 19세에 진사 초시와 복시에 장원하였으나 1자 오서하여 출방 당하였다. 20세에 동악 이안눌, 조찬한형제, 구용, 이춘영, 이정구등 문인과 벗하여 시를 주고받았으며, 이안눌(東岳李安訥)과 강계에 귀양 간 정철(松江鄭澈)을 찾아가니 송강이 천상의 두 선인을 얻어 기쁘다고 하였다. 33세에 명(明)나라 사신 고천준(顧天峻)이 왔을 때 접빈사 이정구(李廷龜)의 천거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종사하였으며 이때 선조(宣祖)가 석주시를 보고 찬사를 아끼지 않고 순능참봉을 제수하였으나 숙배치 않고 백의 종사하였다. |
[석주선생 유허비 강화도 송해면 하도리] |
35세에 예조판서 이정구가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하였으나 벼슬을 버리고 강화에 들어가 오류 천에 초당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강화에서 도학정맥(道學正月永)을 저술하였다. 44세에 선비 임숙영(任叔英)이 책문시에 조정을 풍자하여 광해(光海)가 출방을 명하였는데 선생은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민가에 유포되었다. 조수륜(趙守倫)의 책장에서 공의 시가 발견되어 광해가 친국(親鞫)하였다. 대신 이항복(李恒福) 등이 사해줄 것을 간하여 함경도 경원 땅으로 귀양길에 동대문밖에서 장독으로 별세하니 임자 4월7일이었다. |
[석주선생 존영] |
문인들이 고양 감내에 장사지내니 묘갈명에 이르노라 “선비들이 선생의 의(義)를 사모하고 풍절을 우러러 한번 뵈오면 영예로 여겼으니 뜻은 우주를 덥었다.”하며 행장(行狀)에 월사 이정구(月沙李廷龜)는 “선생은 기운(氣運)이 우주에 가득하고 눈은 천고(千古)를 꿰뚫었으며 그 품은 바는 속인이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다. 계곡 장유(谿谷張維)는 “언론(言論)이 웅장하여 사람을 감동시켰다” 하며 윤증(尹拯)은 “선생은 고명하여 조예(造詣)를 꿰뚫음은 위로 경계(境界)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선생의 기개와 인품, 재능은 당대에 뛰어나 가히 따를 자가 없었다. |
[석주선생 유묵 연세대 박물관 소장] |
선생은 두보(杜甫)를 조종(祖宗)으로 당시(唐詩)에 능하였으며 칠언절구(七言絶句) 오언율시(五言律詩)와 고시(古詩)를 잘 지었다. 당시 문단(文壇)의 성황을 이루었던 대가들 중에 허균(許均)은 석주시를 뽑고 청묘(淸妙)하다 하였다. 남용익(南龍翼)은 려조(麗朝)시인 중에서 6인을 뽑았는데 익제 이제현(益齋李齊賢)에 비견하였다. 서포 김만중(西浦金萬中)은 三唐詩人을 이어 당시(唐詩)를 올바르게 배우며 가장 성대한 시기를 열었다고 하였으며 정조(正祖)는 “우리나라 시가(詩家)에서 권석주가 능히 성당(盛唐)의 바른 소리를 얻었으니 근세시인의 으뜸이다.”라고 하였다. 석주선생 문집은 석주집에 詩 836首 문 25편으로서 본집8권, 외집1권, 별집2권 등 11권4책으로 발간되었고 문집은 도학정맥과 한문소설 주생전이 있다. 선생은 인조반정후 원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추증되고 그 아들 항(伉)에게 관직이 하사되었다. 그 후 현종 조에 이르러 손 속(謖)이 요절함에 上은 선생의 절행을 보아 후사를 잊도록 초루공(草樓公 韐)의 증손 수(忄遂 )를 후손으로 명하니 크나큰 은전이었다. 선생은 광주시 운암동 운암사(雲巖祠)에 송제민(松齊民)을 주벽으로 배향되어 있으며 서천군 기산리 화산서원(華山書院)에 습제 권벽(權擘)을 주벽으로 배향하고 있다. <賢奉 權景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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