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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 순례 26] 巢雲 權仁圭선생 3代 獨立抗爭記(종보 제382호 20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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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9,558회 작성일 12-07-16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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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 순례 26] 巢雲 權仁圭선생 3代 獨立抗爭記

권인규선생은 추밀공파31세로서 초휘는 현규이고 호는 소운이다. 13世 국재공(菊齋公)의 증손 평후공(平厚公)휘 충(衷)은 호조판서(戶曹判書)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17세(世) 예참공(禮參公) 숭례(崇禮)계로서 오죽헌(烏竹軒) 처균(處均)의 후손으로 통덕랑 계주(啓周)의 증손이며 극(極)의 계자이다. 헌종9년(1843년) 계묘 7월 12일 출생했으며 효행과 학덕이 뛰어남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 받았는데 공은 학덕이 풍부함으로 평생학문에 종사해 어지러운 세상에 후학을 양성해 태평성대를 갈망했으나 세월이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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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운 권인규선생

갑오동학농민군(甲午東學農民軍)이 강릉에 들어와 지부(支部)를 위협하고 선교장을 공격하게 되었다.
선교장의 이회원(李會元)과 더불어 민보군(民保軍)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물리쳤다. 동학군은 강릉에서 대패하여 영서(嶺西)산간에 숨어들게 되었다. 강릉부사 이공(李公)은 수십만의 동학을 다 색출하여 죽이려 했으나 그때 소운이 부사(府使)에게 편지를 보내서 무지몽매한 동학군을 모두 사면하여 돌아가 농사에 힘쓸 수 있도록 놓아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 결과 동학군은 사면되어 돌아갔다.
이 내용은 巢雲文集에 자세히 수록되어있다. 그 후 나라는 안정되지 않고 을사조약이 강제로 늑약되고 명성황후가 시해되니 국운이 날로 기울어 감을 보고 소운은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충의로 분연히 일어서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다.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성과(成果)
소운 권인규(權仁圭) 선생은 관동창의소(關東倡義所)를 설치하고 예안창의통문(禮安倡義通文)을 답하고 관동창의포고문(關東倡義布告文), 관동창의사효유문(關東倡義士曉諭文), 관동창의사효(關東倡義使曉), 유문세고문(諭文細告文) 등을 지어 선비들과 백성을 격려하고 군을 정비하던 중 때 마침 민용호(民龍鎬)가 경기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안승우(安承愚)가 합진입대(合陣入隊)를 권유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강릉의 권인규를 찾아와 방향을 상세히 지도 받은 후 영동 일대에 의진(義陣)과 연합하고 산군(山郡) 지방의 포수들을 모집하여 영동9군도창의소(嶺東九郡都倡義所)를 설치하고 이병채(李秉採), 최중봉(崔重峰) 등 의병장을 규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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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운창의록(독립기념관에 소장)



권인규는 당시 강릉 일대에서 유력한 인물이며, 저명한 유학자로서 강릉 유림의 지도자였으며 이때 민용호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어 의병운동을 격려하였다.

“장군은 소년 서생(書生)으로 시서(詩書)만을 읽고 외며 예의(禮義)만을 강론(講論)하다가 시운이 불행하여 섬 오랑캐가 악한 짓을 거듭하여 나라가 위급하게 되었기에 소리쳐 의병을 일으켰는데, 계획하는 것이 정확하여 무인으로도 입을 벌리고 기운이 꺾이게 하니 이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오늘 장군이 하시는 일은 곧 관동9군 몇만명 백성들의 생사 안위가 관련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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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운선생 관동창의 포유문

한편 소운선생의 창의록(倡義錄)중 창의포고문(倡義布告文)을 보면 “아! 사람이 죽음을 싫어하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니 금수(禽獸)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금수와 다른 것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을 타고 난 때문이다. 선왕의 교화(敎化)를 잊지 아니하고 조상을 생각하여 용맹(勇猛)을 낸다면 살아서 충신(忠臣)의사(義士)가 되어 국가 만년대업(萬年大業)에 빛날 것이며 ---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義兵)을 일으킨다면 죽지 않을 것이니 하늘이 돕기 때문이다. 분발하여 하루 빨리 의병에 참가한다면 어찌 굳굳한 대장부(大丈夫)가 아니겠는가? 아! 우리 5백년 대소 시민들아 저 왜놈의 궁흉(窮凶)극악(極惡)을 보라 곳곳마다 의병을 일으켜 왜놈을 무찌른다면 살아서는 예(禮)의 사람이 되고 죽어서는 예(禮)의 귀신이 되리라!”

의병운동의 선구자인 권인규, 그의 아들 종해, 손자 기수(基洙) 3대가 조국을 위해 의병운동에 앞장서 심신을 불살랐다. 정부에서는 권인규선생의 공을 기리며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소운의 아들 권종해(權鍾海, 호:惺波)의 자는 선명(宣命)이요 일명은 주성(周成)이고 인규의 차자이다. 고종 7년 1870년 6월 16일생이며 1906년 강릉유림 대표로 서정되어 성균관에 진정하고 대동문우회(大同文友會) 및 법부평의회(法部評議會)에 고소하여서 친일군수(親日郡守) 이재화(李載和)와 친일거부(親日巨富) 이근우(李根宇), 조익환(曺翊煥) 등을 추방하는 지시를 내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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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활동 모의도

고종황제가 양위하고 1907년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결사항쟁을 마음속에 다지고 원주병영에 가서 특무 민긍호와 의무도총 이재희 및 지휘관 김도제 등과 구국광복운동의 전략에 대하여 모의하였다. 여기서 무기 1,800자루를 얻어 의병소모장(義兵召募長)이 되어 관동일대에서 소모활동을 하면서 왜적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2월 모집한 의병을 거느리고 이강년 의병과 합류하여 백담사 전투에서 적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인제 운두령에서 동년 5월에는 정선군 북면 단림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그런데 왜군은 6월 6일 강릉초당 본가에 침입하여 모친인 김씨를 살해하고 둘째 아들 증수를 총검으로 복부를 찔렀으며 가옥을 전소시켰다.

1909년 4월 군사를 양양으로 이진하였다가 밀정 김성서의 밀고로 적에게 야습을 당하여 크게 패전하고 군사를 해산하였으며 1913년 서울에서 김종익과 함께 의군부를 조직하여 유격장(遊擊長)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천면 장제호의 집에서 체포되어 10년 형을 받고 수감 6년만에 출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출옥한지 얼마 안 된 몸으로 다시 강원도 충북일대를 잠행하여 무력항쟁을 계획하다가 그간의 행적이 탄로나 다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투옥 된지 4년만에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 12월 21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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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운기념관 조감도



권기수(權基洙)는 권인규의 손자로서 호는 청계고 고종 31년인 1894년 정월 21일생이다. 1907년 의병군중에 종사관을 지냈고 부친 의병활동에 참여하다 1908년 왜군에 잡히어 3개월간 고초를 겪다가 풀려났다. 1909년 광복단(光復團)에 가입, 민중운동을 전개하고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받아보고 동지들과 영월, 평창지역에서 함께 시위를 주도하다 그 해 일경에 체포되어 무수한 고초와 고문을 당하고 실형을 받아 수년간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고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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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운사당 조감도

權仁圭先生의 巢雲倡義錄이 나오기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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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운선생은 사필(思珌)의 차자로 태어나 숙부인 극(極)에 계자로 입적하였는데 14세 때에 경주김씨댁과 혼인하게 되어 혼례를 치르고 첫날밤 처가의 처남벌 되는 사람들 수십 명이 와서 신랑 인격을 시험코자 한 사람이 문제를 내는데 ‘오늘 신랑은 강릉(江陵)에 이름 있는 사대부(士大夫)가의 공자님이니 물론 글은 잘 할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시회(詩會)를 열어 즐겨보자며 시제(詩題)를 정하고 운자(韻字)를 부른다!’ 하니 그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인규는 그때까지 글을 읽지 않았으므로 詩는 엄두도 못 냈으니 그는 한참 후 지필묵을 그대로 둔채 소피를 핑계 대고 도망쳐 밤중에 본가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 양가에서는 난리를 겪었고 인규는 모친 전씨에게 혼인은 그만두고 글을 배우겠다 고하고 사력초권을 끼고 서당으로 가 그날부터 주야불문하고 4~5년 만에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다 통달하고 그 서당을 인수하여 60이 넘도록 제자를 양성하여 진사(進士)와 급제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소운창의록은 그후 그의 아들 권종해가 단행본으로 묶어서 세상에 내었는데 이 글은 당시 의병운동의 상황을 후세에 전하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소운창의록에도 문집과 시집본이 있으나 증손인 권영좌씨는 사장될 위기에 처해 있으니 너무나 안타깝다 탄식하며 그 일부를 본 종보에 연재한바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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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증



강능에 있는 소운장(巢雲庄)은 본시 권인규의 집으로 만권서적(萬卷書籍)이 서재에 쌓여 있고 100여명의 학생이 강의를 받을 수 있는 강당과 중문 안으로 들어가 내실로 되어 있었으며 세대로 내려오던 석봉의 친필병풍과 보물로 전해오는 가보 이석궁이라는 활이 있었다고 하며 소운선생의 묘소는 강원도 평창군진부면 거문리 능동에 있었으나 현재는 대전국립묘지 현충헌에 배위 경주김씨와 함께 안장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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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운선생이 애독하고 저술한 유고들

소운선생 기념사업회는 소운 권인규선생 3대의 독립운동사를 기리기 위해 강능에 소운선생 사당과 기념관 건립 계회안을 마련하고 추진중에 있는데 정부에서 관심을 가지고 적극지원하여 구국 선열들의 넋을 위로하고 빈한한 후손들에게 은전을 베풀어 국난에 처했을 때 국민들이 나라를 위해 분골쇄신할 수 있도록 배려가 절실하다.


<편집인 권경석, 자료제공 : 권영좌 02 462-9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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