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풍군(永豊君) 휘(諱) 길(吉) (종보 제440 20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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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706회 작성일 12-04-20 21:56본문
수령이 성을 버리고 도주하는데 사지를 보고도 살아 욕되지 않게 하였으니 보국의 충절 권판관 22世 영풍군(永豊君) 길(吉)은 양촌(陽村)선생의 제2자 지재공(止齋公) 제(踶)의 5대손으로 현조는 병조참판과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지낸 양평공(諒平公) 지(摯)이며 증조는 이천부사를 지낸 한(僩)이다. 조부는 충좌위호군(忠佐衛護軍) 승업(承業)이고 부는 익(翊)인데 익의 생부는 지재공의 4남 연천공(漣川公) 휘의 장손(長孫) 여(勵)이다. |
영풍군의 정려각(음성군 소이면 갑산리) 공은 중종 36년 출생하여 군위 현령을 지낼 때 치적이 탁월하여 임금이 비단과 갑산리 일대 임야를 하사하였다. 선조 24년 5월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부임하였는데 청렴하고 근실하며 정사를 처리함에 주도 면밀하니 관리들은 공경하고 백성들은 칭송이 대단하였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두 피란을 획책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동요치 않고 민심 수습과 상주 사수를 맹세하며 휘하 장졸들에게 “나는 나라를 위하여 죽을 것이다. 너희도 마땅히 나를 따라서 충성을 다하면 세상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라고 명하고 가족에게 “나는 보국진충할 것이다. 만약 시신 수습을 못하면 이것으로 장사하라 吾必死此 似難收屍 以此歸葬” 며 혈서(血書)를 의금(衣襟)에 써서 남기고 출전하였다. |
영풍군 정려문과 채제공의 준공기 |
왜적이 당도하니 상주목사 김해(金澥)는 도망가고 순변사 이일(李鎰)이 힐책함에 공은 밤새워 고을을 순회하여 700 여 민병을 모집 군용을 갖추었지만 이일은 병사가 나약하여 성을 지킬 수 없다 하자 공은 수성을 주장하였음에도 이일은 전군을 북천변으로 이동 포진하였다. 왜군이 총포로 습격하니 순변사는 도주하고 공은 휘하 장졸들과 혈전을 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군기 아래에서 최후를 마쳤다. 성실한 부하 박걸(朴傑)은 판관을 호위 진력하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
영풍군 휘 길의 묘소(음성군 소이면 갑산라 능안) |
선조실록 4월자에 “이일이 조령을 넘어 문경에 들어왔는데 고을은 한사람도 없이 빈 상태였다.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군사에 먹이고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는 순변사의 행차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산속에 들어가 숨었다. 이일이 판관 권길에게 군사를 뽑도록 하여 밤새도록 수색하여 수백명을 얻었는데 모두 농민이었다. 이일이 곡식을 내어 백성을 유인하니 창졸간에 6천명이 되었다. |
영풍군 신도비와 왜적과 전투에서 최후를 맞음을 상징하여 두건이 잘린 문인석 |
적이 집결하여 포환을 쏘며 좌우에서 포위하니 군사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이일은 말을 달려 도망가고 군사는 섬멸되었다. 종사관 박지, 윤섬과 방어사 이경유, 판관권길이 모두 죽었다.” 정조 10년실록 2월에 “중군이 패하자 김종무와 상주판관 권길이 같이 죽었으며 그 사실이 징비록(懲毖錄)에 기록되었으며 정문을 세워주었으니... ”라는 기록이 있다. 공의 순절이 계문되자 선조는 사실을 조사하게 하고 김물을 파송하여 치제케 하였으며 태어난 고장에 정려(旌閭)를 내리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사관 행 통훈대부 상주목판관 겸 상주병마절제도위로 추증하였다. |
영풍군을 주벽으로 배향한 충열사(상주시 북천) |
공이 최후를 맞기 전 말에서 내려 말 고삐를 풀러 고향으로 가라 보내니 말은 며칠을 걸려 상주에서 음성 갑신리까지 수백리를 달려 본가에 도착하여 소리높이 울부짖어 사람의 접근을 불허하더니 부인 창원박씨가 접근하니 상처입은 말은 조용해졌다. 안장에 흰옷 조각이 보여 살펴보니 혈서로 된 유서였다. |
권길의 말이 안장에 혈서를 품고 수백리를 달려 공의 죽음을 알리고 죽은 말무덤 |
판관의 유언에 따라 덕고개 선영하에 의관장(衣冠葬)으로 장례를 하고 말은 먹기를 거절한채 굶어 죽으니 짐승이지만 주인을 향한 충절이 사람만 못하지 않다. 가솔들은 갑산리 뒷산에 말을 장사 지내고 충마총(忠馬塚)이라 불러오다가 근년에 충마총이란 비석을 세우고 관리해 오고 있다. 난리가 평정되자 상주유림과 사인들이 북천변에 권판관의 사의비(死義碑)를 세우니 비문은 부제학 이준(李埈)이 지었다. |
이조판서로 증직한 영풍군 교지 |
조정에 주달하니 예조(禮曹)에서 치제(致祭)케 하고 인조 27년 상주 북문 밖에 충렬사(忠烈祠)가 건립되어 공을 주벽으로 호장 박걸을 추증하여 배향하였다.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 덕현의 충신 정려(旌閭)는 영조 48년 5대손 호(灝)가 주청하여 중수하였으며 그 기문은 영의정(領議政)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 고종 29년 대신들이 경연에서 주달하여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 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가증하고 영풍군(永豊君)으로 추봉하였다. |
영풍군 배위 창원박씨의 정부인 교지 |
1993년 상주유림과 시 당국이 북천 전적지의 역사적 중요성을 정부에 건의하여 충열사를 중건하고 국민정신교육장으로 조성하고 매년 6월4일에 상주시 주관으로 충렬사의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상주지 戰鬪狀況에 “3연군을 이끈 판관 권길은 고령에서 노숙하면서 순변사를 기다린지 수일이 되었으나 순변사는 오지 않고 적병은 가까이 오니 군사들이 놀라 움직였다. 큰비가 내려 행장은 다 젖고 군량까지 떨어짐에 군사들은 달아나고 지휘관들은 도망쳐 돌아왔다. 목사가 돌아와서 가솔들을 산속에 숨기고 자신은 순변사를 영접한다는 핑계로 달아나고 말았다. 백성들은 적이 오기도 전에 흩어져 성이 비었는데 성을 방어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목사에게 권유하던 판관 권길은 성을 외로이 지키고 있었다. 권길 등이 산속을 돌아다니면서 피란간 백성들을 성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적의 창칼이 더욱 어지러워졌다. 종사관 윤섬 박지 두사람은 적을 한칼에 내리쳤으며 권길이 목을 베었다. 권길은 청렴하고 근실한 사람으로 1591년 상주판관으로 부임했다. 왜란을 당하여 부하들에게 “나는 나라를 위하여 죽을 것이다. 너희들도 마당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서 상하가 모두 충성을 다하여 죽는다면 세상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고 하였다. |
영풍군의 장자 흔의 묘소(선고 계하) |
부제학 이준(李埈)이 쓴 판관권공사의명(判官權公死義銘)에는 “공의 죽음은 참으로 마땅히 죽을 곳을 얻어 죽었다 하겠다. 조정에서 순변사 이일을 파견하여 방어케 하니 이일은 목사 김해를 마중한다는 핑계로 나가려 하니 공은 정색을 하고 대병이 어지럽고 관민이 마음 부칠 곳 없는데 계책을 세우지 않고 어찌 출성하고자 합니까? 하고 적과 교전하니 중과부족으로 패배하였는데 공은 전사하였다. 처음 공이 성을 지킬 것을 의논할 때 산졸(散卒)들을 수습하여 울며 맹세하기를 진충보국(盡忠報國)할 날이 바로 지금이다. 나라를 건지지 못하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호장 박걸(朴傑)에게 피신하라 하니 박걸은 아후(我侯)께서 나라를 져버리지 않는데 우리가 어찌 아후를 져버리겠습니까? 하고 끝내 함께 죽었다.... 슬프다. 수령이나 장수들이 성을 버리고 직분을 버리고 달아나는데 공은 능히 고립된 성을 지키고 사지(死地)를 보고도 물러나 살아서 욕되지 않게 하였으니 아무나 능할 것인가? ...명(銘)에 군신의 의(義)는 삼강(三綱)이 으뜸이니 충성과 자못 의리는 신하의 떳떳한 직분이고 아름다운 공의 한 절개는 그 마음 상설(霜雪)같았다. 네 어찌 죽지 못했나 죽으면 다 흙인 것을..” 묘소는 충북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 능안의 덕현에 합폄이고 동쪽 인석의 두부에 칼로 벤듯한 것은 공이 인사(刃死)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
흔의 묘비 |
후사는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흔(訢)이며 선친을 고종치 못함을 한탄하여 관직에 제수되면 불응하고 자손에게 유훈하여 이 뜻을 세습하라 하였다. 2남은 함(諴)이고 3남은 담(譚)으로 선조 16년 출생하여 음보로 한성판관과 진위현령을 지내고 병자호란에 전공을 세웠다. <감수 문경공종회장 권오성, 글 사진 현봉 권경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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