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공(原靖公) 적(適)과 제자손(종보 제484호)201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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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315회 작성일 15-08-31 11:30본문
창화공의 차자 원정공(原靖公) 적(適)은 호가 계정(繼亭)이고 충혜왕 2년 관직이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였는데 원의 황제가 왕을 폐위시키고 충숙왕을 다시 복위시킬 때 왕을 잘 보필치 못하였다는 것으로 파직되고 유배되었다.
공은 성절사의 부사가 되어 원에 가서 힘쓴 끝에 왕을 석방시켜 환국하여 즉위케 한 공으로 첨의부참리에서 찬성사가 되고 화산군(花山君)에 책봉되었다.
공은 충혜왕 복위 4년 간신 강윤츙, 민환 등의 미움을 사 부친과 함께 많은 노비를 빼앗겼다. 다음해 또 충혜왕이 원에 잡혀가 유배되는 도중 왕이 승하하자 충목왕이 즉위하였는데 공은 10월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고 충정왕 3년 참리(參理)가 되었다.
공민왕 10년 홍건적의 난에 승병을 거느리고 공을 세우니 단성보절공신(端誠保節功臣)이 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승차되었으며 공민왕 14년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 공의 사후 원정(原靖)의 시호를 받았다. 배위 대부인 남양홍씨는 익산군(益山君) 운수의 딸이고 재배 의창황씨는 유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 능동에 있다.
원정공(原靖公)의 아들은 밀직제학(密直提學) 현(顯)이고 현의 아들은 부윤공 손(遜), 진사 선(選), 병조판서로 추증된 호군공 정이다.
1. 17세 부윤공 손 묘소 : 화성시 남양면 문호리 대감동
2. 17세 손, 18시 수 묘비
3. 18세 수 묘소 : 선고묘 계하
4. 대감재사 : 화성시 남양면 문호리 대감동
17世 부윤공(府尹公) 손(遜)과 자손
태조실록에 태조 2년 왕이 신덕왕후와 함께 경천사와 유정동에 있는 공의 사제에서 연(輦)을 내렸다는 기사가 있으니 공은 태조와 잘 아는 사이인 듯 하다. 세종 12년 호조(戶曹)에서 공법을 개정하고자 백관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공이 검교한성윤으로 이는 불가하다 하였다. 공의 생, 졸 년대는 미상인데 단종 1년 공의 묘소가 경기 남양에 있었는데 안평대군 이용이 그 부인을 장사코자 하였다. 의정부에서 의논하기를 나라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면 부당하다고 하였다. 묘소는 화성시 남양면 문호리 대감동에 있다.
공은 5남 2녀를 두었는데 장자 정(井)은 교수이고 차자는 이(怡) 대호군이며 3자는 칭(稱) 사직, 4자는 췌(萃), 5자는 교리(校理)공 수(需)이다.
교리공(校理公) 수(需)는 세종 17년 식년시 문과 급제하여 집현전 정자, 교리와 지군지사를 지냈다. 세종 23년 승문원 박사로 성균관 주부(注簿)에 제수되었는데 단종 1년에 함길도 도사(都事)를 지냈는데 안평대군에게 병기를 조달한 사건과 관련하여 관찰사 김문기와 함께 탄핵을 받았다.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이 숙청되자 공도 피화된 것으로 보인다. 묘소는 선고묘 계하에 있다. 배위 창녕조씨는 충정공 상치의 딸이고 성삼문 박팽년과 더불어 세종, 문종, 단종 3대를 섬기고 세조가 예조참판을 배하였으나 사직하고 묘비에 “노산조 부제학조상치”라 쓰게 하였다. 후에 장릉에 배향되었다.
아들은 황(晃)과 호(暠)를 두었는데 황(晃)은 부사를 지내고 묘소는 화성 비봉 삼화리에서 마도면 쌍송리 송치로 이장하였다. 호(暠)는 주부로 세조 1년 별시 문과 급제하고 세조 2년 문과중과에 승문원 정자 1등으로 급제하였다. 황의 아들은 이평(以平)이다.
이평(以平)은 별좌(別坐)로서 중종반정에 정국원종공신으로 녹훈되고 명종 14년 개성부 도사로 나온다. 묘소는 화성시 마도면 쌍송리 송치에 있다. 아들 옹(雍)은 현간을 지내고 묘소는 쌍송리 송치 선고묘 우측에 있다.
이평의 증손 민각(民覺)은 가선대부 호군이다. 옹(雍)의 현손 신도(信道)는 무과 부사이며 묘소는 남양 문호리 대감동 선영에 있다. 민각(民覺)의 손 덕유(德裕)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묘소는 비봉면 쌍학리 완현사에 있다. 덕유의 제(弟) 덕창(德昌)은 수직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이고 묘소는 화성시 남양면 염치에 있다.
5. 19세 황 묘소 : 화성시 비봉 삼화리에서 마도면 쌍송리 송치
6. 20세 이평 묘소 : 마도면 쌍송리 송치(선고묘 우측)
7. 21세 용 묘소 : 마도면 쌍송리 송치(선고묘 우측)
17世 호군공(護軍公) 정
공은 호군인데 장자 개(愷)가 귀히 되어 자헌대부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미상이다. 아들은 개(愷)와 각(恪)을 두었다.
18世 문평공(文平公) 개(愷)
세종 29년 친시문과급제하고 세조 1년 추충좌익공신에 녹훈되고 세조 2년 선공감정으로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 겸 요동도사 선위사가 되었으며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이어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에 보임되었다. 세조 3년 지병조사(知兵曹事),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오르고 세조 4년 사정전(思政殿) 연회에 축하시를 지어 올리고 2월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서 황해도 관찰출척사(觀察黜陟使)로 나가고 좌익공신으로 녹훈된다.
세조 6년 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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