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순례 46] 正獻公 諱 王煦 (종보 제409호 200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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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997회 작성일 12-04-20 19:41본문
[유적지순례 46] 正獻公 諱 王煦 |
정헌공은 국재공 溥의 제 3자로서 고려 충렬왕 22년(서기1296년) 송도에서 출생하였다. 초명은 권재(權載)이며 충선왕이 왕후(王煦)로 사성명(賜姓名)하였다. 정헌공은 고려 후기 고려가 몽골에 침입받아 몽골(1271년 원나라로 개명)의 간섭을 받는 시기에 태어나 충선왕의 아들로 입적되어 왕과 함께 元에서 지내는 기간이 많았으니 고려 후기 동아시아 정세를 이해해야 하겠다. |
경기도 파주시 장단군 진동면 기온리(하포리) 정헌공 묘역 고려 23대 고종 18년(1231년) 몽골의 침입을 받아 국토가 피폐화 되고 1259년 고종은 태자(24대 원종)를 몽골에 보냈고 원종이 즉위하자 장남이 또 볼모로 원나라에 가 원의 공주와 결혼하고 원종이 죽자 왕위에 오르니 25대 충렬왕(忠烈王)이다. 충렬왕은 원의 내정간섭이 심하여 1297년 왕위를 세자에게 선위하였으니 26대 충선왕(忠宣王)이며 충선왕은 즉위하자 광범위한 개혁을 하였으나 권신들에 의해 원나라의 명으로 실각하고 1298년 다시 충렬왕이 복위하였다. 1308년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이 다시 복위하여 정치혁신을 단행하였으나 1313년 아들에게 선위하였으니 27대 충숙왕(忠肅王)이다. 충선왕은 1320년 원나라 환관 백안독고사의 모함으로 티벳으로 유배되었다. 1316년 상왕인 충선왕의 조카 고가 원나라에 충숙왕(忠肅王)을 무고하여 왕은 5년간 연경에 머무르고 1325년 귀국하여 1330년 세자(28대 忠惠王)에게 양위하고 원으로 들어갔으나 충혜왕(忠惠王)이 실정으로 폐위되자 충숙왕(忠肅王)은 1332년 다시 복위하였다. 29대 충목왕(忠穆王)은 볼모로 원에 갔다가 8세에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30대 충정왕(忠定王)까지 고려는 사실상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31대 공민왕(恭愍王)은 원에서 노국공주를 비로 맞고 1352년 즉위하자 몽골 관제의 폐지와 명나라와 협력, 영토를 수복하는 등 국위를 떨쳤으나 국정을 신돈에게 맡겨 국운의 쇠퇴를 초래하였다 |
하포리 정헌공 묘소 |
정헌공은 고려 국운의 쇠퇴기인 1296년 출생하여 1352년 별세하니 고려의 난정기를 살면서 마음과 몸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고 왕을 위함이었다. 東史에 의하면 정헌공은 부친 국재공의 문인 중 1인이었으며 전헌공과 충선완과의 인연은 충선왕(忠宣王)이 백씨 창화공(昌和公) 준(準)에게서 공의 이름을 듣고 낭장(郎將)에 배하였으며 삼사(三司)의 판관(判官)을 삼았다. 충선왕 3년(1311년) 왕이 원나라로 불려갔는데 공은 16세로 호종하니 충선왕은 성씨를 왕(王)씨로 이름을 후(煦)로 사성명하며 아들로 삼았다. 1313년 왕이 환국하여 공을 수레에 태우고 다녔다. 공은 사복시부정을 거쳐 충숙왕 1년에 상중대광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이 되고 충숙왕 3년 21세로 계림부원대군(鷄林府院大君)이 되었다. 공은 충숙왕 7년 상왕인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서적을 수집하여 고려와 문화교류에 힘썼는데 충선왕은 대유학자를 불러 연구케 하면서 공의 매부인 익재 이제현(李齊賢)으로 하여금 학술토론 시키면서 원제(元帝)에게 황태자 속고적(皇太子速古赤) 동궁시위에 계림군공(鷄林郡公)의 작위를 주도록 청하였다. 같은 해 12월 원의 환관의 모함으로 충선왕이 유배되니 공은 황제에게 대신 갈 것을 청했으나 불허되었지만 어여삐 여겼으며 환관도 해를 끼치지 못하였다. 국재공과 창화공, 익재, 권한공 등이 상왕의 구명을 청하였고 원의 황제가 즉위하자 사면되었다. |
정헌공과 배위 홍씨 비석 |
충선왕이 51세로 죽자 공은 재궁을 받들고 귀국하여 종신토록 제사 하였다. 공은 충혜왕 3년 계림군공(鷄林郡公)의 자격으로 원에 가서 충선왕과 충숙왕의 시호를 받아 오고 2년 후 8세로 즉위한 충목왕을 모시고 귀국하자 모부인(母夫人)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이 별세하였는데 상중에 기용되어 첨의우정승(僉議右政丞)이 되었다. 공은 선법판서(選法判書)를 맡았는데 관리들의 폐해가 크므로 영을 내려 돌려주었으며 충목왕 1년 세도정치의 본산인 정방(正房)을 폐지시켰는데 탐악한 자들에 미움을 사 파직되었다. 다음 해 선고(국재공)이 별세하였는데 원의 황제가 상복을 벗고 입조하라 하니 원에 가 이듬해 공과 좌상 김영돈이 황제의 칙지를 받들고 돌아와 정치도감을 설치하고 판사(判事)가 되어 부패를 척결하고 전제(田制)를 정비하였다. 충목왕 3년 공은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에 보임하여 정치도감에서 물러나니 개혁정치가 끝나버렸다. 충목왕이 죽자 대비가 공에게 원상(院相)으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일을 보게 하니 공은 이제현을 원나라에 보내 강릉대군(공민왕)으로 후사를 이으려 하였으나 11세의 충정왕이 되었다. 충정왕 1년 공은 원에 가 원자가 습위하여 부패정치를 막으려 원에 유학중인 강릉대군과 긴밀히 일을 도모하고 귀로에 요동에서 병환으로 졸하니 향년 54세였다. 충정왕(忠定王)은 15세에 공민왕에게 손위하고 공민왕이 즉위하기 전의 공로로 후일 공민왕 묘정에 배향신이 되었다. 마지막 관직은 순성병의동덕보리공신 삼한벽상삼중대광 도첨의정승 판전리사 상호군 계림대원부군(純誠秉義同德輔理功臣 三韓壁上三重大匡 都僉議政丞 判典理事 上護軍 鷄林府院大君)이다. 공민왕 6년, 왕은 10년간 원에 있을 때 시종하여 공력하였던 신하들에게 상을 주었는데 왕후(王煦)는 불행히 먼저 몰하여 애석하니 마땅히 자손에 녹을 내리라 하며 정헌(正獻)의 시호를 내렸으며 우왕 2년 묘정에 배향되었다. |
정헌공 신도비 |
이에 앞서 무자년(1348년) 봄 흉년이 들었는데 특히 양광(경기.충청)과 서해지방이 더욱 심하였다. 공은 창고를 열어 구제하니 소생한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공은 사람됨이 강정 장중하고 체격이 꿋꿋하여 의연하였으며 평생 청렴하여 백성을 이롭게 하고 폐해를 없앰에 마음을 썼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동면 기온리(하포리)에 축좌로 쌍분이며 묘지문은 대제학 초은 이인복(李仁復)이 짓고 영돈령부사 권홍(權弘)이 썼다. 동난 후 실전되었다가 후손 이도(彛道), 오영(五永) 등이 각방으로 군부대와 협력하여 우거진 나무를 벌채하고 사초하여 신도비를 세웠다. 아들은 밀직공(密直公) 왕중귀(王重貴)이며, 중국의 권여의 손자 정승공(政承公) 왕상좌(王上佐)를 왕의 명에 따라 아들로 삼았다. 밀직공 왕중귀(王重貴)는 충숙왕 4년(1335년) 출생하여 정승 기철(奇轍)의 사위가 되었다. 공민왕 1년(1352년) 18세로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고 공민왕 5년 광록대부(光祿大夫)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으나 동년 원나라와 혈연관계를 맺은 기로(奇盧)의 변이 일어나 공의 장인 기철과 정승 노책 그리고 공의 숙부 복안부원군 판삼사사(判三司事) 권겸(權謙) 등이 참살되니 공은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명나라의 기세가 상승일로에서 원나라가 약화되었지만 고려는 원나라의 종주권이 컸다. 공민왕의 배원정책으로 폐위되었다가 복위되는 공민왕 13년(1364년) 왕은 공을 동지밀직사사로 복직시켜 원에 사신으로 보냈다. 복직된 공은 다음해 신돈(辛旽)의 출현을 저지하려다 파직되었다. |
밀직공 휘 중귀 묘소(우측이 정헌공묘) |
명나라가 득세하고 원은 북으로 밀려 북원(北元)으로 되었으며 공민왕 18년 고려는 연호를 명의 홍무를 사용하였다. 이때 노은이 북원의 조서를 들고 오는데 노은을 잡아 문초하니 노은은 왕중귀 등과 통모하였다고 거짓 자백하여 공은 나이 35세에 화를 입었다. 공의 배위 행주 기씨는 84세에 졸하였으며 조선조에 열녀로 정려를 받았다. 고려사절요에 재상 지윤이 공의 처에 장가들고자 하였는데 기씨는 지윤의 뺨을 때리고 꾸짖어 물러갔으며 최영에게 사실을 고하였다고 하였다. 공의 묘소는 기온리 선고 묘 우측에 쌍분으로 있으며 후손 희문(熙文)이 비문을 지었다. 정승공 왕상좌(王上佐)는 초명은 권상재(權尙載)이며 1330년 북경에서 출생하였다. 선대가 중국 권씨인 국자감 학자 권여(權輿)의 손자로 출생하여 허겸에게 예학을 배우고 19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충정왕(忠定王)이 왕상좌로 개명해 주고 영가군공에 봉했다. 정헌공의 사위가 되었으며 이어 아들로 삼도록 하였다. 공은 공민왕 13년 국자좨주가 되고 재상으로 승차하여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가 되고 지중서문하평장사(知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공은 공민왕 15년 신돈이 왕의 총애를 받아 평상에 앉은 것을 질타하여 내려오게 하였다. 공은 공민왕 1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니 4년 후 신돈의 난정을 탄핵하고 신돈이 모반을 획책하자 수원으로 유배시켰다가 주살케 하였다. 공민왕 21년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이 되고 판이부사(判吏部事)를 겸하여였으며 상호군(上護軍)을 더하였다. 공민왕은 신돈의 종첩과 상관하였는데 종첨의 소생 모니노가 왕의 소생이라 하여 신돈의 아들을 우(禑)라 사명하고 강령대군에 봉했으며 세자로 삼고자 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공이 반대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자 울분으로 병환이 들어 44세에 졸하였다. 공의 묘소는 실전하고 양주군 회천읍 고암리에 설단하였다. |
밀직공의 자 부윤공 휘 숙 묘소 |
밀직공 왕중귀는 부윤공(府尹公) 諱 숙(肅)과 집의공(執義公) 휘 엄(嚴), 도(道)를 두었으며 숙(肅)은 대사헌(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고 숙의 아들은 좌윤공(左尹公) 순(循)과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된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복(復)을 두었는데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이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됨으로 인해 숙(肅)은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추증되었다. 정승공 왕상좌는 지족공(知足公) 휘 법화(法和)를 두었으니 조선조 태조가 대사헌(大司憲)을 배하고 판도판서(版圖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에 보문각 대제학(大提學)을 배하였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 태조 3년 양촌공이 태학사로 입시(入侍)하여 족씨(族氏)를 변하니 태조는 종제 肅, 嚴, 道와 함께 法和도 권씨(權氏)로 복성(復姓)토록 하였다. <감수 權五榮 전회장, 글 현봉 權景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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