倉守公 諱 憶 의 諸 子孫(종보 제368호 20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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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858회 작성일 12-07-15 15:26본문
창수공 휘 억(億)(추밀공파 19세)은 추밀공파 대제학(大提學),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낸 13세 국재(菊齋) 문정공(文正公)의 6세손이며,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지낸 14세 충겅공(忠靖公) 휘 고(皐)의 5세손이고 15세 정간공(靖簡公)의 고손이며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양촌 文忠公 近의 증손이며 안숙공 준(安肅公 諱 蹲)의 孫이고 마전, 괴산군수를 지낸 염(念)의 아들이다. 공은 소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선대의 물부과거(勿赴科擧)를 지켜 과장에 나아가지 않고 군자감부감을 거쳐 광흥창수에 이르렀고 가선대부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고양시 성석동 선산 승지공 묘소 아래에 있다.
사진1 창수공 재사(고양시 성석동 감내)
사진2 창수공 묘소(고양시 성석동)
창수공은 5남매를 두었는데 장자는 승지공 기(承旨公 諱 祺)이고 차자 회(禬)는 사직공에 출계하고 3자 조(祚)는 후사가 없다.
승지공(承旨公)은 상주목사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올랐으며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추증되었으며 공은 습제공 벽(擘) 과 진사공 별을 두었다.
사진3 승지공 묘소(선고 위)
습재공 벽(習齋公 諱 擘)은 중종 38년 식년시 문과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고 명종 4년 춘추관기주관 지제교(知製敎)를 지내고 가을에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명종 6년 감군(監軍)어사(御使)로 관서지방에 나가고 명종 8년 성주목사, 원주목사, 명종 11년 호남(湖南)의 점마어사로 나갔다 돌아와 명종 12년 선산부사로 나갔다. 선조 5년 유성룡 등과 함께 중국사신을 맞는 종사관으로 문명이 중국에까지 드날렸고 선조 6년 당상관이되어 여주목사 장단부사(府使)를 거쳐 형조, 예조참의(禮曺參議)에 이르렀다.
사진4 화산서원(충남 서천군 기산면 화산리)
시문이 뛰어나 제술관 종사관을 지냈으며 74세 졸하니 예조참판 겸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醴曹參判 謙藝文館提學 世子左賓客)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고양시 성석동 감내에 해주정씨, 경주정씨와 3위 합폄이고 충남 서천군 기산면 화산서원에 주벽으로 배향되었다.
재사에 묘갈비가 있는데 전자체를 선조 39년 명사 주지번(朱之蕃)이 왔을때 석주공이 주지번에게 부탁하여 써 받았다.
문집 28권을 남겼으며 시집 1책이 발간되었는데 얼사 이정귀(李廷龜)와 최립(崔笠)이 서하고 허균(許筠)이 후서하였다. 국조인물고와 연려실기술에 사적이 있다. 충남 서천군 기산면 화산리에 화산서원(華山書院)에 주벽으로 배향되었다.
사진5 화산서원추향
6兄弟 모두 文章과 詩에 뛰어나 江上七賢
습제공은 7남매를 두었으며 장자는 別坐公 諱韡(위)이고 차자는 松禾公 諱 韌(송화공 인)이며 제3자는 松木皮 公 諱韞(송파공 온) 제4자는 草樓公 諱韐(초루공 겹) 제5자는 石洲公 諱韠(석주공 필) 제6자는 睡隱公 諱韜(수은공 도)이다.
사진6 습재공 묘소(고양시 성석동 감내)
別坐公(별좌공) 위(韡)는 석주공의 백씨 행장에 위(韡)는 영민하였으나 과거를 폐하고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잘 지었다고 하였다. 성석동 감내에 단소가 있다.
松禾公(송화공) 인(韌)은 송화현감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었으며 송화공의 손 日峰公 諱諿(일봉공 집)은 영국원종공신에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냈고 한산(韓山)에 우거하였다. 永思齋 諱言見 (영사재 현)은 사현부 감찰 부여현감을 끝으로 한산에 은거하여 80세 수직으로 자현대부가 되고 졸하니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되었다. 묘소는 성석동 조부 승지공묘 상록에 있다.
松木皮 公(송파공) 온(韞)은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草樓公(초루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9세에 읊은 송도시(松都詩)가 개성남문에 걸리고 악부(樂付)에 올랐다. 공은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石洲公 피화(被禍)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포천군 영중면 거사리 산101에 있다.
사진6 습재공묘소(고양시 성석동 감내)
草樓公(초루공) 겹(韐)은 명종 17년 현섯촌에서 출생하여 선조 22년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광해 5년 인목대비를 폐하자 해주에 가 우거하며 송경시(松京詩) 등을 읊었다. 광해 4년 유희분의 연회에 가 음식을 상노에게 주며 한 말로 화를 당할 번하였다. 5형제 모두 시(詩)에 빼어나니 사람들이 당가오보(唐家五寶)라 하였다. 인조 9년에 졸하니 수 70이고 훗날 자손이 귀히 되니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되었다. 충남 ㅅ천군 판교면 금덕리 아들 석로공 위에 있다. 손자 지중추 열(說)이 행장을 짖고 증손 성이 묘지를 지었다.
공의 계자는 釋老公 諱 佺(석노공 전)이며 생부는 松禾公(송화공)이다. 석노공은 일찍이 석주공을 좇아 강화에서 수학하였는데 석주공 피화후 한산에 우거하였다. 졸후 자헌대부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추증되었다. 석노공(釋老公)의 장자 지사공 열(說)은 형조참판을 지내고 기로소에 입사 했으며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차자 도헌공 계(誡)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고 제3자 知足堂 諱 讓(지족당 양)은 이조판서(吏曹判書)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으로 추증되었다.
石洲公 諱韠(석주공 필)의 자는 여장(汝章)이고 호는 석주이다. 선조2년 한양에서 출생하여 사마시에 장원하였으나 1자 오서로 탈방되고 동몽 교관을 제수하였는데 강화에서 후학을 길렀으며 광해조에 궁류시(宮柳詩)로 피화되니 수 44세였다. 묘소는 고양시 성석동 감내에 있다.
睡隱公 諱韜(수은공 도)는 선조 36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석주공 피화후 시로서 소요자적 하였다. 공이 유배지로 떠날 때 읊은 시 해남임행유시운(海南臨行有詩云)은 83세의 노모를 생각하는 애절한 심경이 담겨있다. 習齋公과 여섯 아들 모두 문장(文章)과 시(時)에 뛰어나 당시 사람들은 강상칠현(江上七賢)이라 일컬었다. 합천 삼가에서 유배중 영상 정인홍(鄭仁弘)을 만나니 정인홍이 공의 재주를 아껴 주달하여 석방하였다. 묘소는 성석리 선고묘 계하에 있다.
사진 7 습재공 비각
草樓公(초루공) 겹(韐)은 명종 17년 현섯촌에서 출생하여 선조 22년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광해 5년 인목대비를 폐하자 해주에 가 우거하며 송경시(松京詩) 등을 읊었다. 광해 4년 유희분의 연회에 가 음식을 상노에게 주며 한 말로 화를 당할 번하였다. 5형제 모두 시(詩)에 빼어나니 사람들이 당가오보(唐家五寶)라 하였다. 인조 9년에 졸하니 수 70이고 훗날 자손이 귀히 되니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되었다. 충남 ㅅ천군 판교면 금덕리 아들 석로공 위에 있다. 손자 지중추 열(說)이 행장을 짖고 증손 성이 묘지를 지었다.
공의 계자는 釋老公 諱 佺(석노공 전)이며 생부는 松禾公(송화공)이다. 석노공은 일찍이 석주공을 좇아 강화에서 수학하였는데 석주공 피화후 한산에 우거하였다. 졸후 자헌대부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추증되었다. 석노공(釋老公)의 장자 지사공 열(說)은 형조참판을 지내고 기로소에 입사 했으며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차자 도헌공 계(誡)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고 제3자 知足堂 諱 讓(지족당 양)은 이조판서(吏曹判書)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으로 추증되었다.
石洲公 諱韠(석주공 필)의 자는 여장(汝章)이고 호는 석주이다. 선조2년 한양에서 출생하여 사마시에 장원하였으나 1자 오서로 탈방되고 동몽 교관을 제수하였는데 강화에서 후학을 길렀으며 광해조에 궁류시(宮柳詩)로 피화되니 수 44세였다. 묘소는 고양시 성석동 감내에 있다.
睡隱公 諱韜(수은공 도)는 선조 36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석주공 피화후 시로서 소요자적 하였다. 공이 유배지로 떠날 때 읊은 시 해남임행유시운(海南臨行有詩云)은 83세의 노모를 생각하는 애절한 심경이 담겨있다. 習齋公과 여섯 아들 모두 문장(文章)과 시(時)에 뛰어나 당시 사람들은 강상칠현(江上七賢)이라 일컬었다. 합천 삼가에서 유배중 영상 정인홍(鄭仁弘)을 만나니 정인홍이 공의 재주를 아껴 주달하여 석방하였다. 묘소는 성석리 선고묘 계하에 있다.
사진8 습재공 묘갈비
知足堂 네아들 모두 正二品 이상
知足堂 諱讓(지족당 양)은 6남매를 두었는데 장자는 忭(변)이고 차자는 忄省 (성)인데 永思齋 言見 (현) 의 계자(系子)가 되었고 4자는 忄業 (업)이다.
遂草堂 諱忭(수초당 변)은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문과급제 하였는데 우연히 빈청회의에 참석하게 되어 곤전(坤殿)이 손위(遜位)됨을 보고 통곡하며 낙향하였다. 그 후 누차 관직이 제수되었고 공조참의 이조참의도 불응하면서 거처를 수초당(遂草堂)이라 하였다. 이어서 병조참판 한성부우윤으로 품계를 올렸으며 영조2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자 졸하였으니 이조판서(吏曹判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으로 추증되었다. 문집과 수초당집이 있고 한산의 창현사에 배향되었으나 훼철되고 서천 화산서원(華山書院)에 배향되었다.
霽月齋 諱忄省 (제월재 성)은 통덕낭으로 장원급제하여 정낭 사헌부집의를 하고 의주부윤, 평안도관찰사, 한성판윤, 비변사제조, 충청 황해 함경도 관찰사, 판서를 거처 우참찬(右參贊)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하였다. 서천 화산사에 배향되고 영정이 있다.
寄傲軒 諱忄業 (기오헌 업)은 문과 통덕낭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고 영광원, 경상 충청감사, 가선대부로 평안감사를 지내고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니 영조는 재주와 지혜가 있다고 극찬하였다. 그 후 좌참찬(左參贊)에 올랐고 졸하니 좌찬성(左贊成) 문형(文衡)으로 추증되었다.
<賢奉 權景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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