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화공(昌和公)의 자손들 2(종보 제482호201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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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916회 작성일 15-07-27 11:07본문
현성군(玄城君) 정주(定柱)
창화공의 증손으로 조부는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오른 현복군(玄福君) 형(衡)이고 부친은 중대광(重大匡) 보문각(寶文閣)제학(提學) 현성군(玄城君) 휘 용(鏞)이다.초명은 준(濬)이다. 고려사에 공민왕 시해사건에 아우 진(瑨)이 연좌되어 피화되었으나 공은 모면하여 부친의 배소인 원주에 함께 적거(謫居)하였다.
사진1 : 17세 현성군 정주 묘소(양주시 봉양동 산63)
조선(朝鮮) 개국 후 출사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오르고 보사원종공신(輔社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또 무훈장군대원수라는 기록이 있는데 행직인지 알 수 없다. 또 현성군(玄城君)으로 봉군된 것은 부친의 玄城君을 습봉한 것으로 여겨진다. 구보에는 장군으로 만 기록되었는데 1983년 추밀공파보에 봉군으로 나왔는데 공의 졸후 세장지는 경기도 양주의 회천이며 자손이 세거하고 7대손까지 이곳에 묘지를 이루고 있음은 인근이 사패지였음을 증명한다. 공의 부친이 원주에서 우왕이 보낸 자객에 의하여 피화되고 홀로 적거하였는데 어떻게 조선조에서 후광을 얻었는지 의문이 간다. 공의 배위 문화유씨는 밀지사 계조(繼祖)의 딸인데 처남 유량(柳亮)은 문과급제하여 공양왕 2년 형조판서를 지내고 4년 이조전서(吏曹典書)의 요직에 있다가 조선이 개국하자 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이어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강릉도 관찰출척사(觀察黜陟使)를 겸하고 태조 5년 계림부윤으로 왜적과 전투 중 공을 천거(薦擧)해 공을 세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유량(柳亮)은 태종 2년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병조, 이조판서, 우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묘소는 양주시 내촌의 어등산에서 봉양동 산63번지로 면봉하였다. 아들은 위려공 희달(希達)과 희수(希遂), 희진(希進) 그리고 3녀를 두었다.
위려공(威戾公) 희달(希達)
18세(世) 위려공(威戾公) 희달(希達)은 태조(太祖)조에 개국원종공신(開國元從功臣)이 되었음이 태종 16년 실록에 있다.
사진2 : 18세 위려공 희달 묘소(선고묘 계하)
정종 2년 이방원(李芳遠)의 핵심으로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정종 2년 대장군(大將軍)으로 제수되었고 태종 1년 대호군(大護軍), 태종 3년 상호군(上護軍), 태종 4년 임금이 한양 도읍지를 시찰할 때 호종하였다. 태종 8년 총제(摠制), 동 10년 연안부사, 태종 12년 총제겸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로 임금의 매사냥에 호종하고 상왕 정종에게서 옷을 하사받았다. 태종 18년 왕이 온천(溫泉)에 행차하는데 공이 호종하였다. 공은 세종 1년 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가 되어 고부사(告訃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 2년 임금과 상왕이 해주로 군사훈련 갈 때 사금절제사(司禁節制使)로 호종하였으며 세종 3년 도총제(都摠制)로서 상왕을 양주에 호종하고 세종 5년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두 번째 명나라에 다녀오고 탄핵으로 유배되었으나 원종공신에 오래도록 태종을 호종한 공로로 세종 8년 자헌대부의 품계와 직책이 회복되었다. 세종 14년 중추원사(中樞院事)가 되고 세종 16년 졸하였다. 왕은 시호를 위려(威戾)로 내리고 “성조(聖祖)를 잠저에서 만나 원종(元從)의 반열에 오르고 곧은 신하로 허여(許與)하는바 되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 말이냐” 하였다. 묘소는 양주시 봉양동 선고묘 계하에 있다.
19世 인(軔)
위려공의 장자로 관직은 사정이고 후사는 대호군(大護軍) 계충(繼忠), 차자 계효(繼孝), 3자 계지(繼智)와 2녀를 두었다. 위려공의 차자 사정 축(軸)은 가첩에 진잠현감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묘소는 양주시 봉양동 어등산 선영에 있다.
20世 계지(繼智)
현령(縣令)이며 상호군으로 나온다. 아들은 우직(友直)과, 우량(友諒)을 두었다. 묘소는 양주시 봉양동 어등산 선영에 있다.
21세 우직(友直)
어모장군(禦侮將軍) 법성포만호(法聖浦萬戶)이다.
사진3 : 21세 어모장군 우직 묘소( 봉양동 산63)
명 가정34년 조선 명종 10년(1555년) 을묘(乙卯)왜변시 호장인 공은 법성포만호장군으로 경기도 양주에서 천리길인 법성포로 출정하였으나 도착해보니 이미 관군은 패하여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공은 흩어진 장졸을 모집하여 의병 본부대장으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현지에서 전사하였는데 공의 애마가 시신을 태우고 고향인 양주 회천 자택 대문 안으로 들어와 쓸어져 죽었다. 이에 충마(忠馬)를 거두어 공의 묘소 아래에 묻으니 말뫼가 되고 세칭 권장 판대기라 부른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유고가 있다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은 빈(彬)을 두었다. 묘소는 양주시 봉양동 선영 위려공 묘소 아래에 있다. 공의 묘소 앞에 말무덤이 있고 문인석이 보인다.
22世 빈(彬)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가선대부 경상병사에 이르렀다.
사진4 : 22세 빈 묘소
중종 20년 선전관을 지내고 세자익위사에 있었다. 중종 24년 모화관(慕華館)의 시사(試射)에서 수위(首位)하여 가자되고 경상도 수사를 거쳐 중종 32년 충청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하였다. 중종 32년 경원부사를 지내고 38년 내승을 겸직하였다. 가첩에는 사마시 생원, 진사 양장에 장원하였다고 한다. 후사는 이형(以衡), 이공(以公-수군정제사), 이평(以平-府使), 연(然) 4형제를 두었다. 묘소는 양주시 봉양동 선고묘 계하 말무덤 아래에 있다.
23世 이형(以衡)
무과(武科)하여 판관(判官)을 지내고 광량진 첨사(僉事)에 이르렀다.
사진5 : 23세 이형 묘소(선고 계하)
파보에 선조 10년 정축(丁丑)1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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