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순례 56-1]耆老社之始 檢校門下侍中 永嘉府院君 靖簡公 諱 僖(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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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164회 작성일 12-04-20 21:07본문
[유적지순례 56-1]耆老社之始 檢校門下侍中 永嘉府院君 靖簡公 諱 僖(1) |
공은 충정공(忠靖公) 휘 고(皐)와 합천 이씨(陜川 李氏) 사이에서 고려 충숙왕 6년(1319년) 송도에서 출생하였다. 공의 아호는 수월정(水月亭)이며 평소 선행과 베풀기를 좋아 하여 불사(佛事)에 시주를 많이 하고 사림(士林)의 교우가 넓고 국가의 위난에 세운 공이 컸다. 5대조는 광록대부(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휘 수평(守平)이다. 증조(曾祖)는 단성양절공신(端誠亮節功臣)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 첨의정승(僉議政丞) 판선부사(判選部事) 집현전(集賢殿)·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휘 단(㫜), 호(號) 몽암(夢庵), 시호 문청공(文淸公)이고 조부는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휘 보(溥), 호 국재(菊齋) 시호(諡號) 문정공(文正公)이다. 선고(先考)는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영서연사(領書筵事) 상호군(上護軍)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휘 고(皐), 시호 충정공(忠靖公)이며 배위는 강양군부인(江陽郡夫人) 합천 이씨(陜川 李氏)이다. 공의 두 형은 판서공(判書) 엄(儼)과 군부정랑공(軍溥正郞) 간(侃)이다. |
정간공 휘 희 묘소(경기도 고양시 성사동 사근절의 성지산) 공민왕(恭愍王) 십년(十年) 신축(辛丑) 가을에 공의 나이 43세에 원(元)나라에서 홍건적(紅巾賊)이 20만의 무리로 압록강을 건너 삭주(朔州)에 침입(侵入)하고 11월에 파죽지세로 절령책(岊嶺柵)을 공격(攻擊)하니 아군이 대패(大敗)하여 왕은 도성을 버리고 안동(安東)으로 몽진(蒙塵)하고 적은 마침내 개경(開京)을 함락하여종사(宗社)를 유린하고 양민을 주살(誅殺)하였다. 이듬해 정월 이여경(李餘慶) 최영(崔瑩) 등이 관군(官軍) 20만으로 동쪽 교외에 주둔하여 경성(京城)으로 나아가 포위하니 공이 이여경 휘하의 호군(護軍)으로 출전하여 숭인문(崇仁門)을 담당, 다음날 새벽(昧爽)에 몸소 수십기(數十騎)를 거느리고 돌입하여 진격(進擊)하니 적의 무리가 놀라 괴멸하였다. 동북면 상만호(上萬戶)이던 이태조(李太祖)가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으로서 친병(親兵) 2천을 거느리고 뒤따라 공격(攻擊)하고 여러 장수가 속속 합세하니 적의 무리가 서로 짓밟아 죽여 널린 시체가 성안에 가득하였다. 이날 주륙(誅戮)한 적의 무리가 무릇 10여만이고 원제(元帝)의 옥새(玉璽)와 금보(金寶) 및 금은동인(金銀銅印)과 병장등물(兵仗等物)을 노획(鹵獲)하였으며 남은 적들은 압록강을 건너 사라지니 드디어 난리가 평정되었다. 공이 그 수공(首功)으로 녹봉이 오르고 외직(外職)으로 홍주도 병마사(洪州道兵馬使)와 내직의 판서(判書) 등을 거쳐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지고 후에 영가군(永嘉君)으로 개봉(開封)되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
정간공 묘정비 |
공양왕 4년(1392년) 임신 4월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고 7월에 이성계가 왕을 폐하고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일어났다. 공이 이때 74세이다. |
정간공 묘소의 석탑과 석등 |
태조(太祖)이성계가 잠저시(潛邸時: 왕에 오르기전)에 공과 더불어 일찍이 같은 이문(里門) 안에 살면서 돈독히 사귀어 서로 형제로 불렀으며 조선이 개국하고 태조가 전조(前朝)의 고구(故舊)라 하여 권우(眷遇-임금이 신하를 대함)함이 통상을 초월하였다. 태조 원년 임신(壬申) 가을에는 공의 중남(仲男) 평후공 충(衷)에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제수하고 이어 부자(父子)에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내리고 이듬해 11월 공을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진봉(進封)하였다. 태조3년(1394년)10월에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遷都)하고 기영회(耆英會)를 설치하고 몸소 입사(入社)하여 기로(耆老)의 군신(君臣)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관부(官府)의 으뜸에 두니 이것이 기로사(耆老社)이며 공이 그 수좌(首坐)로서 화상(畵像)이 영수각(靈壽閣)에 게열(揭列)되었다. |
정간공 묘소의 문관석1, 2 |
공의 소장(少壯) 시대의 사적(事跡)은 거의 전해 오는 기록이 없다. 단지 공의 나이 10여세인 충숙왕(忠肅王) 연간(年間)에 공보다 4년 먼저 태어난 진한국대부인 한양 한씨(辰韓國大夫人 漢陽 韓氏) 정승(政丞) 문절공(文節公) 복재선생(復齋先生) 종유(宗愈)의 딸을 맞이하였다. 공은 처음 벼슬을 음보(蔭補)로 시작하여 내외직(內外職)을 전전한 끝에 지위가 4품인 대부(大夫)에 이르러 있었다. 조야(朝野)에서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으로 일컬어졌고 비록 검교직(檢校職)이지만 수문전 태학사(修文殿 太學士)를 겸대(兼帶)하여 문단의 많은 선비와 더불어 시를 읊으며 창화(唱和-시를 읊고 화담함)한 것이 적지 않을 것인데 전하는 것이 전혀 없다. 공의 영정(影幀)은 이미 영수각(靈壽閣)에 걸렸는데 태조가 또한 공과 대부인의 화상(畵像)을 하사하였다. 공은 일찍이 적성(積城-현 경기도 연천군 백석면 구미리194번지)에 별업(別業)을 경영하고 자손의 면학지자(勉學之資)로 쓰며 또한 그곳 구연(龜淵) 강벽(江壁)에 모정(茅亭-띠집)을 지어 독서당을 삼고 강정(江亭)이라 이름하여 만세(晩歲)에 수시로 올라 음수영월(吟水咏月)하니 세인이 이를 수월정(水月亭)이라 부르고 혹은 그 동명(洞名)을 수월리(水月里)라 하여 그것이 당호(堂號)로 되었다. 조선 개국 후 태조(太祖)는 적성의 초야에 은거하고 있는 공의 3子 충(衷)과 충주로 내려가 있는 4子 근(近) 가운데 평후공 충(衷)을 불러 올려 신왕조에 참여시키는데 성공했다. 여기에는 가첩에 전해 오는 일화가 있다. |
정간공 신도비각 |
고려의 운세가 다하려 하자 이를 보고 형세가 어쩔 수 없음을 안 평후공은 적성의 구연으로 내려가 둔거(遯居)하며 아우 양촌을 시켜 스승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처변지도(處變之道 : 변혁의 시대에 처세하는 도리)를 묻게 하니 목은이 대답해 보내기를 ‘길이 사람의 일로 보아서는 오히려 매이잖고 자유(自遊)함이 가하겠고 어버이를 모시는 정세로 보아서는 남이 말하기 어렵다’ 하였다. 목은조차 이렇게 대답해 보낸 것을 보면 당시에 공의 일가가 처했던 고뇌의 형세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결국 노부모와 형제를 생각한 평후공은 적성의 촌사에서 나와 새 왕조에 출사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이제 정간공 일가에서 남은 이는 4子 양촌 하나였다. |
정간공 희를 위한 재실(고양시 성사동) |
태조 2년(1393년) 2월 국호(國號)를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고친 태조는 도읍도 송도에서 옮기고자 하여 계룡산(鷄龍山)에 신도(新都)를 정하기로 했다. 공주(公州)에서 충주(忠州)에 은거중인 공의 4子 양촌을 불렀다. 양촌(陽村)은 태조와 부친과의 관계를 떠나 고려 조정에서 거듭 사지(死地)에 빠졌을 때 태조의 도움을 받은 바 있어 사은(私恩)의 의리를 또한 모른다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어쩔 수 없이 양촌이 계룡산의 행재소(行在所)로 불리어 오자 태조는 환조(桓祖)로 추존(追尊)된 그 부친 이자춘(李子椿)의 묘소인 정릉(定陵)의 비문을 짓게 하였다. |
적성 별서의 유허(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구미리 194번지) |
정간공의 별업지 이며 슬하 자손이 출생하여 유년기를 보낸 곳 태조가 9월에 정간공에게 시켜 양촌을 다시 서울로 부르게 하고는 올라오자 벼슬을 내려 검교 예문·춘추관 태학사(藝文·春秋館 太學士) 겸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배(拜)하였다. 또 11월에 정간공에게 검교 문하시중 영가부원군(檢校門下侍中 永嘉府院君)으로 진봉시켰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야사(野史)에 전해오는 일화가 있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제2권 ‘태조조 문형 권근조(太祖朝 文衡 權近條)’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
구미리 강변의 수원정 유지(중간 부분이 띠집을 지은 자리라 전한다) |
「상(上)이 개국하였는데 공(양촌)이 오히려 굽히지 않으니 상이 권유하여 받아들이고자 하되 그 방법이 없었다. 공의 아버지 희(僖)가 공의 아들 규(跬:양촌의 3子)를 길렀는데 나이가 이미 장성하여 미혼인고로 곧 공주(公主:태종의 경안궁주)로 그 아내를 삼게 하였다. 하루는 상이 희에게 말하기를 “근(近)이 나를 잊은 것 아니가? 선조(先朝:고려)를 위하여 수절(守節)하는 것이 아름다우니 좋은 일이겠으나 그대의 나이가 이미 박두하였는데 근(近)이 근친(覲親)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충성에만 돈독하고 효도에는 느슨한 것인가?” 하였다. 희가 대답하기를 “근(近)이 어찌 늙은 아비를 잊겠습니까. 다만 몸에 병이 많아 앓아 누워 일어나지 못해 그런 것입니다. 근래 그 서신을 얻어 보니 오래지 아니하여 와서 신(臣)을 볼 것입니다.” 상이 심히 기뻐하며 말하기를, “근이 어느 날에 발행(發行)하여 어느 날에 도성에 들어오는고?”하고 물었다. 희가 권사(權辭:임기응변)로써 대답하고 나와 곧 사람을 보내 근이 오기를 재촉하였다. 공이 부득이 충주에서 출발하니 감사(監司:관찰사)는 등도(登途)하였다고 계문(啓聞)하고 장막을 쳐 놓고 기다렸다. 공이 차마 경사(京師)로 직접 오지 못하여 구불구불 길을 돌면서 수원(水原)에 이르니 희가 사람을 보내 재촉하였다. 한강(漢江)에 이르자 희가 친히 나가서 맞아 보면서 종일토록 사람을 물리치고 공에게 이야기했다. |
수월정 띠집을 지은 터 (앞에 임진강이 흐르는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
이에 강을 건너와 입성해서는 곧바로 대궐로 들어가니 상(上)이 빈객의 예로써 편전(便殿)에서 대접하고 팔도(八道)의 그림을 나누어 그린 병풍을 펼쳐 놓고 손으로 지목해 가리키면서 가로되, “아무 누각 아무 정자를 가지고 나를 위해 기문(記文)을 지어 한 나라의 명승지를 호사케 하라” 하니 공이 물러나와 지어 올렸다. 상이 곧 지제교(知製敎)의 직함을 더하니 공이 어쩌지 못하여 명을 배수(拜受)하고 나와 도로 충주를 향해 돌아오는 날 상소를 올려 전조(前朝)의 충신 정몽주(鄭夢周)를 포증(褒贈)하여 절의(節義)를 숭상케 할 것을 청했다. 대간(臺諫)에서 논계(論啓)하기를 “난신(亂臣)을 어찌 충신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근의 상소는 망령되옵니다” 하였으나 상은 중의(衆議)를 물리치고 이를 좇았다.」 「연려실기술」은 조선이 개국된 지 4백 년이 지난 정조(正祖) 때의 학자 이긍익(李肯翊)이 편술한 야사(野史)의 집대성이다. <다음에 계속> <자료: 정간공실기 현봉 권경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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