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家의 正宗 石洲先生 諱 韠(종보464호20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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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005회 작성일 14-01-21 10:39본문
선생은 자는 여장(汝章)이며 자호를 석주(石洲)라 하였다. 선조 2년 서강 현석촌에서 습재공 벽(擘)의 다섯째로 출생하니 수문전 대제학(大提學) 첨의정승(僉議政丞)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국재 문정공 권보(菊齋 文正公 權溥)의 9세손이고 대제학(大提學)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양촌 문충공 휘 근(文忠公 近)의 6세손이며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낸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안숙공 준(安肅公 諱 蹲)의 5세손이다. 생부는 예조참의를 지낸 습재공(習齋公) 벽(擘)이고 양부(養父) 진사공 별은 생원 진사양시에 합격하고 성균관태학생이었으나 30대에 졸하였다.
01. 운암서원(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
선생은 19세에 사마시에 장원(壯元)하였으나 1자 오서로 출방되었다. 예조판서 이정귀(李廷龜)가 천거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하였는데 누가 예조에 참갈하는 것이 상례라 하자 ‘녹을 위해 굽힘은 나의 뜻이 아니다’ 하고
강화로 들어가 오류천에 초당을 짓고 후학을 길렀다.
광해조에 궁류시(宮柳詩)로 피화되니 수 44세였다. 인조반정 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추증되고 집의(執義)로 가증되었다.
선생은 권문의 본관인 화산(花山)을 가문의 영예로 여기고 화산세첩(花山世牒)에 서(序)를 하였으며 국재공의 제문(祭文)을 짓고 노모에 대한 정이 애틋하였다. 선생은 명군(明君)을 보필할 것을 이상으로 여겨 병서(兵書)를 탐독하고 육경(六經)에 뜻을 두었으나 당쟁과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국(憂國)충절(忠節)을 시로 표출하곤 하였다.
02. 운암사(해광 송제민, 송타, 석주 권필 선생 위패봉안)
20세에 이정귀(李廷龜), 이안눌(李安訥), 조찬한(趙纘韓) 등 문인과 시로 벗하였다. 23세에 강계로 귀양간 정철(鄭澈)을 이안눌과 찾아가니 송강(松江)이 천상(天上)의 두 선인(仙人)을 얻어 기뻐했다고 전한다. 26세에 1차 호남여행을 하고 28세에 2차 호남여행을 하면서 벗들과 시(詩) 교류를 하였다. 이때 홍주송씨를 배필로 삼았다. 지금도 장성의 망암(望庵) 변이중(邊以中) 선생의 후손들이 석주선생이 와서 시(詩) 교류(交流)했던 사실을 영예로 여기고 있다.
03. 화산사(충남 서천군 기산면 화산리)습제공 벽, 석주공 등 위패봉안
선조 34년 33세에 명사(明使) 고천준(顧天峻)이 왔을 때 접빈사 이정귀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의주(義州)에서 만나니 선생의 시에 감탄하였다.
선조조에 문단의 성황을 이루었으니 시에는 호소지(湖陰, 蘇齋, 芝川)를 필두로 삼당(三唐)이 이었으며, 문은 월사 이정귀(月沙 李廷龜), 계곡 장유(谿谷 張維), 택당 이식(擇堂 李植), 상촌 신흠(象村 申欽) 사대가(四大家)에 이어 이산해(李山海) 등 팔문장(八文章)들이 줄을 이어 정철(鄭澈), 허균(許筠), 월사의 아들 이수광(李晬光), 정홍명(鄭弘溟), 정두경(鄭斗卿), 권벽(權擘), 조위한(趙緯韓) 형제 등 명공(名公)들이 이었다.
04. 석주 권필선생 존영과 유허비(강화도 송해면 하도리 오류천 상류)
시(詩)는 감정 표현에 중점을 둔 당시(唐詩)에 주류를 이루어 허균은 호(湖),소(蘇), 지(芝)를 이은 삼당(三唐)의 흐름을 받아 석주(石洲)가 학당(學唐)의 도도(陶陶)한 흐름을 완성시켰다고 하였다.
공의 시(詩)는 빼어나 당대 시가(詩家)의 정종(正宗)이라 일컬었으니 선조조에 대가(大家)들 중 허균(許筠)은 石州詩 32편을 뽑고 시가 청묘(淸妙)하다 하였고, 남용익(南龍翼)은 석주시가 격조(格調)가 뛰어나다 하며 고려(高麗), 이조(李朝)에서 뛰어난 시인 6인을 뽑고 평하였는데 「情境之諧 權石州 爲宗」이라 하여 石州를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에 비견하였다.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은 삼당시인(三唐詩人)을 이어 당송(唐宋)을 가려모아 아속(雅俗)에 두루 밝아 가장 생대한 시기를 열었다고 하였으며 정두경(鄭斗卿)은 석주시는 매우 부드럽고 아름다우니 돈오(頓悟)라 하였으며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는 여장의 시(汝章 詩)는 청려전아(淸麗典雅) 하다고 하였다.
선생은 당(唐)의 이백(李白), 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 등을 사모하고 그들의 시(詩)를 좋아 하여 시로 예찬(禮讚)하였다.
05. 석주 권필 시비(고양시 행주외동 행주산성 공원)
06. 석주선생 시비 건립회의(고양시청)대종회장 권정달, 추진위원장 이은만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쓴 묘갈명(墓碣銘)에서 “당시 선비들이 선생을 뵈오면 영예로 여겼고 내행(內行)이 매우 독실하였다. 계곡(谿谷) 장문충공(張文忠公)이 선생의 시(詩)에 서하여 세상 사람들이 시를 보지 아니한 까닭에 그 사람을 얻지 못한다. 선생의 학문을 살펴보니 주역(周易)에 정통하였으며 품은 뜻이 커 연(燕), 허(許)를 사모하고 정(程), 주(朱)를 본받더니 갑자기 화기를 밟아 그치니 후세 사람들이 그 시(詩)만 전할까 두려워 삼가 그 깊은 뜻을 밝혀 길이 후세에 알리노라”하였다.
07. 석주공 비각(고양시 성석동 윗감내)
명재 윤증(明齋 尹拯)은 선생의 행장(行狀)에서 “여장은 증점(曾點)의 뜻이 있어 파죽지세로 성공할 것 같더니 하늘이 참혹한 재앙을 내리니 우리 유가(儒家)의 불행이다." 하였다. 광해의 외척이 선생과 교유(交遊)하기를 원했으나 선생이 이를 기피하던 차 광해가 임숙영의 삭과(削科)를 명하니 선생은「宮柳靑靑花亂飛 滿城冠盖媚春暉 朝家共賀昇平樂 誰遺危言出布衣」시를 지으니 유포되어 광해가 노하여 친국(親鞫)하였다. 이항복(李恒福)이 간하여 사형은 면하고 귀양보내 동대문밖에서 장독(丈毒)에 졸하니 임자(壬子) 4월7일 이었다. "선생은 울림이 높고 우뚝하여 도에 이르니 장횡거(張橫渠)의 용맹에 가까웠고 고명하여 조예(造詣)를 꿰뚫음은 위로 경계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08. 석주공 묘소(비각 위)
조선왕조실록 광해 4년 임자 4월에 “필(韠)이 시를 함에 있어 제가(諸家)의 장점을 모두 모아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으니 논자(論者)들이 국조(國朝)의 정종(正宗)으로 추대하였다. 그 죽음을 듣고 원근이 기운을 잃었다. 韠承其緖專力爲詩盡集諸子之長西自成一家 論者權爲國朝正宗 聞其死遠近沮喪”고 하였다.
석주공은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으니 국재공과 노모에 읊은 시와 형 초루공에게 보낸 시가 회자(膾炙)되고 있다.
09. 석주선생 유묵1(연세대학교 박물관 소장)
선생은 짧은 생애에 석주집과 한문소설 주생전(周生傳)을 남기고 정주(程朱)에 뜻을 두어 도학정맥(道學正脉)을 편수하였다. 석주집은 이정귀와 장유가 서하고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발문하였으며 근세에 허다한 학위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공은 강화 경현사(卿賢祠), 광주 운암사(雲巖祠), 서천 화산사(華山祠)에 배향되고 있다. 배위 홍주송씨는 인조 15년 호란중에 강화에서 자액하였는데 영조 32년 열녀(烈女)의 정문(旌門)이 내렸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성석동 선고묘 계하에 합폄이다. 묘갈명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한포재 이건명(李健命)이 글을 썼으며 단암 민진원(閔鎭遠)이 전자체를 썼다. 또 명제 윤증(尹拯)이 행장을 썼다. 선생은 동몽교관을 그만두고 강화도 송해면 하도리 오류천으로 가 초당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여기서 시를 많이 썼으며 유허비가 있다.
10. 석주선생 유묵2(필암서원 강당 보존)
오늘에 이르러 수많은 후학들이 선생의 시를 연구하고 1999년 한양대학교 정민(鄭珉)교수가 목릉문단과 석주 권필을 펴냈으며 석주집 간행 376년 만인 2009년 석주집을 번역하여 문중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출판기념회를 하였다.
석주집의 시는 836수 문은 25편으로 본집 8권 외집 1권 별집 2권 등 11권 4책으로 발간되었고 시(詩)는 오언고시(五言古詩), 칠언고시(七言古詩), 오언율시(五言律詩), 칠언율시(七言律詩), 오언배율(五言排律), 오언절구(五言絶句), 칠언절구(七言絶句), 잡채시(雜菜詩) 등이다.
또한 2008년 '올해의 자랑스런 고양인'으로 선정되어 정민(鄭珉) 문학박사의 학술발표가 있었다. 2009년 3월14일 행주산성 공원에 고양시가 주관하고 석주공종중이 협찬하여 석주공 시비(詩碑)를 건립하였다. 시비는 가로 5m 세로 6m로 이은만원장이 건립위원장으로 한국외국어대 이윤옥 교수가 비문을 썼고, 한양대 국문학과 정민교수가 선정하여 국역한 시 '감회(感懷)'와 '이름 모를 나무, 백낙천을 본받아' 두 편으로 서예가 조갑녀씨가 썼다.
11. 25세 반곡공 수 묘소(논산시 벌곡면 사정리 자고목)
석주공의 자 항(伉)은 청하현감을 지냈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손 속(謖)은 요절하였는데 손자 적(礻啇 )이 귀히 됨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다. 증손 수(忄遂 )는 석주공의 손 속(謖)이 요절하여 임금이 석주 權韠의 대를 잇도록 명하여 속(謖)의 계자가 되었다.
반곡공 수(盤谷公 諱 忄遂 )는 병과 제1인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고 동래부사 예조참의 상주목사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觀察使)가 되고 졸 후 좌찬성(左贊成) 문형(文衡)으로 추증되었다. 반곡공의 아들은 효정공 적(孝靖公 諱礻啇 )이다.
12. 효정공 휘 적 교지(사헌부대사헌)
효정공(孝靖公)은 생원시 장원으로 입격하고 문과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호조, 예조, 병조참의를 거쳐 이조참의 대사헌(大司憲) 도승지 전라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갔다. 이어서 경기관찰사, 이조참판, 한성판윤(漢城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 좌참찬(左參贊)에 이어 예조판서(禮曹判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고 이듬해 회혼연(回婚宴)에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었으며 80세 졸하였다. 공은 평소에 부모섬기기를 40년 지극정성을 다하였으며 말년에 계모 봉양이 이와 같으니 주상은 선문을 세워 표창하라 이르고 효행(孝行)의 정려(旌閭)가 내렸다.
13. 효정공 교지(전라도 관찰사)
14. 26세 효정공 적 묘소(금산군 부리면 절곡)
아래 선생의 시(詩) 7수로는 선생의 모두를 알 수는 없지만 정황(政況)을 알것 같아 소개한다.
讀杜詩偶題 두시를 읽고 흠모하는 마음으로 짓다.
杜甫文章世所宗 一回披讀一開胸 神飇習習生陰壑 天樂嘈嘈發古鐘
雲盡碧空橫快鶻 月明凔海戲群龍 依然步入仙山路 領略千峰更萬峯
두보의 문장은 세상의 으뜸이라 한번 펼쳐 읽으면 한번 가슴트이네
그늘진 골자기에 신풍이 일고 고종에선 하늘 음악 떠들썩 들리는 듯
해맑은 창공에 송골매 날고 달 밝은 푸른 바다 뭇 용들이 노니는 양
차분히 신선의 산길로 접어드니 천봉을 가고 나면 또 다시 만봉일세
征婦怨 임진난의 상흔을 읊었다.
交河霜落雁南飛 九月金城未解圍 征婦不知郎巳沒 夜深猶自擣寒衣
교하에 서리내려 기러기 남으로 가는데 9월에도 금성에 포위가 풀리지 않네
정부는 지아비 죽은 줄도 모르고 깊은 밤 홀로 겨울옷 다듬질 하네
鬪狗行 당쟁과 외척의 전횡을 개싸움으로 비유하다.
誰投與拘骨 群拘斗方狼 小者必死大者傷 有盜窺窬欲乘釁 主人抱膝中夜泣 天雨墻壞百憂集
누가 개에게 뼈다귀를 던져 뭇 개들 저리도 사납게 다투나
작은 놈 꼭 죽겠고 큰 놈도 다치리니 도둑은 엿보아 그 틈을 타려하네
주인은 무릎 안고 한밤중에 흐느끼니 비에 담도 무너져 온갖 근심 모여드네
주: 정홍명의 기암만필에서 대소구는 대북,소북으로 주인은 군주를 개싸움은 당쟁으로 뼈다귀는 정권으로 도둑은 외척으로 설하였다.
馬上口占 임진전쟁이 한참인데 조정엔 대신이 없음을 한탄하며 읊조림
國在艱虞日 朝無老大臣 嶺南猶戰伐 關北尙風塵 耿耿此時恨 悠悠何處人 長吟出師表 涕淚滿布巾
나라에 어려움에 처해 있던 날 조정엔 노대신이 없구나 영남은 그대로 전장터이고 관북은 여태도 풍진이 이네
이때의 한심스러움 안타까워라 유유한 이 어드메 사람이던고 길게 출사표를 읊조리니 눈물만 옷깃에 가득하구나
靜中吟 마음을 비우면 사악이 물러가고 맑은 마음으로 바라보면 천리의 조화를 본다
意實群邪退 心虛一理明 靜時觀萬物 春氣自然生
뜻이 차니 뭇 삿됨 물러가고 마음 비니 한 이치 분명하고 고요할 제 만물을 가만히 보면 봄기운이 절로 일어나누나
布穀 새 울음 소리를 따라 짓는 禽言體
布穀布穀 布穀聲中春意足 健兒南征村巷空 落日唯聞寡妻哭 布穀啼誰布穀
田園茫茫烟草綠 뻐꾹 뻐꾹 뻐꾹새 소리 중에 봄은 무르익었는데 사내들은 남정가서 마을이 텅 비었네
저물역 들리느니 과부들의 울음소리 씨 뿌려라 울지만 뉘 있어 씨뿌리나 아득한 들판엔 풀빛만 푸르고나
對菊有感 9대조 대제학 국재공을 흠모하며 느낌이 있어
愛花曾號菊齋翁 遠識吾家文正公 舊事茫茫無處問 一樽惆悵對西風
꽃을 아껴 일찍이 국화옹이라 하니 저 멀리 우리 집안 문정공을 알리라
옛일 아득하여 물을 곳 없어 한동이 술 서글프게 서풍과 마주하네
<不肖 14代孫 景晳 編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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