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순례 51]齊簡公 諱 跬와 慶安宮主, 縣監公 諱 훈 (종보416호 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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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166회 작성일 12-04-20 21:05본문
[유적지순례 51]齊簡公 諱 跬와 慶安宮主, 縣監公 諱 훈 |
齊簡公 諱 跬 齊簡公은 양촌 문충공(文忠公) 近의 제 3남으로 태조 2년(1393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미목(眉目)이 수려하고 10세가 못되어 가구(佳句)로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태종의 제 3녀 경안궁주(慶安宮主)가 하가(下嫁)하게 되니 숭정대부(崇政大夫) 길천군(吉川君)을 배하고 부마(駙馬)에 길창위(吉昌尉)로 봉작되었다. 태종 7년(1407년)에 호분사상호군(虎賁司上護軍)을 겸하니 금기를 깨고 탁용된 바였다. 태종 8년에 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를 겸하여 숙위군(宿衛軍)을 맡았다. 태종 9년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혁파할 때 안주도도절제사(安州道都節制使)가 되어 나가니 사람들이 중국 오(吳)나라 주유(周瑜)에 비교했는데 이때 공의 나이 17세였다. |
경안궁주 묘소여주군 점동면 덕평리 강금산) 태종13년 명나라가 도읍을 북경(北京)으로 천도하니 흠문기거사(欽問起居使)의 정사(正使)로 발탁되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다녀왔고, 태종 15년 배위 경안궁주의 상을 당했다. 태종 16년에 길창군(吉昌君)으로 개봉되고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태종 18년 황주(黃州)에 나가서 서도(西道)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세종 3년(1421년) 졸하니 29세였다. 광주(廣州)고을 남쪽에 장사하였는데 20년 뒤에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덕평리 덕실의 강금산(剛金山)으로 이장하였으며 상하연분(上下連墳)인데 궁주의 묘소가 아래이며 신도비(神道碑)를 실전하였는데 1999년에 다시 세웠다. 공은 품성이 온후하고 몸가짐이 겸공하며 모친을 섬김이 극진하였다. 세종이 증시(贈諡)했는데 제간(齊簡)으로 하니 마음가짐이 집요하고 능히 굳세어서 제(齊)이고 전일한 덕으로 게으르지 않아 간(簡)이라 하였다. |
제간공 묘소 경안궁주 위 |
慶安宮主 경안궁주(慶安宮主)는 태종(太宗)의 제 3녀로서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이며 태조 2년(1393년)에 출생하니 태종의 12남 17녀 가운데 적생 제 3녀이고 태종 4년(1404년)에 12세로 하가(下嫁)하였다. 태종은 아들 가운데 3남 세종을 가장 총예(聰睿)하고 딸 가운데는 경안궁주가 가장 영오(穎悟)하니 세상에서 궁주를 여중세종(女中世宗)이라 하였다. 권규에게 출가하여서는 부덕(婦德)을 지녀 시부모를 섬기는데 예를 다하고 2남 1녀를 생육하였다. 태종 15년(1415년) 졸하니 수가 23세였다. 태종은 이 딸이 요절함에 비도(悲悼)한 나머지 고아가 된 외손주를 궁중에 데려다 기름으로써 시름을 잊고자 하였다 |
제간공 신도비 점동면 덕평리 묘소아래 |
敦寧公 諱 聃과 靈靖公 諱 聰 돈녕공(敦寧公)은 태종 8년경에 출생하였는데 경안궁주가 요절하니 태종은 애석히 여겨 공과 아우 총(聰)을 궁중에서 길렀다. 8세가 되자 돈녕부참봉(敦寧府參奉)을 특제(特除)하고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제수하였으며 세종 15년 첨지중추원부사(僉知中樞院副使)로 보임되었다. 30세 전후에 요서(夭逝)한 것으로 추정된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상덕리에 있었는데 1994년에 여주군 점동면 덕평리 강금산(剛金山) 선영좌측으로 이장하였다. |
돈령공 묘소 점동면 덕평리 |
영정공靈(靖公)은 태종 13년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돈녕공과 함께 궁중에서 자랐는데 공은 너무 어리므로 영덕현사(盈德縣事) 최일(崔一)을 양부로 정하고 당상관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특진시켜 집에서 양육케 하고 수시로 궁중에 드나들게 하여 태종의 무릎에 안겨 귀여움을 받았다. 9세가 되었을 때 최일은 세상을 떠났다. 공은 소년에 세자좌참군(世子左參軍)을 제수받고 세종 11년 17세로 부사정(副司正)을 배하였다. |
영정공 묘소 점동면 원부리 오산 |
세종 28년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었다. 36세 때인 세종 30년에 우분(憂憤)의 상소를 하였다가 오히려 파직된 이후 부모의 묘소가 있는 여주(驪州)로 내려가 시주(詩酒)로 자오(自娛)하면서 한양을 왕래하였다. 문종(文宗) 2년 40세로 복직되어 동첨지돈녕부사(同僉知敦寧府事)가 되고 단종(端宗) 2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세조(世祖) 1년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책훈되고 세조 3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세조 7년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올라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성종(成宗) 6년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배하였는데 이듬에 4월에 선영 강금산 일대에 막을 치고 살던 노비 수백명이 길쌈을 팽개치고 도적의 무리로 변하여 횡행한 일로 의금부(義禁府)의 취리(就理)를 받는 등의 불상사를 겪다가 성종 11년 68세로 졸하였다. 조정에서 시호를 의논하여 영정(靈靖)으로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점동면 원부리 오산(烏山)에 계좌(癸坐)이고 당질(堂姪) 충민공(忠敏公) 건(健)이 비문을 지었다. 護軍公 諱 訔과 縣監公 諱 훈 |
호군공 묘소 점동면 덕평리 선고 계하 |
호군공(護軍公)은 양촌의 증손으로 제간공(齊簡公) 휘 규(跬)의 손자요 돈녕공(敦寧公) 휘 담(聃)의 장남으로 돈령부 참봉으로 벼슬하여 내자시 직장을 지내고 수직으로 통정대부 호분위호군이 되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 황보인이 주살되자 공은 용인으로 안치되고 양주로 부처되었다가 10년만에 방면되었다. 묘소는 용인 이동에 있었는데 여주 덕평리 선고 계하로 이장하였다. |
현감공 추원재 : 구미시 선산읍 생곡리 가방산 |
縣監公은 돈녕공(敦寧公)의 둘째아들로 세종(世宗) 16년 출생하였다. 음보(蔭補)로 출사(出仕)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로서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성종(成宗) 23년에 졸하니 묘소는 경북 상주군 절성면 봉산리 삼박동(三朴洞)에 간좌(艮坐)로 합폄되어 있고 1998년 구미시 선산읍 생곡리 가방산(可方山)에 신좌(辛坐)로 이장합폄했다. 1남을 두니 형(衡)으로 현감(縣監)이다. 돈녕공(敦寧公)의 삼남은 봉례공(奉禮公) 휘 감으로 통례원 봉례(奉禮)를 지냈다. 영정공(靈靖公) 諱 총(聰)의 장남은 직장공(直長公) 휘 집(輯)이며 세종 13년 출생하여 세종 32년 사마시 생원이 되고 사선서 직장이 되었으나 세조3년 27세로 졸하니 묘소는 여주 점동면 원부리 오산촌에 있으며 재종 충민공(忠敏公) 건(建)이 비문을 지었다. 직장공의 현손이 안창군(安昌君) 휘 준(俊)으로 임진왜란시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종보365호(2005.11.1)에 소개한 바 있다. 묘소는 여주군 점동면 원부리 오산 선영하에 있다. |
현감공이하 6대조 묘소 (생곡리 가방산) |
현감(縣監) 자손이 善山땅에 세거하게 된 연유는 靖簡公 實記에 의하면 1453년(端宗 1년, 癸酉) 癸酉靖亂 직후로서 그 일족 중 살아남은 자는 일단 예봉을 피해 산지사방으로 피해 달아나 은신하던 곳이 慶北 尙州 鳳山里(三朴洞)에 공의 묘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으로 낙향한 것으로 보인다. 縣監公은 일남을 두시니 휘 형(衡) 단성현감(丹城縣監)의 5대손이며 25세 계문(繼門)이 이곳 구미시 선산읍 생곡리로 이거 정착함이 약 4백여년이 지났으며, 齊簡公 諱 跬, 둘째 아드님이신 諱 聰 靈靖公의 五代孫 諱 俊, 安昌君 그 諸孫도 이곳 구미 선산읍 소재리 인근에 수백여호 취락을 이루고 있다. 원근제족이 합모하여 현감공 재사(齋舍)를 건립키로 하였다. 선산(善山)은 영남의 명산인 복우산(伏牛山)이 남으로 힘차게 뻗어 미봉산(彌鳳山)을 이루고 지맥인 가방은 낙동강과 어울리니 산수가 명미한 곳이다. 이곳 생곡리에 1982년 추원재(追遠齋)를 준공하여 通訓大夫 司憲府監察 縣監 諱 훈을 비롯하여 丹城縣監 諱 衡, 贈嘉善大夫 吏曹參判 諱 輅 음사로 敦寧府事 諱 憬, 成均生員 諱 孝生, 處士公 諱 尙平 六代 先塋을 尙州 功城 鳳山(三朴洞)에서 戊寅年 봄에 이곳으로 면례(緬禮)하였으니 세시(歲時)로 성추지신(省楸之辰)에 추원보본(追遠報本)과 효제지심(孝悌之心)이 자각유연생의(自覺油然生矣)라. 목족(睦族)의 도리를 힘써 선조들의 위업을 받들어 가문을 빛내고 있다. <자료검토 권대길, 현봉 권경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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