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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공,검교공파현조

侍中公 花山府院君 克和 花川君 瑊(종보제471호20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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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8-30 00:54 조회3,7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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侍中公 花山府院君 克和 花川君


시중공 화산부원군 극화 화천군 감

시중공(侍中公) 휘 인가(仁可)
공의 선고 융(融)은 성화보에 누락되었다가 신사보(숙종 27년)에 후손 문순공(文純公) 상하(尙夏)의 청풍보(淸風譜)의 가첩에 입록되었다.
공은 시중공(侍中公) 파조로서 파보에 전중내급사문하시중(殿中內給事門下侍中)으로 되어있다. 전중은 왕족과 족보에 관한 일을 맡는 전중성이고 내급사는 6품 관직이고 문하시중은 종일품 정승반열인데 추봉직인 것으로 추정된다.
시중공(侍中公)의 아들은 화평(化平)이고 왕조의 혼조(昏朝)기를 만나 관직을 버리고 입산하니 세인이 은군자(隱君子)라 칭하였다.


1. 두곡재사 전경 : 충남 금산군 금성면, 두곡리 656-10



2. 두곡재사 사당 



3. 두곡재사 장서각


손(孫) 협중(協中)은 호가 삼은거사(三隱居士) 또는 역락당(亦樂堂)이다. 고려 충렬왕조에 누차 조정에서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로지 은거하여 학문에 힘써 정박(精博)하고 장자(長者)의 풍도가 있으니 삼은거사(三隱居士)라 하였다.
증손 시저(時著)는 호가 취성당(醉醒堂)이고 을과(乙科)에 급제하고 장사랑에 그쳤는데 원나라의 지배로 정정이 불안정한 시기에 부친을 따라 입산하니 세인이 조부와 같이 은군자(隱君子)라 칭하였다. 
현손 합경(合經)은 충렬왕 3년 장원(壯元)급제하였고 관직은 좌우소보승중랑장이고 예의판서(禮儀判書)이며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추증되었다.
5세손 참리공(參理公) 승길(承吉)은 참리 상호군(上護軍)이며 행평장사 수문전태학사(行平章事 修文展太學士)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이다. 묘소는 실전하였는데 고종 4년 김포 통진에서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한조각에 호군겸(護軍兼) 또 한조각에 사권공승길지묘(使權公承吉之墓)라 판독되었다.
6세손 진(賑)은 문과급제하여 검교중서사인에 이르고 추봉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都僉議)이다. 광정대부는 공민왕 11년부터 사용한 정 2품이다. 
7세손 공판공(工判公) 흥(興)은 봉익대부(奉翊大夫) 전공판서판종부시사(典工判書判宗簿寺事)를 지냈으며 시문(詩文)에 뛰어나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공의 시 5수가 실렸는데 시는 품격이 고아하고 서정적이다. 파보에 서원에 배향된 것으로 나온다.


4. 사간공 삼(參)의 묘소 : 금산군 금성면, 두곡리 둑실 우록
 

8세손 삼(參)은 공민왕 13년에 출생하여 공양왕 4년 문과급제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지제교, 춘추관 수찬관, 사간원 우사간(右司諫)에 이르렀다. 세종 18년에 졸하니 73세였다. 후에 화천군이 영달하여 의정부 좌참찬(左參贊)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추증되었다. 광주 첨담리에 장사하였는데 아들 극화(克和)가 비문을 지었다. 1971년 강남 신도시로 인하여 충남 금산군 금성면 두곡리 둑실(우록)에 이장하였다. 삼은 극중(克中)과 극화(克和)를 두었다.
극중(克中)은 태종 11년 광연정에서 시행하는 문과 을과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다. 공은 태종 15년 전라도도사로 재직시 문책되어 유배되었다가 세종 3년 예조정랑이 되고 이듬해 졸하니 광주 노곡에 장사하였는데 배위 민씨가 여막을 짓고 3년 시묘하여 정려(旌閭)를 받았다. 아들은 근(瑾)이고 묘소는 여주 등신에 있다.

화산부원군 극화(花山府院君 克和)



5. 화산부원군 극화의 묘소 : 금성면 두곡리 선고묘 좌록



6. 극화/화천군 묘비

공의 호는 습재(習齋)이다. 태종 11년 사마시 장원하여 주부(主簿)가 되었는데 태종 14년 성균관에서 행한 친시문과 을과 급제하였다. 세종 12년 전라도 낙안군수로 나가 청렴강직하고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하니 관리들이 두려워하였고 군민들은 공을 애모하여 받들었다.
선치(善治)하였고 세종 15년 경주 부윤(府尹)으로 나갔는데 사적이 동도명환록(東都名宦錄)에 실려 있다. 세종 21년 전라도관찰사(觀察使), 세종 22년 나주목사가 되고 23년 예조참의로 세자빈 권씨의 치상(治喪)을 하였다. 세종 24년 황해도관찰사, 세종 25년 경주부윤(慶州府尹),
세종 28년 평안도관찰사가 되고 세종 30년 충청도관찰사 겸 청주목사가 되고 문종 1년 충청감사로 있을 때 토지제도의 분등법(分等法)에 관하여 장문의 상소를 올렸는데 왕은 채택하고 노련한 목민관에게 자문을 구하라고 명하니 전제(田制)와 세제(稅制)를 제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1월에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올랐으며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겸직하였다.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어 전국의 목(牧)을 폐지하는 관제 개편에 반대하여 중지시켰고 단종1년 가정대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된다.
공은 문장과 학행(學行)이 당대에 뛰어나 동문선(東文選)에 올랐으며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평안도 삼화의 객사, 안동의 향사당(鄕射堂), 음성, 무안의 관사에 제영(題詠)하였다. 유고로 습재집이 있으며 판각이 음성과 순창에 있다. 졸후 차남 감(?)이 귀히 되어 보조공신과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묘소는 청담동에 있었는데 개발로 충남 금성면 두곡리 선고묘 좌록으로 이장하였으며 묘비는 한수재 선생이 썼다. 아들은 기(王奇 )와 감(?)을 두었다. 
기(王奇 )
공은 세종 21년 친시문과에 급제하고 세종 29년 경차관이 되고 30년 예조정랑, 31년 병조정랑에 이르렀으며 세조 1년 좌익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공의 아들 은영(恩榮)은 군수를 지냈고 손 인행(仁杏)은 중종 2년 식년시 문과급제하여 예조정랑에 오르고 문장이 명세(鳴世)하여 명종 20년 형조참판 성절표사(聖節表使)의 가함으로 명사(明使)와 수시(酬詩)를 창화(唱和)하였다. 묘소는 청담동에서 금산 두곡리로 이장하였다. 차손 인수(仁壽)는 연산군 1년 별시문과급제하여 성균관 학유를 거쳐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화천군 감(花川君 )


7. 화천군 감(花川君 ?)의 묘소 : 금산 두곡리 조고묘 아래로 이장

공은 세종 5년 출생하여 세종 26년 처음 녹사(綠事)에 제수되고 세종 32년 주부(主簿)가 되고 문종 2년 사마시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고 세조 1년 좌익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세조 2년 황해도 도사, 세조 3년 한성부 판관으로 백성을 잘 다스리고 송사(訟事)처리를 잘 하였다. 세조 11년 당상관 통정대부 봉상시판사가 되고 세조 12년 추중정난익대공신에 훈봉 되었으며 이등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예종원년 정난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홍문관직제학 상서원정(尙瑞院正) 화천군(花川君)으로 봉군되었다. 성종이 즉위하자 자헌대부 도승지가 되고 이어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성종 2년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가을에 평안도관찰사로 나가고 성종 3년 대사헌(大司憲), 숭정대부(崇政大夫)로 가자되었다. 성종 5년 한성판윤으로 국상에 대전관(代奠官)이 되었다. 또 동년 국장도감의 돈체사(頓遞使)가 되고 성종 8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북경에 다녀왔다.


8. 직곳재사 : 경기도 시흥시 하중동 직곳(관곡지)

 성종 9년 좌참찬(左參贊)이 되고 동 10년 중국사신의 원접사(遠接使)가 되고 12월 성절사(聖節使)로 북경에 파견된다. 동 11년 의금부사를 겸직하고 평양선위사(平壤宣慰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는다. 성종 12년 평안도 체찰사(體察使)가 되고 동 13년 경기 진휼사(賑恤使)로 나가고 다시 화천군이 되며 성종 14년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고 성종 15년 다시 화천군에 봉해지고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했다. 동 16년 전라도 진휼사로 나가며, 성종 18년 졸하니 향년 69세였다. 시호는 양평(襄平)으로 내리니 일로 공이 있으니 양(襄)이고 법도가 있으니 평(平)이라고 하였다.
공은 의표(儀表)가 준정(俊正)하고 성품이 온화하나 안으로 굳세어 여섯 임금을 섬기고 파란 많은 격변을 겪으면서 밝게 병집(秉執)하여 안으로 굳세여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고 흔들림이 없었으니 사림들이 공의 별세소식을 듣고 애석해 하였다. 청담동 조고묘 위에 안장하였는데 금산 두곡리 조고묘 아래로 이장하였다. 비표(碑表)를 석봉(石峰) 한호(韓濩)가 쓰고 음기는 10세손 진응(震應)이 지었다. 공은 예종조에 불사(佛事)에 참하였고 연려실기술에 사적이 있다.
후사는 만형(曼衡), 구례현감 응형(應衡), 통훈대부 토산현감 순형(順衡)을 두었다. 

만형(曼衡)


9.만형(曼衡)의 묘소 : 경기도 시흥시 하중동 직곳(아파트 후록)

공은 연산군 9년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통례원 좌통례(左通禮)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시흥시 하중동 직관(職串)이고 묘표는 석봉(石峰) 한호(韓濩)가 썼다.
공은 당시에 명망이 드높은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선생이 둘째 사위로 맞아들였다. 특히 사숙재선생이 중국에 사신을 갔다가 돌아올 때 전당호(錢唐湖) 백련(白蓮)의 연자(蓮子)를 채취하여 공에게 재배토록 하였는데, 이 연꽃의 이름이 전당홍(錢唐紅)이다. 또한 정조대왕(正祖大王)이 1797년에 이곳에 거둥하여 향시(鄕試)를 베풀었고 안산(安山)을 연성(蓮城)이라고 호칭한 유래가 되었으며, 또 연당의 연지기를 6명을 두어 부역(賦役)과 신포(身布)를 면제하고 수호토록 한 사실은 소유공(小游公) 휘 용정(用正)이 안산 군순(安山郡守)로 재직할 때 기록한 <연지사적(蓮池事蹟)>으로 알 수 있다.
아들은 현(鉉), 상(?), 용(鎔)을 두었다. 상(?), 용(鎔)은 다음에 게재한다.


10. 응형(應衡)의 묘소 : 금성면, 두곡리 둑실 우록 사간공 아래


11. 현(鉉)의 묘소 : 시흥시 하중동 직곳 중록

현(鉉)은 성종 24년 출생하여 훈신(勳臣)의 적장으로서 4품관의 녹을 받고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명종 18년에 졸하니 수 71세이다. 묘소는 시흥시 하중동 가족묘지 아들 대성의 묘 아래에 있다.


12. 대성(大成)의 묘소 : 시흥시 하중동 직곳 상록

만형의 손 대성(大成)은 중종 13년 출생하여 효행(孝行)으로 활인서 별제를 받았으나 부임치 않고 훈신의 세작으로 어모장군 부호근을 받았으나 비문에 쓰지 말라고 유명(遺命)하였다. 선조 23년 졸하니 수 73세였다.
묘소는 시흥시 하중동 가족묘지 위에 있다. 아들은 제(霽)와 주(?)를 두었다. 

 (자료제공 노림 권중덕 감수 :  월천 권경상     편술 :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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