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순례 58] 平厚公 諱 衷과 諸子孫 2 (종보 제425호 20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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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696회 작성일 12-04-20 21:12본문
[유적지순례 58] 平厚公 諱 衷과 諸子孫 2 |
예참공禮參公 숭례崇禮와 소요정逍遙亭 윤綸 예참공 숭례(崇禮)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사직공 함(緘) 차자는 생원공 집(緝)이며 성종실록에 진궁위로 기록되었다. |
예참공(좌) 소요정(우) 묘소 (강능시 저동) ) 3자는 소요정(逍遙亭) 윤(綸)이다. 태종 15년(1415년) 출생하여 세종 29년(1447년) 33세로 친시문과(親試文科) 정과(丁科)에 급제하였다. 공은 문종 2년 예문관 대교(待敎)로서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 세종(世宗)실록(實錄) 찬수에 참여하고 세조 1년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고 세조6년 세자가례색의 낭청(郎廳)을 맏고 10월 평양에서 치른 전시(殿試)에서 대독관(對讀官)이 되었다. |
낙향조 참봉공 묘소(강능시 저동) |
세조7년 사정전연회 부시에 1등하였고 세조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오고 세조 9년 제주 경차관(敬差官)으로 나아가 왜인 포로사건을 해결하였다. 성종 6년(1475년) 61세에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성종 10년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이어 이조참의(吏曹參議)에 보임되었다가 성종 11년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다. |
저동 재사 |
성종6년 존경각(尊經閣)을 창건하고 그 장주를 지내면서 제생을 감교하니 태학생들이 장자라 하였다. 성종18년 한명회, 정창손 등과 기영회를 열었으며 공은 관직을 끝내고 함경도 덕원에 은거하며 소라리에 정자를 짓고 소요정(逍遙亭)이라 하니 자호가 되었다. 성종 24년 79세로 졸하니 동국여지승람과 서거정의 사가집 등 당대 많은 문집에 공의 사적과 부시가 있다. 묘소는 경기 장단에서 여주 가야리 선고 묘 앞으로 이안하였다가 강릉 서회포(저동292번지)로 다시 천봉하였다. |
참봉공 묘표와 묘비(저동 묘소입구) |
소요정 윤은 구와 송, 두 아들을 두었는데 강릉공(江陵公) 구(懼)는 세조 14년 식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이르고 외직으로 강능부사(江陵府使)를 지냈다. 참봉공(參奉公) 송(悚)은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 참봉을 지내고 막내 누이가 연산군의 숙의(淑儀)가 되자 강릉부사로 나간 백씨를 따라 갔다가 강릉(江陵)의 산수에 매료되어 돈거하니 이로부터 자손이 경포호(鏡浦湖) 일대에 세거(世居)하였다. 묘소는 경포호의 서회포(강릉시 저동292번지)에 쌍분이다. |
사복시정 수 묘소(저동) |
강릉공의 증손 22世 사절공(使節公) 경우(慶祐)는 선조 18년 별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청주, 안주, 원주목사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左贊成)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다. 경우의 아들 심(淰)은 인조 2년 증광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장령으로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역임하고 부제학(副提學)에 올랐으며 3남 억(澺)은 광해군 4년 식년시 진사 2등으로 합격하고 인조 15년 별시문과을과(別試文科乙科)에 급제하여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냈다. |
를 위한 대전재사( ) |
강릉 낙향조 송(悚)과 오죽헌(烏竹軒) 처균(處均) 강릉 낙향조인 19세(世) 참봉공 송(悚)은 진(璡) 수(璲) 연(璉) 세 아들을 두었는데 명암공(鳴巖公) 연(璉)은 중종14년(1591년)사마시 생원,진사(生員,進士兩場)에 합격하고 진사는 장원하였다. |
연을 위한 명암정 |
그후 왕자사부, 세마참봉을 세차레나 명 받았으나 공은 간신 좌의정 김안로가 싫어 나아가지 않으니 사람들이 공을 징군(徵君)이라 칭하였다. 그후 후손들이 강능시 대전동 태장봉 우럭바위에 누정을 세우고 공의 아호를 붙여 명암정(鳴巖亭)이라하였다. 공은 유훈을 남겼으니 요지는 “조정에서 향곡에 이르기까지 소인들이 득세하고 있으니 세간에 어진이가 있어 조정에 나아가 소신대로 행한다면 음해에 힙쓸려 ‘멸문망신지환’을 만날 것이요 어리석은 자라면 소인배에게 아첨하여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망치게 되니 이를 어찌 탄식치 않을 수 있으랴! 오호 후세 자손들이여 추후도 청운의 뜻을 두지말고 뜻을 기르면서 몸을 바르게 닦으라”하였다. |
수성각 |
강릉시 대전동에는 공을 위한 대전재사(大田齋舍)가 있으며 안동권씨수성각(安東權氏樹聲閣)에 3위의 효열비가 있는데 명암공 연의 손자 처평(處平)의 배위 증 정부인 강릉최씨가 임난시 왜적에게 쫒겨 투신 자살하였는데 그 장자 덕유(德裕)가 모친의 시신을 보호하자 왜적이 물러났다. 조정에서 정문을 내리고 덕유에게 효행의 비를 세웠다. 처평의 아우 처직(處直)의 배위 강릉김씨도 같은 임란시 왜적에게 욕보이지 않으려 활복 자결하니 조정에서 정문을 내렸다. 동국신속삼강행실록 열려편에 사적이 실렸다. |
오죽헌 본당 |
수의 계자 화(和)의 배위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신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이다. 화(和-生父 璉)의 아들은 오죽헌(烏竹軒) 처균(處均)으로 공은 중종 36년 출생하여 교수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원래 오죽헌 건물은 최치운(崔)致雲)이 창건하였으나 그 아들 회응현이 사위 이사온에게 물려주었고 다시 사위 신명화(申命和)에게 물려주었으며 신명화는 다시 사위인 권화(權和)에게 상속함으로써 18대에 걸쳐 권문의 종가로 이어왔다. 강릉의 오죽헌은 공의 외가로 이종인 율곡(栗谷) 이이(李珥)도 이곳에서 출생하였지만 권처균(處均)공이 소거(所居)하면서 당호를 오죽헌(烏竹軒)으로 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다. |
오죽헌 조감도 |
오죽헌은 보물제165호로 지정되고 1975년부터 정화사업으로 문성사, 기념관등이 걸립고 현재 유물전시관이 공사중에 있다. 오죽헌공의 묘소는 강릉 도왕동 조산에 있으며 아들 효순(孝純)은 노직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은 경문을 읽히고 여류 예술가로서 현모양처의 귀감으로 율곡 이이(李珥)의 학문을 깨우쳐주었다. 율곡은 오죽현 권처균의 이종으로서 문과 장원급제하고 대사헌, 이,형,병조판서를 역임하고 퇴계 이항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로 기호학파이며 10만 양병을 주장하고, 문묘에 종사되고 자운서원등 20 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
오죽헌 유래 |
소요정의 사위는 이요수(李堯壽)와 호군인 양허용(陽許容) 그리고 여는 연산군의 숙의(淑儀)이다. (감수: 강릉 낙향조16세손 권오열, 17세손 권혁윤 현봉 권경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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