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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순례 42] 大提學 文景公 諱 踶와 左議政 翼平公 諱 擥(종보 제404호 2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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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864회 작성일 12-04-20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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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순례 42] 大提學 文景公 諱 踶와 左議政 翼平公 諱 擥


止齋公 諱 踶

양촌 문충공(陽村 文忠公)의 둘째 아들로 고려 우왕 13년 송도에서 태어나 태종 14년 친시문과에 장원하니 왕은 “내 近의 죽음을 슬퍼하였는데 그 아들을 얻으니 마음이 무척 든든하도다”하며 하륜에게 “이 방은 나의 문생이니 경들은 자기의 문생으로 보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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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공 부조묘(충북 음성군 소이면 갑신리312-3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17호)





충령대군이 즉위하자 대학연의를 강했으며 세종 1년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 7년 가선대부로 승진되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였으며 세종 11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어 북경에 다녀와 한성부윤이 되었다. 세종 17년에 49세로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승차하여 동국연대(東國年代)를 찬진하였고 세종 19년 예조판서에 전임되어 고려사(高麗史)를 편수하라는 명을 받았으며 세종 20년 명나라에 다녀와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랐다. 세종 21년 고려사 편수 명을 다시 받고 황희(黃喜) 등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세종 22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승차되고 다음 해 정인지 등 10인이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수하였고 세종 24년 고려사 편수를 마쳤다. 세종 25년 좌참찬(左參贊)이 되고 세종 27년 숭정대부 우찬성(右贊成)이 되어 정인지 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으니 공의 큰 업적 중 하나였다. 공은 생전에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찬진하고 족보의 효시인 가보를 시도하여 소한당(所閑堂)으로 하여금 성화보(成化譜)가 간행되게 하였다. 59세에 종환이 깊어 졸하니 왕은 조회를 폐하고 철시(撤市)하여 관에서 호상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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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공 부조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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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제 문경공 신도비(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



시호를 문경(文景)으로 내리니 널리 배우고 의리에 따라 처리함이다. 세조 1년에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문충공 계하에 있고 세조 3년 신도비를 세웠다. 문집은 지재집(止齋集) 역대세년가와 동국세년가(東國世年歌)가 있고 시문이 동문선(東文選) 등에 올라 있다.



공은 부 양촌(陽村) 문충공(文忠公) 근(近)과 자 소한당(所閑堂) 림(擥)과 함께 3대가 대제학에 올랐으니 권문의 4始중 하나인 문형(文衡)을 이루었으며 또 공은 소한당과 함께 2대가 연달아 장원급제(壯元及第)함에 서거정(徐巨正)이 그 유문을 제하여 영가연괴집(永嘉連魁集)이라 하였는데 그 책에 김종직(金宗直)은 “우리 동방에 비로소 목은(牧隱) 설곡(雪谷) 조정(趙亭) 제공 부자가 다 문집이 있는바 시문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다. 영가 권씨댁을 그 하나로 꼽을 수 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문장뿐만 아니라 서예(書藝)도 명성이 끊이지 않는데 지재공(止齋公), 소한당(所閑堂)이 계승하여 장원급제하니 이는 마치 계림(桂林)의 만지(萬枝) 가운데 일지(一枝)요 곤륜산의 만석 가운데 한 조각 옥으로서 예원(藝文官)에 이름이 뛰어났으며 암랑(의정부의 옛말)에 빛이 찬란하니 어찌 영광스럽지 않으랴. 지재, 소한당의 시는 그 체단격률(体段格律)이 실로 양촌공의 규범에 근원되어 祖, 父, 孫 3대가 스스로 시문을 지어 일가를 형성한 것이다.”라 하였다.

문경공 부조묘가 음성군 소이면 갑산 312-3번지에 있는데 묘우(廟宇)중수기를 요약한다.


文景公 不祧廟 改建 및 重建記(略)

충주별묘 개건기

문경공의 부조묘가 폐허된 사당이 충주 갑산에 있는데 퇴락함이 날로 심하여 친족들이 사재를 모아 새 묘우를 완공하고 문경공 신위를 모시고 문충공 신위를 서쪽 위에 모셨다. - 광무 5년 15대손 자헌대부의정부찬성 육군참장 재형(陸軍參將 在衡) 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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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공이 정인지등과 지은 용비어천가

문경공 부조묘 중건기

1949년 갑산에서 문중의 논의가 있어 모금 중 병난을 겪고 1959년 자금을 모아 1960년 묘우를 헐고 새 묘우를 완공하니 존영께서 평안하시리라. - 16대손 태연(泰淵) 근서

부조묘는 문경공종중 오성회장의 노력으로 2003년4월24일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 17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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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공 교지

공의 아들은 장남이 양평공(諒平公) 지(摯)로 공조참판, 개성유수, 병마절제사,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2남은 소한당 람(擥)이고, 3남은 안양공(安襄公) 반(攀)으로 사마시 병과급제하여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고 한성부윤, 중추원부사, 형조.공조참판, 충청도.강원도 관찰사, 개성부윤을 지냈다. 4남 연천공(漣川公) 휘는 연천현감을 지냈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5남은 설(挈)이고 6남은 영가군 경(擎)으로 무과하여 중추원부사가 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지재공의 5대종손 영풍군 길(永豊君 諱吉)은 임진왜란시 상주판관이었는데 목사는 도망가고 밤새 수백의 장졸을 모집하여 죽기로 항전하였으나 순국하였다. 공은 혈서를 써 말에 매어 음성 갑산 집으로 보내니 말은 갑산에 도착하여 죽었다. 조정에서는 정려를 세워주고 이조판서 영풍군으로 증직하였다. 인조 24년 사림의 발의로 상주에 권길사(權吉祠)(충렬사)가 건립되고 충신정려는 갑산에 세워졌는데 기문은 임신4회갑 영조48년 중건할때 영의정 채제공이 지었다.




所閑堂 諱 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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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당 익평공 신도비(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



공은 태종 16년 한양에서 태어나 독서를 좋아해 한명회와 주유산천(周遊山川)하며 문장을 강론하였는데 35세에 문종 즉위년 포의로 식년시에 친책(親策)을 포함하여 일거에 세 차례 장원하여 사헌부감찰에 보임하였다.

단종 1년 계유정란에 수양대군과 뜻을 같이 하였으며 단종 2년 동부승지가 되었고 4월 모친 생신에 영친연(榮親宴)을 베푸니 수양대군이 영의정으로 친히 헌수(獻壽)하였다. 세조가 즉위한 뒤 이조참판에 오르고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의 녹훈과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세조 2년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지경연춘추관사가 되고 세조 3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세조 4년 우찬성, 세조 5년 좌찬성(左贊成)이 되었다. 이어서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세조 8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세자부(世子傅)가 되었으며 세조 9년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세조 11년 향년 50세에 졸하니 임금이 진도(震悼)하여 사흘동안 조회를 파하였다. 묘소는 음성 생극 선고 계하에 있고 신도비문은 신숙주가 짓고 아우 안양공이 썼으며 동문선에 올랐다. 상은 시호를 익평(翼平)으로 내리니 사려가 심원하여 익이고 화란을 평정하여 평이었으며, 성종 1년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부조묘(不祧廟)는 전남 담야군 대전면 대치리 효례촌에 세웠는데 현재는 없어졌다.

실록의 졸기에 “기우(器宇)가 관위(寬偉)하고 뇌락(磊落)하여 무리와 같지 않았으며 스스로 고세지사(高世之士)임을 자처 하였다. 한명회(韓明澮)와 망형지교(忘形之交)를 맺고 집안사람들에게 산업을 섬기지 말고 남아로서 변방에서 공을 세울수 없다면 만권의 서책을 읽어 곧은 이름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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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

(상 : 문충굥 묘, 중: 문경공 묘, 하: 익평공묘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제32호)

양촌의 응제시를 집주해설한 응제시집주(應制詩集註)가 있어 국가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선지(先志)를 받들어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성화보(成化譜)를 편수하고자 하였으나 끝을 맺지 못하고 졸하니 내종(內從) 서거정(徐巨正)이 완성하여 권문의 4시인 족보를 편찬하였다.

공은 남산 북쪽 기슭에 후초당(後草堂)이란 집에 살았는데 당호를 후조(後凋)라 하였으며 세조가 그집에 가서 돌샘에 물을 마셨는데 어정(御井)이 되었다. 지봉(芝峯) 이수광(李晬光)이 공의 구택을 일러 “한때 공작, 후작, 백작으로 부귀를 함께 누리고 3대가 같이 문형이 되었네(一時富貴公侯伯 三世文衡祖子孫)”이라 하였다.

공은 2남 7녀를 두었는데 장남 길창군(吉昌君) 휘 걸(傑)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차남 충민공(忠敏公) 휘 건(健)은 성종 7년 별시 문과을과로 급제하고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하였다. 성종 10년 시무책시에 장원하였으며 성종 12년 한명회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문견사건(聞見事件)을 기록하였다. 성종 13년 예조참의가 되고 성종 15년 도승지, 17년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 이어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중종반정 이후 의정부좌찬성 겸 홍문관 대제학으로 추증되었다.




(五星 문경공종회장 감수, 글 사진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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