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순례 62-3] 晩悔公과 炭翁公의 道山書院(종보 제432호 201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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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553회 작성일 12-04-20 21:48본문
만회선생(晩悔先生) 만회공(晩悔公) 득기(得己)는 선조3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선조22년 진사가 되어 의금부 도사가 되고 광해군2년 식년시 문과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다. 공은 예조좌랑으로 있을 때 인목대비를 폐출하는 의논이 일자 태안에 운둔하여 병조좌랑에 보임되어도 나가지 않고 양주(성남) 금곡동(素谷)에서 지내다 광해군14년에 졸하니 향년 53세였다. |
만회공 재사전경(성남시 분당구 금곡동 쇳골) 만회집 5권과 독서참의 5권을 남겼으며 박세채의 남계집과 연려실기술에 사록이 있다. 아들 시(諰)가 귀히 됨에 이조참판(吏曹參判) 양관제학(兩館提學)으로 추증되고 대전 탄방동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선생은「매사필구시 무락제이의(每事必求是 無落第二義)」라는 십자훈을 남기고 국조방목에는 가뭄에 꽃에 물을 주지 않으면 병들고 기근에 개에게 밥을 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병들어 앓는다는 명언이 있다. 묘소는 성남시 분당구 금곡동232번지에 있으며 포저 조익(趙翼)이 묘지(墓誌)를 짓고 심지원(沈之源)이 비문을 지었으며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전서하였다. 아들은 함창현감을 지낸 적, 구, 장수현감을 지낸 심, 증, 시(諰), 계(誡)를 두었다. |
소곡회관(성남시 분당구 금곡동 ) |
장자 적은 선공감역을 지내고 통훈대부로 함창현감을 지냈다. 묘소는 금곡동 쇳골 선고묘 계하에 있다. 낙소공(樂素公) 심은 선조33년에 출생하여 종묘서령, 의빈부도사, 종친부전보를 역임하고 장수현감과 송라찰방을 지냈다. 74세에 졸하고 평소 후학을 훈육하니 문생이 많았다. 묘소는 금곡동 쇳골 선고 우하에 있다. 6남 계는 호가 덕봉(德峰)이고 광해 5년에 출생하여 우암과 동춘당이 도의지교를 허하였다. 60세에 졸하니 형조참의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대전 팜암동 차일봉 아래에 있다. 탄옹선생(炭翁先生) |
만회공 재사 흥모재 |
다섯째 탄옹(炭翁) 시(諰)는 선조37년 출생하여 박지계의 문인으로 소시부터 총명하였다. 인조14년 대군사부(大君師傅)와 세자시강원 자의(諮議)가 되었다. 인조 17년 서당을 짓고 팔음당(八吟堂)이라 하며 신(身), 가(家), 국(國), 천하(天下), 난(亂), 기(飢), 질역(疾疫), 도(道)의 8절의 시를 읊었다. 효종4년 공조좌랑, 현종1년 가선대부 한성부 우윤(右尹),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윤선도가 서인을 공격하는 것을 가상하다했다가 서인의 탄핵을 받고 낙향하여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선생은 송시열과 같은 기호학파로서 예론(禮論)에 밝았는데 현종13년 69세에 졸하니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되고 도산서원(道山書院)에 배향되었다. |
만회공 휘 득기 신도비 |
선생은 일찍이 안동의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찬하였고 공산보(公山譜)를 편집하였으며 탄옹집 7권을 남겼다. 묘소는 대전시 탄방동 후록에 합부이며 명재 윤증(尹拯)이 묘지(墓誌)와 묘표(墓表)를 짓고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지었다. 여섯째 계(誡)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과 도의지교를 맺고 60세에 졸하니 형조참의로 추증되었다. 도산서원(道山書院)은 대전시 서구 탄방동 233-2에 있으며 학술 강당과 동쪽으로 숭모각, 경모재, 명교당과 동 서재, 그리고 서원 옆에 사당인 함덕사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서원 뒤에 탄옹공의 묘소가 있다. |
만회공 묘소(금곡동 쇳골) |
만회(晩悔) 탄옹(炭翁)의 학문사상 1. 만회(晩悔)선생의 구시(求是)정신과 당쟁관(黨爭觀) 앞서 논한 십자훈의 구시(求是)는 매사에 옳은 것은 추구할 것이고 제2의(義)에 멀어지지 말라고 한 것이다. 최선을 구하지 않고 차선책으로 적당히 미봉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구시정신은 탄옹(炭翁)이 이어 받았다. |
도산서원 명교당(대전시 서구 탄방동 233-2) |
만회선생의 가문은 서인계열에 속하지만 선대 어느 분도 당론(黨論)에 개입한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 임금을 섬김에 있어 호악(好惡)을 서로 이해하면서 당(黨)을 운영한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을 안타까이 여겼다. 동서분당을 심,김(沈,金)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계미(癸未) 율곡(栗谷)과 젊은 사류(士類)들과의 대립으로부터 시작하여 율곡이 허균(許筠)을 핍박하고 정철(鄭澈)을 옹호한 것이 당시의 분위기를 나쁘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율곡을 옹호하는 이를 서(西)라하고 그렇지 않은 이는 동(東)이라고 하니 율곡이 동서분당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박에 동인이 남북으로 갈라질 때 서애(西厓)와 아계(鵝溪)와의 관계 그리고 북인이 대,소로 갈라질 때 정인홍과 유영경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견해를 피력한 바 있으며 당쟁이 종식될 가망은 없다고 탄식하였다. |
도산서원 경모재 |
2. 탄옹(炭翁)선생의 예송(禮訟) 선생은 18세에 처삼촌인 박잠야(朴潛冶)에게서 수학하였다. 잠야는 기호(畿湖)일대에서 명성이 높은 대학자로서 서인계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탄옹은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 동춘(同春)송준길(宋俊吉)과 각별한 벗으로서 중간에 견해를 달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우의(友誼)는 끝까지 지켰다. 선생은 벗들과 조정에 나가 경론(經論)을 펴기도 하였다. |
도산서원 숭모각 |
조선왕조에서 전례(典禮)문제로 송사가 나고 당쟁이 격화되었는데 기해(己亥)예송(禮訟)이 있었다. 전례(典禮)문제는 국가의 대사에 속하며 예학은 유학자에 있어 필수불가결의 영역이었다. 효종이 승하하자 모후인 장렬왕후가 상복을 언제까지 입느냐 하는 문제에서 고산 윤선도의 소(疏)는 허목의 예론을 정치적으로 보았고 송시열은 군주를 비하하고 종통(宗統)을 어지럽혔다고 하였는데 우암은 굽히지 않고 백관들이 고산을 공격하여 귀양가게 되었다. 전례문제로 종통이 논란되니 서인(西人)들의 사활문제가 걸렸다. 이런때 탄옹선생의 소가 나왔다. 대의는 ① 장렬왕후는 3년복이 당연하며 송시열의 주장은 잘못되었으며 백성이 알면서도 말을 못한다. ② 윤선도를 귀양보내서는 안되며 감언지사(敢言之士)이다. ③ 양송(兩宋)은 조정에 앉아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 소가 나오자 만조백관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탄옹을 공격하였다. 탄옹은 한양을 떠나 광주로 내려가 8년만에 동춘의 요청으로 한성부좌윤으로 소명되었으나 응하지 안했다. |
도산서원 함덕사(사당) |
3. 가례참의(家禮僭疑)와 예사상(禮思想) 만회선생의 천리인욕론(天理人慾論)은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人慾)을 없애라는 것이고 인심도심설(人心道心設)은 인심이 도심의 명을 따르면 인욕이 없어져 천리가 상존한다 라고 하며 후손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 되어 터럭만큼이라도 선(善)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선(善)이란 하나의 시(是)일 뿐이니 극진한데 이르지 못하면 문득 불선(不善)이 되는 것이다. 고로 잠시라도 차선(次善)을 구하면 불의(不義)에 빠지게 된다.” 라 하였다. |
탄옹 휘 시 묘소(대전시 탄방동 도산서원 후록) |
상례(喪禮)의 실천에 있어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어려운 예제의 문제점을 밝히고 가례참의(家禮僭疑)를 저술하여 상례, 제례, 통례, 관례, 혼례 순으로 구성하였는데 그중에 상례(喪禮)를 절반이상 엮었다. 특징은 불합리한 속례에 대해서 고례(古禮) 및 주자(奏者)의 설로 바로 잡고자 하였고 자신의 예설(禮說)로써 이를 보충하였다. 예로서 상례(喪禮)의 초혼(招魂)과 복의(復衣)문제도 예의 합리성을 강조하였고 제례(祭禮)에서 “풍속에는 토신(土神)에게 제사하기 전에 선조묘에 제사하기 미안하다 하여 묘지기로 하여금 토신제를 행하면서 묘제를 하는데 성경(誠敬)하지 못하여 더욱 미안하니 주자(奏子)의 원의에 따라 묘제(墓祭)를 먼저하고 뒤에 토신제를 행함이 가하다.” 하였는데 사계(沙溪)도 이와 같았다. 혼례(婚禮)에서도 친영(親迎)문제를 다루었다. 선생은 고례와 주자의 예설을 존중하였으나 속례(俗禮)가 시의에 맞으면 속례를 허용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
24세 함창현감 묘소(선고묘 계하) |
4. 탄옹(炭翁)선생의 학문사상 탄옹선생의 학문은 공자(孔子)의 인(仁)의 생철학과 맹자의 의(義)의 사회철학의 주역(周易)회통(會通)사상과 만회의 의리(義理)사상, 박지계(朴知誡)의 예학(禮學)사상을 전승하여 조선 유학사상에 있어 미증유의 “호생(好生), 생민(生民)의 철학”과 공사명변(公私明辯)의 구체철학을 정립하였다. 호생,생민철학은 후기 실학의 태동으로 다산의 경학의 핵심으로 나왔고 공맹(孔孟)의 성학을 전승하여 참된 성학의 방향을 열어준 위대한 사상가였다. 호생(好生)이란 생을 좋아한다는 뜻이고 생민(生民)은 민을 살린다는 뜻으로 공맹(孔孟)의 인의(仁義)사상에 기초하여 주역의 호새지덕(好生之德)으로 종합된 철학이이며 왕도(王道)의 구체철학으로 발전하였다. |
24세 낙소공 휘 심 묘소(선고묘 우하) |
5. 도산지학(道山之學) 도산학은 만회와 탄옹 부자의 박학독행 청풍탁절(博學篤行 淸風卓節)은 당시 학자들의 칭송을 받아 후세 사람들이 선현의 도덕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탄방동에 도산서원(道山書院)을 세웠다. 만회와 탄옹이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분은 국재공(菊齋公) 권보(權溥)이다. 국재공은 안향(安珦), 백이정(白頤正) 등 여러 선현과 함께 정주학(禾呈朱學)을 도입하고 전파시킨 학자이며 양촌 권근(權近)선생 이후 대대로 학자가 이어졌다. 조익(趙翼)은 만회의 묘지명에서 ‘당대의 청사(淸士)를 논함에 권득기를 첫째 군자(君子)로 여겼고 고매한 품격과 절개가 으뜸으로 혼탁한 가운데 홀로 맑음을 보인다.’ 라 하였고 탄옹에 대해서는 총명하고 문장이 뛰어나 안자(顔子)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북방의 여진족이 침입함에 인조는 현재를 천거토록 하니 신하들이 권시(權諰)를 추천하여 대군사부(大君師傳)에 명했으나 거절하였다. 현종조에 가선대부 한성부우윤으로 봉하니 고사하였으나 윤허치 않으니 관직을 맡고 다시 우윤겸 동지의금부사에 보임되었다. 파직 후 좌윤에 보하였으나 사양하고 도산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저서 만회집과 탄옹집은 정치론, 심성론, 격물론, 도덕수양론, 교육론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왕도정치론은 인정(仁政)과 덕치(德治)를 제창하고 공도(公道)관을 내세워 군주는 마땅히 천지지공도(天地之公道) 병지공지심(秉地公之心)을 지켜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 하였다. 공도를 살펴 행하면 군왕은 치국평천하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선생은 왕패지변(王覇之辨)을 분명히 하여 왕도(王道)는 공도에 근원함에 반하여 패도(覇道)는 사리(私利)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국가가 위급하고 백성의 생활이 곤궁하며 당쟁이 빈번함에는 패도를 행함에 있으니 군주 및 신하가 왕도정치를 행하고 정치를 개혁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끝으로 인의(仁義)로서 나라를 세우고 민(民)으로서 나라의 근본을 삼는 것이라 여겼다. |
탄옹 권시 유묵 <자료제공 : 만회공종중, 도산학총서 만회,탄옹선생편, 현봉 권경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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