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순례 28] 有懷堂 以鎭의 忠孝 (종보 제385호 200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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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7,063회 작성일 12-04-20 19:35본문
[유적지 순례 28] 有懷堂 以鎭의 忠孝 |
유회당(有懷堂) 이진(諱 以鎭, 樞密公派 26世)공은 현종 9년(1688년) 유성 탄방에서 출생하였다. 공의 초기 아호는 수만헌(收慢軒)이며 후에 유회당이라 하였다. 공은 14世 정헌공(正獻公)의 12대손으로서 참의공 령(諱 齡)의 7대손, 만회(晩悔) 휘 득기(諱 得己)의 증손이고 탄옹(炭翁) 휘 시(諱 諰)의 손자이다 |
대전시 무수동 유회당 정사와 묘소 부친 유(諱 惟)는 권시(權諰)의 둘째 아들로 숙종 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정릉참봉이 되고 전의현감을 지냈으며 60세에 졸하니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무수동 운람산에 초취 증 정경부인 은진 송씨와 합폄하고 유회당은 묘아래 시묘(侍墓)를 위해 삼근정사(三近精舍)를 짓고 제사를 지내면서 독서와 교육을 하였다. 명재 윤증(尹拯)이 묘지(墓誌)를 짓고 유회당이 비문을 지었다. 유(惟)는 4남4녀를 두었으며 유회당은 셋째 아들이다. 장형은 통덕랑 이정(以鋌)이고 차형은 증 호조참판 이개(以鍇) 아우는 통덕랑 이발(以鏺)이다. |
유회당 본당과 장판각(좌) :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 6호 |
유회당은 10세에 추우시(秋雨詩)를 지었는데 외조부 송시열(宋時烈)이 주자(朱子)의 시와 비슷하여 “우리 동방의 문장은 분명 여기 나의 손자에 있도다”라는 칭찬을 하였다. 16세에 「유약무 실약허 有若無 實若虛」하다는 자경4조(自警四條)를 지어 마음에 요령을 삼았으며 19세에 증조부의 유언에 따라 가훈인 「매사필구시 무락제이의 每事必求是 無落第二義」에 전심하여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21세에 조부 탄옹의 사위인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공은 백부의 권유로 26세(숙종 19년, 1693) 식년시 생원 2등으로 급제하고 숙종 20년 별시문과 병과 제3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시강원설서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 겸 춘추관 기사관을 지내고 40세에 무수동 선영 아래로 내려와 별묘(別廟)를 세우고 살았다. |
삼근정 사(찬성공 시묘를 위한 집) |
유회당 선생은 당시 노론, 소론 당쟁이 한창이던 때 노론인 宋時烈(외조부)과 소론인 尹拯(고모부) 문하에서 처신이 매우 어려웠다. 선생은 42세에 동래부사, 44세(숙종 37년) 경주부윤, 55세(경종 2년) 형조, 예조참의를 거쳐 57세에 호조참판(戶曹參判)에 보임되어 연경에 다녀온 후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고 59세에 함경도관찰사, 62세에 말망(末望; 관직을 임명할 때 3人을 추천하며 末望은 3人중 끝자리임)으로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에, 64세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되었으며 66세에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선생이 안동부사(安東府使)와 경상감사(慶尙監司) 재직 시 안동의 태사묘(太師廟)와 능동의 시조묘(始祖墓)를 수호하며 비각을 세우는 등 권문창달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영조 4년 이인좌의 난에 공이 있어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선생은 영조 10년(1734년) 12월 졸하니 향년 67세였다. 유성 남쪽 만남촌 언덕에 장사지내고 이익(李瀷)이 묘지(墓誌)를, 오광운(吳光運)이 비문을 짓고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시장(諡狀)을 지었으며 신도비문은 정범조(丁範祖)가 짓고 판서 강시영(姜時永)이 글을 쓰고 6대손 참판 영수(永秀)가 전자체를 썼다. |
유회당 별묘와 삼근정사는 묘, 시냇물, 철쭉이 가깝다는 이름이며 유일한 시묘소이다. |
先生의 經世觀 선생은 호조판서 재직 시 십분절용(十分節用), 면세된 전토(田土)의 혁파 등 재정을 확보하는데 주력하였으며 동래부사로 나갔을 때는 왜관(倭館)의 문제점을 파헤쳐 왜인과 불법상거래를 금지시키고 관원의 기강을 확립하며 국위를 우선하는 등 대책을 세웠으며 평안관찰사 재직 시 변민보호와 국경방비, 군진개편 등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선생은 사회개혁에 있어 홍문관수찬으로 당론해소, 사통입사(私通入仕) 근절, 부역 균등, 국경방비 강화, 왕실내장 절감, 기강확립 등 입정육조(立政六條)의 소를 올리면서 인재등용에 있어 당을 보지 말고 사람됨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호조판서 시 향교는 당론의 소굴로 화했으며 향소(鄕所)운영의 타락을 지적하는 양역헌의(良役獻義) 7개 항을 올렸다. |
장판각과 판목(246판) |
선생이 40년간 내 외직을 두루 거치면서 당쟁에 휘말리지 않은 것은 만회 권득기의 십자훈(十字訓)을 평생 가훈으로 삼고 붕당에 무관심하면서 관료로서 탁월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외관계에 있어 國威를 우선하고 원칙에 입각해 처리하며 변민(邊民)들의 생활안정을 도모하면서 국가의 위엄을 보여주는 회유책을 펼쳤다. 先生의 學問思想 |
여경암(대전시 유형문화재 제 18호(승려의 슥식을 위한곳) |
선생의 학문은 선대의 가학(家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오광운의 묘갈명에서 「기고로 전심가학 旣孤露 專心家學」이라 한 것이나 이익의 묘지명에서 「우전심가학 尤專心家學」채제공의 시장에서 「유지가학 幼志家學」이라 하듯이 가학은 증조부 권득기와 조부 권시의 가르침이었다. 권득기 공은 당론에 거리를 두면서 도덕적 합리주의를 주장하였다. 공은 자손들에게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하기보다 착한 사람이 되어 범사 구차하게 살지 말 것을 당부하여 十字訓을 강조하였는데 후손들이 이를 십가훈(十家訓)으로 삼았다. |
거업재(유회당 자손과 후학들 학업을 위한 곳) |
조부인 탄옹 권시는 남인의 영수이며 당대 명필인 허목(許穆)과 친교를 맺고 있으면서 부친 만회의 가훈을 계승하고 또 유회당에게 전승하였다. 유회당에게 가학 다음으로 영향을 준 것은 우암 송시열이었다. 우암(尤庵)의 근본사상은 직사상(直思想)이었으므로 유회당도 직사상을 계승하였다. 유회당의 학문적 스승인 윤증의 사상은 무실(務實)이다. 채제공의 유회당 시장에서 “공의 학문은 무실하되 무화(務華)하지 않고 무내(務內)하였으되 무외(務外)하지 아니하였다.”라고 한 것에서 선생의 학문사상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재경실무에 밝고 훈고학풍을 벗어나 고증학에 바탕을 둔 우리나라 실학계의 선각자로 알려졌다. 선생은 시문(詩文)에 능하여 문집(文集) 12권과 증조부의 만회집(晩海集) 등을 편찬하였다. 先生의 文化遺蹟 |
무수동 유회당 종택(좌 : 안채 우: 사당) |
선생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무수동 마을 찬성공 묘소 아래 별묘와 삼근정사를 짓고 잠시 관직에서 물러날 때는 시묘를 하면서 자손들에게 강론을 하고 독서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유회당 당사(有懷堂 堂舍)는 숙종 34년 선생이 부모를 흠모하여 마련하면서 시인 전겸익의 “명발불매 유회이인 明發不寐 有懷二人”이란 싯구에서 잠 못 이루며 부모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유회당(有懷堂)이라 하고 자호(自號)로 삼았다. 찬성공 묘소 아래 삼근정사(三近精舍)는 선생이 숙종 33년 시묘살이를 위해 마련하였는데 친산과 꽃동산, 물과 수석이 가까이 있다고 선생의 하거원기(何去園記)에 전하고 있다. 아울러 좌측으로 별묘(別廟)를 세워 두 분의 신위를 모셨다. 별묘 좌하로 숙종 41년에 세운 여경암(餘慶菴)과 거업재(居業齋)(대전시 유형문화재 제18호)가 있는데 선생이 자손과 후학들의 학문을 연마하도록 마련하였으며 여경암에는 승려를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
쌍가마(유회당이 경상, 평안감사 역임시 내외분이 승용한 것으로 전래) |
장판각(藏版閣)은 선생의 문집 판목 246판이 보존되어 있으며 선생의 증손 상서(尙恕)의 필체로 순조 초에 판각한 것이다. 유회당, 삼근정사, 별묘, 장판각은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6호이며 종가(宗家)는 유형문화재 제29호로 등록되어 있다. 유회당 종가는 유회당이 1707년 무수동에 자리잡아 가사를 세웠으며 1784년 화재로 전소되자 그 후 재건하였다. 쌍가마는 유회당이 경상, 평안관찰사를 역임하면서 내외분이 승용한 것으로 전하며 두필의 말이 전후로 메고 운행하는 것으로 현존실물이 드문 민속문화재에 속한다. <편집인 권경석/권태원교수 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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