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순례 60-2)安襄公 諱 攀과 諸子孫(3) (종보 제429호 20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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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830회 작성일 12-04-20 21:18본문
(유적지순례 60-2)安襄公 諱 攀과 諸子孫(3) |
여주공(驪州公) 현(睍) 지난호는 홍성 낙행조 휘 확(確)과 아들 승(昇) 그리고 네 아들중 세째까지 소개하였다. 부사공 승의 제4자 23세(世) 여주공(驪州公) 현(睍)은 선조 9년에 출생하여 당숙 정익공에게서 수학하던 중 임난(壬亂)이 일어 정익공과 함께 왕을 호종하고 도성이 함락 후 왜적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주하여 평양에 도착하니 왕이 적정을 물은즉 공은 소상히 아뢰었다. 이로서 특명으로 선전관(宣傳官)에 보임되고 이후 사헌부 감찰을 거쳐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보임되었는데 대북파 정인홍이 있어 귀향하였다. |
23세 현 묘소(충남 청양군 남면 구룡리) 광해군 4년 남평현감(南平縣監)을 지내고 인조 2년 신창현감(新昌縣監)에 배하였으나 나가지 안했다. 인조 5년에 호병이 침입하자 창의사(倡義使)가 되어 진잠(鎭岑)현감을 겸하고 금구(金溝)현감으로 나가서 월하제(月下堤)를 쌓아 보강(洑江)을 만드는 치적을 남겼다. 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동요치 않고 충국근왕(忠國謹王)한 공으로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는데 고사(固辭)하였다. |
여주공 신도비 |
그후 파주목사(坡州牧使), 능주(綾州)목사, 장단부사(長湍府使)를 거쳐 가선대부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부임하여 전염병 구활에 진력하였다. 그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후에 가선대부 절충위장군병마 동지중추부사, 조사오위장을 지냈으며 추은을 입어 선친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케 하였다. |
여주공과 아들 양 형제를 위한 재사 |
효종 7년에 81세로 졸하니 효행의 정려(旌閭)가 내렸다. 묘소는 충남 청양군 남양면 구룡리에 있으며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영의정 남구만이 글을 썼다. 현은 양(諒)과 양(言易 ),사, 건, 훈 5남을 두었다. |
여주공 정려각(청양 구룡리) |
장자 양(諒)은 선조 29년에 출생하여 인조 5년 식년시 생원2등으로 급제하여 음보로 빙고별검(氷庫別檢), 교서관(校書館)별좌(別坐)가 되고 효행으로 통훈대부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효종 8년 62세로 졸하니 충남 청양군 남양면 구룡리 좌록에 장사하였다. 묘표는 좌승지 조세형이 찬하고 6세손 사엄(思儼)이 썼다. 후에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戶曹參判 兼五衛都摠府 副摠管)으로 가증되었다. |
여주공의 장자 빙고별검 양 묘소(선고묘 좌록) |
2자 양(言易) 은 광해군 5년에 출생하여 호는 양소(養素)이며 인조 20년 식년시 진사 3등에 급제하였으며 효행으로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77세에 졸하니 선고 계하에 장사하였다. 묘갈은 우상 윤증(尹拯)이 찬하고 판서 남정순이 썼다. |
24세 빙고별검 양과 정릉참봉 양 형제 정려각 |
형 양(諒)과 함께 정려를 세우니 “효자 행 정릉참봉 권양 지려”이다. 위 3부자는 부모님 병환에 단지 수혈하여 생명을 연장시키고 현은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으나 운명하니 3년간 여묘살이로 상복이 낡으니 조정에 알려져 숙종 원년 정려(旌閭)가 내려 묘소입구에 3부자 여각이 세워지고 청양군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양 형제의 정려(구룡리) |
확(確)의 차자 동지공 빙(憑)은 중종 38년에 출생하여 선조 29년 호서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 백의로 출정한 공으로 선조 37년 청난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86세에 졸하니 자헌대부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충남 홍성군 금마면 덕정리 삼산에 장사하고 도암 이재가 신도비문을 찬하였다. 동지공은 첨(瞻)과 수(晬) 두아들을 두었는데 첨(瞻)은 선조 3년에 출생하여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르고 76세에 졸하니 금마면 선고묘 건너편에 장사하였다. 차자 수는 선조 5년에 출생하여 충의위 사과(司果)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고 인조 14년 65세로 졸하니 금마면 야곡에 장사하였다. |
24세 참봉공 양 묘소(선고묘 계하) |
첨(瞻)은 집(言咠), 양(讓), 평(評), 유, 계를 두었으며 집(言咠)은 선조 26년 출생하여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이 되고 77세에 졸하니 원종공신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추증되었다. 수(晬)는 의(誼), 전(言全), 효(言虎), 심(諶), 비(言卑)를 두었으며 의(誼)는 선조 30년에 출생하여 광해군 8년 증광시 진사2등으로 합격하고 동년 별시 문과을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고 승지, 이조참의에 올랐다. 묘소는 금마면 불정리에 있다. |
24세 빙고별검(우) 참봉공(좌) 묘비 |
경력공(經歷公) 칭(偁)의 자손들 안양공의 차자 19세 경력공(經歷公)의 묘소는 김포시 대곳면 약암리 약산이며 배위 청주한씨의 집성촌으로 한씨가 세수하고 있다. 경력공의 아들인 목사공 훈(勛)은 무과하여 서흥부사(瑞興府使), 황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에 이르렀다. 중종 18년 함경도 삼수군수, 중종 21년 평안도 창성부사를 지냈다. 묘소는 약산의 선고묘 계하에 있다. 목사공 훈(勛)은 수(輸), 보(輔), 로(輅), 형 네아들을 두었다. 수(輸)는 연산군 8년 출생하여 중종 29년 무과하여 도사가 되고 강화유수에 이르렀으며 선조 11년 77세로 졸하니 묘소는 김포 통진 선영 계하에 있다. 수(輸)의 손 욱(昱)은 중종 28년에 출생하여 식년시 진사 3등으로 급제하고 명종 10년 식년시 을과 병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욱(昱)은 응물(應物), 격물(格物), 석물(碩物), 칭물(稱物), 주물(周物)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동은공(東隱公) 석물(碩物)은 광해군 5년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에 매진하여 의리론(義理論)을 지었고 효종 9년 경주의 구길리로 낙향하여 호를 동은(東隱)이라 하고 성리학을 탐구하며 입향조가 되고 음성에 낙향한 4종형 수졸재 휴(休)와 교서(交書)하면서 대월지공(對越之功)을 논하면서 은거수신하니 원근의 존모(尊慕)를 받았다. 현종 19년 62세로 졸하니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북가동 해변에 장사하였다. 문집은 동은일고(東隱逸稿)를 남겼고 동은정(東隱亭)이 있다. 행장과 묘지문, 동은정기(東隱亭記), 부제학 이종필이 지은 영모재기(永慕齋記)가 있다. 훈(勛)의 차자 보(輔)는 통훈대부 부호군과 서흥부사, 나주목사를 지냈으며 묘소는 김포 통진 약산의 선고묘 계하에 있다. 보(輔)의 자 윤(胤)은 어모장군 충좌위호군과 첨정(僉正)을 거쳐 해주목사(海州牧使)에 이르렀다. 윤(胤)은 황해 평산의 입향조로서 자손들이 모두 황해도 평산일대에 거주하고 있으니 윤(胤)의 아들은 광렬(光烈)이고 명종 19년 출생하여 선조 36년 식년시 전직 판관으로 생원으로 급제하여 판관 사과(司果)를 지내고 광해군 5년 증광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사간원, 예빈시정 겸 춘추관(春秋館)편수관(編修官)을 지내고 황해 함경 도사(都事)를 거쳐 서흥부사(瑞興府使)를 지냈다. 인조 7년 66세로 졸하니 묘소는 항해 평산 용산면 도덕동 선고묘 계하에 3쌍분이다. 광렬(光烈)의 아들은 영(潁), 경(熲)과 적, 석(碩)을 두으며 영(潁)은 선조 18년에 출생하여 광해군 2년에 식년시 생원으로 급제하여 참봉이 되었다. (권혁원 안양공 종회장 감수, 현봉 권경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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