昌和公 諱 準과 子孫(종보 제481호)2015.7.1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662회 작성일 15-06-30 15:21본문
창화공의 호는 송재(松齋)이며 고려 충렬왕 7년(1281)에 출생하여 18세에 대전행수(大殿行首)가 되고 진사에 급제하였다. 공은 여러 관직을 거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에 대우문감춘추관사 상호군 삼한벽상공신(大右文監春秋館事 上護軍 三韓壁上功臣)에 올랐으며 품계가 올라 삼중대광 길창부원군(三重大匡 吉昌府院君)이 되었다. 공은 추밀공의 현손이며 부친은 문정공(文正公) 휘 보(簿)이며 호는 국재(菊齋), 조부는 문청공(文淸公) 휘 단(日旦)이고 호는 몽암(夢庵)이다.
사진 : 1 창화권 준 묘소 :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 산 112번지(묘비 입석 후)
원나라 성종말기에 공은 원경(元京)에 가서 왕자시절 충선왕을 만나고 충렬왕 34년 충선왕이 환국하여 즉위시 대언(代言)에 발탁되고 충선왕 3년 합포만호에 제수되었다. 충선왕 5년 왕이 충숙왕에게 전위하고 원나라 조정과의 사사(使事)를 공에게 명하니 공은 원에 자주 왕래하였다.
충숙왕 8년 왕이 원에 불려가 억류되니 조정은 불경한 무리들의 모함을 배제하여 사태가 진정되자 공을 찬성사(贊成事)에 배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지낸 학문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시를 주관하며 문생(門生)을 길렀다.
충혜왕이 습위하자 정승 조적(曺頔) 등이 난을 일으켰다. 조적이 패하고 왕이 복위하자 공은 부원군(府院君)에 올랐다. 충혜왕이 승하하자 원(元)에 볼모로 가 있던 원자 흔(昕)이 즉위하니 8세의 충목왕이었다. 충목왕 4년 충정왕이 즉위했으나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가 흉흉하여 강능대군을 즉위시키니 공민왕이다.
사진2 창화공 묘지명
공에 대한 충선왕의 은전이 깊어 하사받은 것이 많았으며 또 충선왕은 공의 어린 넷째 아우 재(載)를 양자로 삼으니 정헌공 왕후(王煦)이다. 충숙왕의 총애도 남달라 한천(寒泉)의 안향(安珦)의 구택을 매입해 공에게 하사하여 부친(菊齋公)을 효양케 하니 한천의 사원이 강학(講學)처가 되고 공은 문하생(門下生)을 많이 배출하였다.
사진3 : 창화공 벽화묘 북벽 인물상과 성신도
공은 효행이 지극하여 1326년 문인들과 부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계원록(桂苑錄)을 만들고 1342년 부친 국재공을 도와 효행록(孝行錄)을 편수하였다. 공의 사적은 국재공과 함께 고려사(高麗史)에 입전(立傳)되고 고려 명신전(名臣傳)에 올랐으며 동국여지승람의 안동부편 인물조에 올랐다.
공은 남에게 베풀기를 널리하며 불문(佛門)에 시주하면서 30여년 동안 10여명의 승려를 봉양하면서 자효사(慈孝寺)와 인연이 깊었다.
공은 공민왕 1년(1352년)에 질환이 깊어 향년 72세로 졸하였다. 왕이 진도(震悼)하여 조회를 거두고 공에게 창화(昌和)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자효사 서쪽 언덕(장단군 진동면 서곡리산112)에 장사하였다. 공의 묘소는 묘실에 벽화가 그려졌는데 훗날 봉사손이 화를 당해 외손 청주 한씨가 수호하게 되고 오랜 기간 실전되었다.
부인은 보성 오씨 (寶城吳氏)밀직사사 인영(仁永)의 딸이며 장자는 형(衡), 차자는 적(適)이고 사위는 남양인 홍탁(洪鐸)과 홍언박(洪彦博)이다.
장자 현복군(玄福君) 형(衡)
장자 현복군(玄福君)은 초휘가 염(廉)이고 충열왕 28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충선왕 3년에 함경전녹사가 되고 충숙왕 2년 14세로 보마행수(寶馬行首)에 선발되었다. 충숙왕 4년 16세로 원(元)에 들어가 봉상대부 삼사부사(三司副使)가 되었다. 충숙왕 10년 천자(天子)를 도왔으며 충숙왕 12년 원제(元帝)로부터 선무장군(宣武將軍) 합포진변만호(合浦鎭邊萬戶)를 받았다. 충숙왕 14년 26세로 환국하여 군역(軍役) 수전(授田)을 적절히 하여 민심을 얻었다.
29세에 장순대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되고 축숙왕 복위 4년 장녀가 왕의 수비(壽妃)가 되니 현복군(玄福君)에 책봉되었다. 충숙왕 7년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올랐다. 공은 충혜왕 1년 병으로 졸하니 39세였다. 숙부 정헌공이 “권씨의 자제로 만호(萬戶)보다 어진 자가 없는지라 내 일찌기 비호(庇護)하기로 하였는데 하늘이 어찌 어린 자제를 빼앗음이 극심하랴”하였다. 목은 이색(李穡)이 묘지문을 지었다. 묘소는 개풍의 태평원에 있다.
아들은 현성군 용(鏞), 도첨의찬성사 현(鉉), 양효공 호(鎬), 화산군 균(鈞), 규헌공 주(鑄) 와 6녀를 두었다.
사진4 : 창화권 준 묘소 : (묘비 입석 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