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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崇祿大夫 右議政 行嘉善大夫 判江界都護府使兼節制使 花山府院君 諱 復 종보459호(20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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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464회 작성일 13-08-29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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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태종17년 1417년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세종7년(1425년) 의금부지사로서 체복별감(體復別監)이 되어 경상좌도(慶尙左道)에 파견 되어 병선(兵船)이 파손된 것을 조사하였다. 동년11월27일에는 대호군(大護軍)으로서 왕과 세자가 동교(東郊)에 나감에 살곶이에서 활쏘기 시범을 보였다. 공은 판사복시사(判司復侍事) 판통례원사(判通禮院事) 등을 거처 세종 14년(1432년) 병조우참의(兵曹右參議)가 되고 6월에는 아목하에 가서 중국사신 장동아를 안무(按撫)하였다.



사진1 화산부원군 복 신도비(장단군 진동면 하포리)


세종 15년(1433년) 병조좌참의(兵曹坐參議)가 되고 세종 16년(1434년) 가선대부로 올라 판강계도호부사(判江界都護府使)가 되어 절제사(節制使)로서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강계가 지경이 오랑캐와 연하였으니 다른 사람이 감당할 곳이 아니고 또한 여력(餘力)이 한참 강할 때인지라 이 같은 임무를 주는 것이 마땅하니 경은 잘 생각하여 시책(施策)에 대한 방법은 경이 어찌 내말을 기다릴 것이 있겠느냐” 하였다. 세종17년(1435년) 6월 5일에 순변 중 암벽의 낙석으로 졸했다. 졸기에 “갑인 년에 강계절제사에 제수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변방을 순찰하여 만포구자로 향하다가 길에서 절벽의 돌이 떨어 저 왼쪽어깨를 맞아 졸하였다. 복(復)은 활을 잘 쏘고 또한 여력이 있었는데 죽으니 애석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고 하였다. 자헌대부(自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추증하고 인졸(人卒)을 뽑아 상행(喪行)을 호송케 하며 지나는 고을에서는 조석전(朝夕奠)을 베풀고 강계·평양·황주에서는 제사를 지내주라 하였다. 임금이 치제(致祭) 하였는데 제문(祭文)에 “경은 타고난 자질이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온갖 행실은 충성(忠誠)스럽고 근실(勤實)하여 일찍이 연방에 오르고 또한 무예(武藝)에 열쇄고 날래어 양장으로 호칭되며 순위의 사로 뽑혔다.”하였다. 삼남 양효공(讓孝公) 휘 공(諱 恭)이 부마(夫馬)로서 귀이 되매 따라 세조 조에 가증되어 증 보조공신(輔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과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에 봉군 되었다.



사진2 화산부원군 복 묘소(장단군 진동면 하포리 현암)


세종실록에 [임술 행동교 세자호종(壬戌幸東郊世子扈從) 차우진관천변(次于秦觀川邊) 관방포(觀方袍) 차명대호군권복(次命大護軍權復) 호군김윤수등육인사지(護軍金允洙等六人사之) 이험기포사관갑심천(以驗其砲射寬甲深淺) 우사군기감(又使軍器監) 왕광주성산도성백악(往廣州城山都城白岳) 방신포(放信砲) 이험포성지원근(以驗砲聲之遠近) ; 임술 일에 동쪽교외로 행차하니 세자가 호종하였다. 살곳이 냇가에 막차를 차리고 포를 쏘는 것을 관람한 다음 대호군 권복과 호군 김윤수등 6인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하고 그 화살이 갑주를 뚫음이 깊고 얕음을 징험케 하였다. 또 군기감으로 하여금 광주의 성산과 도성의 백악에 가서 신포(身布) (신호로 쏘는 화포)를 쏘게 하여 포성이 멀고 가까움으로 징험케 하였다. 대호군은 5위에 딸린 종3품직이다. 여기에서 진관천은 지금의 살곳이 다리가 있는 청개천과 중량천의 합류천이고 그곳에 세종이 세자 문종을 대동하고 종친 및 백관과 함께 무예를 시범케 하여 일종의 군사훈련을 실시한 것이다. 그 기동훈련이 광주의 남한산성과 백악(白堊) 즉 경복궁 뒤 북악산 정상에서 신포를 발사하여 서로 어디까지 들리는지 시험케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규모를 짐작케 한다. 이 훈련에서 어전에서 시범을 보이도록 선발된 6인의 특등 사수 중 으뜸으로 공이 대호군으로서 시사를 한 것이다.



사진3 신도비 제막식


이후로 공은 판사복시사가 되었는데 판사복시사는 사복시의 판사이고 사복시는 나라의 수레와 말 및 마구간· 목장일 을 맡은 관아로 조선초 정3품직이었다. 세종 14년(1432년) 실록에 공이 병조우참의(兵曹右參議)가 되는 기록이 나온다.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는 관리를 전형한다고 해서 전조라 별칭 했고. 각조에는 조선조 초판서 와 참판 밑에 좌우참의 2인을 두었다. 그러다가 뒤에 각조에는 참의 1인만 남게 되었는데 병조에는 참의 밑에 참지(參知)를 두어 2인을 유지했다. 세종 14년(1432년) 공은 우참의로서 왕명을 받아 중국사신 장동아(張童兒)를 위로하기 위해 술을 가지고 아목하(阿木河)에 같다. 아목하는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이다.



사진4 신도비 제막 봉독


장동아가 아목하에 도착하니 병조참의 권복에게 명하여 술과 실과를 가지고가서 위로하게 하였다. 권복이 태평관으로 찾아가 하직인사를 하니 창성이 말하기를 (명나라의 야인지역) 지경 안에 들어가면 사람을 사역 시킬 수 있으나 지경 밖에서는 불가하다 하였다. 여기에서 장동아(張童兒)는 명나라 황제측근의 내관(內官)으로서 조선의 특파된 칙사(勅使)였다. 장동아는 이보다 8개월 앞선 세종 13년(1431년) 8월 같은 내관인 창성(昌盛) 장정안(張定安)과 함께 3인이 사신으로 오니 왕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지금의 독립문자리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그들을 맞아 황제의 칙지일 받들었다. 칙지는 장동아 등에게 중국 관군 150명을 달려 보내니 도와 조선에서 나는 해동청(사냥매)과 황웅(갈지 개. 1년생 사냥매) 백응(깃이 흰 상 서러운 매) 도표(시라소니)를 잡아 보내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공이고 그에 대한 중국의 희사가 있어 일종의 무역거래 이었으나 상국이 군사까지 거느리고 와 사냥을 해가니 그들의 식량을 보급하고 수발해야 하는 부담이 컸다. 이러한 장동아는 사신으로 온지 석달 열흘쯤 뒤인 동년 11월 30일에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니 임금이 직접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모화관에 나가 연회로서 전별하였다. 이렇게 돌아간 장동아는 이듬해인 세종 14년 3월 27일에 다시 행동청등을 잡으러 백두산으로 오게 된다. 중국의 성절사(聖節使)로 간 전시귀가 서계함에 “장동하가 지금 백두산의 야인지면을 향하는데 해동청을 포흭 해 가려는 것이고 창성·윤봉·장정안 또한 본국을 향하는 함길도(咸吉道)에서 매를 포흭 해 가고자하여 칙사를 가지고 떠났습니다.” 칙사는 야인지경에서 매를 잡을 군사가 400여명인데 이들을 위한 군량을 운송 할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를 받아본 임금이 크게 걱정하여 지금 장동하가 요동에서 직접 우리의 후문에 도착하는데 반드시 군량을 운송해 주어야 되는데 함길도에서 국고로 비축해 놓은 것이 얼마나 되는가? 만약 다른 도에서 수송 한다면 그 폐가 말 할 수 없을 터인즉 어찌 조치해야 좋겠느냐? 고 걱정하였다. 이후로 동년 4월 3일 장동아가 두목(頭目) 400명을 거느리고 해동청을 포흭 하는데 4월부터 석 달이 지나 7월부터 시작하니 백두산 근처에 있는 장동아 등을 위한 군량 480석을 요동에서 운반해야 하는데 인력 란이 심각해 태감 창성·윤봉과 감승 장정안에게 인력을 차출해 운반케 하라는 칙지가 있었다. 어쩌든 장동아가 이처럼 많은 무리로 백두산 근처에 와 머물며 매를 잡는다고 오래 폐를 끼치니 큰 부담이었다. 그 거느린 무리가 많으면서도 조선 인력으로 운량(運糧)을 하라고 하니 문제였다.

이러한 때의 공이 왕명을 받아 주과를 가지고 아목하까지 장동아를 위접(慰接)하러 갔다. 그런데 주과만을 가지고간 것이 아니라 군량을 운송할 인력도 함께 조달해야 하였다. 태평관(太平館)은 지금의 서울 태평로에 있던 중국 칙사를 위한 영빈관(迎賓館)이고 여기에 사신은 창성이 머물고 있으므로 공이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온 창성을 그곳으로 찾아가 왕명의 의거 아목하로 떠나게 되었음을 고하고 하직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공이 하직 인사를 하니 창성이 지경에 들어가서는 사람을 사역 가능하나 지경 밖에서는 불가하다 한 것은 조선국경을 넘어 야인지역에 들어가서는 운송 등의 일에 그쪽 인력을 사용함이 가하나 둘러 가기 전 조선지경에서는 불가하니 조선 인력을 써야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어쩌든 장동아 창성 같은 중국 사신이 와서 수개월 또는 한해 내내 머물며 매잡이 등을 하는데 이를 수발하는 것이 조선 조정으로서 여간 까다롭고 또한 역겨운 일이 안일 수 없는데 이를 공이 병조참의로서 굿은 일을 도맡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5 화산부원군 추향제 모습


장자는 통례공(通禮公) 온(溫)이고 차자 목사공 양(良), 3자는 화천군(花川君) 양효공(讓孝公) 공(恭)이며 4자는 주부(主簿) 검(檢), 5자는 사직(司直) 양(讓)· 6자는 사용(司勇) 외(外)이고 7자 부사(府使) 신(愼)은 세조 8년 강원도 경차관으로 나갔으며 예종 1년 영장(領將)으로 평안도에 나갔다. 딸은 3녀가 있다. 묘소는 경기 장단군 진동면 하포리177 현암 신좌의 쌍분이다. 1950년 동란(動亂)으로 표석(表石)과 의물(儀物)이 파괴되어 1982년에 개수비(改竪碑) 하고 1995년에 개봉축(改封築)하였고 2009년 8월 봉축(封築)과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통례공(通禮公) 온(溫)



사진 6 18세 좌랑공 온 묘소(화산부원군 묘 우록)


화산부원군 장자로 태종 13년 1413년 계사에 출생하였다. 음보(蔭補)로 출사(出仕)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이르렀으며 세조 1년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훈위 되었다. 성품이 침중(沈重)하고 관후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관직에 있어서는 공정하며 염결(廉潔)하였는데 세조 2년 병자 9월에 41세로 졸하니 임금이 이를 애석히 여겨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추증하였다. 그 후 증손자 남강공(南岡公) 상[常]의 탁이(卓異)한 효행으로 삼세추은(三世推恩)을 입으매 따라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로 가증되었다.

묘소는 경기 장단군 진동면 장경리에서 경기 장단 진동면 하포리 현암으로 이장하여 화산부원군 묘역 서편에 이장하였다. 공의 묘비문은 대제학 홍귀달(大提學 洪貴達)이 지었다.

아들은 사직서령(社稷署令) 창(昶)·부정(副正) 욱(旭)이 있고 딸은 3녀가 있다.



사진7 19세 부정공 욱 묘소(선고묘 계하)


19세 부정공(副正公) 욱(旭)
은 세종 22년 출생하여 사헌부 감찰이 되어 세조 14년 진사, 사도시부정(司導寺副正) 등을 역임하였다. 성종 23년(1492년) 장례원사의(掌禮院司儀)로서 임금을 윤대(輪對)하고 중종 3년 부정(副正)으로 안산·평산·강화 3읍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다.

가첩에 영의정 유순, 찬성 이손,지중추부사 안침 등과 기영회를 이루니 사람들이 낙양의 기로사 제현과 같다 하였다. 중종 6년 졸하니 수 72세며 좌승지겸 경연참찬관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진동면 명달리로 이장하였으며 예조판서 성세창이 비문을 지었다.

화산부원군의 증손자 참봉(參奉) 진(振)은 성종 3년 출생하여 중종 3년 사옹원 참봉이었으며 아들 남강공의 효행으로 호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

목사공(牧使公) 양(良)

공은 세조 1년(1455년) 좌익원종공신에 록훈되고 세조 11년 원각사(圓覺寺)를 세우는 역사의 랑관으로 공사장의 안전사고를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세조 13년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부임하며 성종 1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진주목사(晉州牧使)가 되어 나갔다. 그러나 진주목사로서 선취하여 1년 과기를 넘기고 재임 2년이 가까이 된 성종 3년 1월에 공이 목사로서 관내백성이 왜인과 투접(投接)한 사건으로 인책되었다. 묘소는 하패리 내릉에 쌍분이고 묘표가 있다. 이러한 목사공은 그 종손 사정공 웅중에 가서 후사를 두지 못하여 동 6대조 화산부원군의 3弟 직장공 득의 현손 세의(世義)의 술을 계자로 입후하였다. 22세 술(述)은 초명이 계선(繼宣)이고 선조 9년에 출생하였다. 인조11년 1633년에 사마시(司馬試)를 하였는데 이때가 58세이다. 인조18년 65세로 졸했고 묘소는 양주의 옛 묵은 면 후평에 합부되어 있다. 그곳이 지금은 은현면 설암리 산22번지이다. 이러한 공이 아들 유형(有衡)과 이형(以衡)을 두었는데 형제가다 인조 15년 호란을 맞아 순국(殉國)하였다. 이형공은 광해군 7년 출생하고 사마시에 입격한 수재인데 호란을 만나 백씨와 함께 적에게 굴하지 않고 항거하다 순국하였다. 뒤에 그 사실이 계문되어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묵은면 후평이다.

양효공(襄孝公) 공(恭)

태종 12년 숙근옹주(淑謹翁主)를 상(尙)하여 부마가 되고 세종 14년 화천군(花川君)에 봉군되었다. 세종 17년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귀로에 황제가 부마임을 알고 소환하여 관대(冠帶)와 보화 등을 주었다. 세종 28년 경상우도절제사, 문종 1년 화천위(花川尉)로 개봉되고 단종 2년 살곳이 목장 열병에 우상대장으로 말을 하사받았다. 세조 1년 추충좌익공신에 녹훈되고 단종조부터 세조에 이르기까지 임금의 연회에 대장으로 시연하고 사냥에 호종하는 등 무릇 70 여회에 달하였다. 세조 8년 과음으로 병을 얻어 졸하니 왕은 조회를 폐하고 시호를 양효(襄孝)라 하였다.

졸기에 “권공은 젊어서 궁마를 업으로 삼아 도진무(都鎭撫)가 된 것이 10여년이고 열무(閱武)할 때마다 대장이 되었는데 사졸은 그를 사랑하였다. 성품이 활달하여 집이 가난해도 안연하였으며 공사에 험한 것을 가리지 안했다. 임금은 내 젊어서 화천군의 집에 들르면 사벽(四壁)이 소연(蕭然)하였다. 평생 산업을 경영치 않고 비단 옷을 입지 않았으며 마음이 바르고 진실하여 일을 시키면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국가에 공로가 있으니 다른 부마에 비길 바가 아니다” 라 하였다. 묘소는 구로구 궁동 고재동 산에 연분으로 옹주가 뒤에 있다. 아들 안천군(安川君) 팽(彭)은 세종 30년 출생하여 성종 2년 안천군(安川君)으로 봉군되고 성종 14년 졸하였다.

(화산부원군종회장 권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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